295. 뉴 페이스
나강인이 알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며 실실 웃었다.
- 흐흐흐. 내일 보스전 작전회의 하자고 전화했구나? 이기고 싶구나? 그러면 나한테 잘 보이거라. 엣헴.
“내일 대회는 바하테크 본사에서 하는데, 너 거기 나가게?”
- 어? 그게 왜?
“김유찬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널 보면 참 좋아하겠지?”
- 앗!
“바보냐?”
- 나 바보 아니라고!
“바보는 아닌데 한 치 앞도 못 보고 대책도 없구나? 어쩌려고?”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 요즘은 외부 활동이 어려우니까 이 게임이 나한테는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내가 언제 또 대회에서 우승해서 프로팀하고 싸워보겠어?
“너 정도면 나중에 프로팀을 행사에 초청해도 되잖아.”
- 그게 토너먼트에서 우승해서 중간 보스팀까지 물리치고 나서 싸우는 것하고 같냐고. 난 내일 최종 보스팀하고 꼭 싸워보고 싶은데….
“네가 나타나면 현장은 난리가 난다. 기자들이 너한테 몰려들 거다.”
- 앗! 그건 안 되는데….
나강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너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건 어때? 네 개인 정보는 입력을 안 했고 마이크도 안 썼으니까, 대타를 세워도 아무도 모를 거다.”
알레이나가 발끈했다.
- 그럴 거면 차라리 대회를 포기하지! 나 대신에 대타라니! 그럼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안돼!
“그래. 너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 슬프다. 포기하기 진짜 싫은데 어쩔 수 없잖아.
“포기하라고는 안 했다.”
알레이나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 응? 방법이 있어?
“마스크와 안경 챙겨와라. 안경은 기왕이면 뿔테로.”
- 으응? 겨우 그 정도로 해결이 되나?
“나를 믿어. 누가 너를 보든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몰라도 대회만 나갈 수 있으면 할게!
“내일 바하테크로 가기 전에 여기로 먼저 와. 여기서 세팅해야 하니까.”
- 알았어! 내일 옆집으로 가면 되지? 오늘은 나도 오랜만에 집에 가서 자야겠다.
“아니. 거기는 가지 마라. 서울 외곽에 작업할 곳이 있다. 주소 보내줄 테니까 일찍 와라.”
- 알았어!
***
중간 보스전에서 패배한 프로게이머가 오늘 경기를 다시 돌려보며 말했다.
“세 판 다 지원전문가에잇 때문에 졌어.”
그런데 그 경기를 보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팀의 다른 프로게이머들도 모여서 보고 있었다.
“바하테크에서 모아준 팀원들은 실력이 도전자들하고 큰 차이는 안 나지?”
“두어 명은 비슷하고, 두어 명은 살짝 떨어져. 그 정도 패널티는 있어야 실수로 질 수도 있잖아. 그래야 최종 보스전이 가끔이라도 열리지.”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르네.”
“우리 실수가 아니라 에잇이 너무 강해서 졌어.”
“근데 에잇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피지컬이 장난이 아닌데? 프로겠지?”
“프로면 내일 못 나오지. 그건 아닐 거야.”
“전직 프로?”
“이 대회는 전직도 못 나와.”
“연습생 출신이든지.”
“원래는 연습생도 안 되는데,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연습생이면 편법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
다른 프로게이머가 반박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공식 등록이 안 됐다는 건 중간에 그만뒀다는 건데, 이런 실력자가 연습생을 왜 그만두는데?”
“집안 사정이 있나?”
“설사 그렇다 해도, 이런 연습생이 있으면 소문이 나도 여러 번 났어야 해. 그런데 난 들어본 적도 없다고.”
“그럼 재야 고수인가?”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예가 없는 건 아니잖아. 취미로 했는데 처음부터 잘하다가, 어느새 아마추어 중에서는 상대가 없어서 프로가 된 경우 말이야. 실력이 너무 빨리 늘어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전에도 있었어.”
“예전에나 있었지. 요즘은 그러기 어렵지 않나? 이 바닥에 고인물이 워낙 많잖아.”
“아니면 외국에서 왔나?”
그들이 게임 영상을 보며 의견을 나누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일 현장에서 만나보면 알겠지.”
그들 중에 내일 최종 보스전에서 도전자 팀에게 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팀, 팀워크는 엉망이지?”
“완전히 개별플레이야. 심지어 에잇하고 듀오로 출전한 아름다운성환도 플레이는 따로 놀아. 평소에 같이 했던 느낌이 아니야.”
동료가 투덜댔다.
“조직력이 저렇게 엉망인데, 넌 어떻게 저런 팀한테 지냐?”
중간 보스전을 책임졌던 프로게이머가 항변했다.
“우리 팀도 같이 연습한 적 없는 급조팀이었다고. 우리가 팀워크까지 좋으면 도전자가 절대로 못 이긴다고 오늘 낮에 매칭시켜 주더라. 연습 게임 한 번 못 해보고 대회에 들어갔다고.”
다른 팀원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럼 내일은 저 아마추어들에게 이 게임이 팀워크가 왜 중요한지 가르쳐주면 되겠네.”
다섯 명 중에 제일 실력이 좋은 사람은 중간 라인을 맡은 프로게이머였다. 프로게이머 경력도 제일 긴 그가 팀 리더를 맡고 있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원전문가에잇의 플레이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전술 분석은 간단히 해두자. 우리가 한 판이라도 지면 쪽팔리잖아.”
“어? 형. 설마 그래야 할 상대야?”
팀 리더가 피식 웃었다.
“만약을 대비한 거야. 설마 우리가 저런 원맨팀한테 지겠냐?”
***
이튿날 알레이나는 서울 외곽에 있는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찾아왔다.
“와아. 되게 낡아빠진 건물이 이런 구석에 있네? 여긴 누가 쓰는 곳이야?”
“내 거다.”
“월세?”
“샀다.”
알레이나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이야아. 산세권에 정감이 넘치는 건물이 있잖아! 작고 소박하지만 이게 어디야!”
그런데 알레이나는 혼자 온 게 아니다.
“영희 씨하고 같이 왔네?”
알레이나는 총권도 수련생인 민영희를 경호원으로 데려왔다.
그녀가 자랑했다.
“오늘 바하테크 본사에 갔는데 만약 기자들이 내가 누구인지 눈치챈다 싶으면, 영희 언니가 즉시 날 그곳에서 빼내 줄 거야. 이 언니가 실력은 최고거든.”
민영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알레이나. 나 사범님 앞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부끄럽잖아.”
“아. 맞다. 영희 언니는 광돌이한테 무술 좀 배웠다고 했지?”
“그런데 넌 왜 나 사범님을 자꾸 광돌이라고 부르는 거야?”
나강인이 대신 대답했다.
“내가 광년이라고 먼저 불렀거든요.”
“아. 역시…. 알레이나가 그렇게 경우가 없지는 않은데 이상하다 했어요.”
“어…. 난 경우가 좀 없긴 하죠. 다음 훈련 때 영희 씨는 순기 씨하고 같이 특훈?”
“네? 아뇨. 그건 좀…. 그리고 왜 순기는 덩달아 특훈을 받아요?”
“순기 씨는 이미 특훈이 예약되어 있어서요.”
“그럼 순기 혼자 받는 거로….”
나강인이 제작 거점의 문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밖에서 작업할 순 없으니까.”
알레이나는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들어갔다.
“어디. 어떻게 해놓고 지내나 보…. 어? 우와아!”
그녀는 제작 거점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여긴 뭐야? 건물 외부는 허름한데 내부는 장난 아니게 있어 보인다!”
내부에는 대형 모니터 여러 대와 서버, 3D 프린터나 레이저 커터 같은 제작 장비,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제품이 보관된 전시대 등이 있었다.
“이것저것 만드는 취미생활 공간이다.”
“이게 어떻게 취미야? 여긴 진짜 비밀 기지 같잖아!”
민영희는 정부 소속은 아니지만, 정부의 일을 프리랜서로 받아서 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가 제법 있다.
게다가 나강인에 대한 소문은 총권도를 같이 배우는 친구들을 통해서도 들었다.
민영희도 감탄하며 말했다.
“여기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그곳이군요. 그런데 여기가 좀 외진 곳인데, 보안 문제는 어떻게 하셨어요?”
“문을 부순다면 모를까, 보안장치를 들키지 않고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컴퓨터를 뜯어가 봤자 의미 있는 건 못 알아낼 테고요.”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 도면에도 기본적인 락은 걸려 있다. 그런데 그 도면은 어차피 철인기공에 같은 자료가 존재하는 데다가, 제품을 구해서 역설계하면 알아낼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데이터를 분석해봤자 현재 기술로는 개인 특화형 드래곤 플레이트를 새로 설계할 수 없다.
나강인이 임무를 위해 수집한 자료는 AI 전지인이 암호화했다. 그 암호화된 데이터 역시 현재 알려진 방법으로는 분석할 수 없다.
“기술 보안은 제대로 하셨겠죠. 그런데 완성된 제품을 훔쳐가면요?”
“여기에는 크게 중요한 건 없긴 한데.”
나강인의 몸에 맞춘 드래곤 플레이트는 차 트렁크에 있다. 드래곤 헬멧은 이곳에도 있지만, 그건 드래곤 플레이트만큼의 가치는 없다.
“훔쳐간 놈이 있으면 찾아내서 박살을 내고 다 회수하겠지요?”
“아유. 나 사범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면 감히 못 훔치겠네요.”
그녀가 한쪽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기 드래곤 플레이트가 있잖아요. 저건 가치가 있을 텐데요.”
“저건 테스트용으로 만든 거라서 성능에 문제도 많고, 어차피 몸에 딱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훔쳐가 봤자 쓸모가 없어요.”
민영희가 그 드레곤 플레이트 샘플을 손으로 만져보며 감탄했다.
“와. 그래도 그 귀한 드래곤 플레이트가 이렇게 막 굴러다닌다니….”
민영희가 나강인을 돌아보며 부탁했다.
“나 사범님. 저도 드래곤 플레이트 하나만.”
“안됩니다. 영희 씨한테 만들어주면 다른 사람들은 어쩌라고.”
총권도 수련생은 다섯 명이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순기나 호석이는 경찰이고 군인이니까 보급 나온 방탄조끼를 입으면 되고, 남수 오빠나 경식이는 필요하면 기관에서 구해주겠죠. 근데 전 프리랜서잖아요. 이걸 어디서 구해요? 하나만 주면 안 돼요?”
“안돼요. 내가 요즘 바빠서.”
“은하 씨는 한 벌 있다던데!”
“은하는 원래 예외고요.”
“바쁘다면서 게임 대회나 나가고!”
“어…. 헬멧이라면 하나 줄 수 있는데.”
“경호원이 어떻게 헬멧을 쓰고 돌아다녀요?”
“그것도 그러네요. 그냥 팔뚝보호대나 하나 만들어줄 테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민영희는 나강인이 정말로 하나 챙겨줄 줄은 몰랐다.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머! 진짜요? 근데 팔뚝보호대는 뭐예요?”
“제대로 만들면 그걸로 총알도 막을 수 있지만, 그건 영희 씨가 하기 어려울 테고….”
“그런 일은 나 사범님이나 가능하죠.”
“칼도 막고 쇠파이프도 막고 어지간한 건 다 막을 수 있는 성능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앗! 딱 제가 원하던 거네요!”
“대신에 한두 번 막으면 내구도가 바닥나니까 테스트는 하지 말고요.”
“돌발상황에서 딱 한 번만 막으면 충분해요. 그러면 제가 적을 박살 낼 수 있으니까요.”
알레이나는 제작 거점을 구경하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여기서 만드는 것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건 알아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 광돌이 백수 아니었어?”
“백수는 너고.”
“나 백수 아니다! 나 알레이나 민이야!”
“어. 미제 백수.”
나강인은 장비를 사용해 민영희의 왼쪽 팔뚝을 측정했다.
그는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팔뚝보호대를 설계했다.
새로 만드는 건 드래곤 플레이트에 비해 크기도 작고 성능도 낮춘 것이라 작업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알레이나 민이 물었다.
“뭔지 몰라도 지금 만들게? 우리 바하테크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너 변장하는 동안 기계를 돌려서 부품을 만들 거야.”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간소화 설계를 적용하여 팔찌보호대의 방어력이 대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방어력은 확실히 떨어진다. 대신에 설계와 제작 시간 모두 짧게 줄일 수 있다.
“칼이나 쇠파이프 정도만 충격 없이 막을 수 있으면 돼.”
나강인은 드래곤 플레이트 부품 제작용으로 세팅해놓은 장비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가동한 후에 알레이나에게 말했다.
“기계가 부품을 만드는 동안 넌 변장을 하자.”
나강인은 변장 도구를 꺼내왔다.
알레이나가 의자에 앉은 채로 걱정했다.
“진짜 이런 거 할 줄 알아?”
AI 전지인은 연예인용 메이크업을 할 수 있다. 나강인이 그 능력으로 프프걸스나 천사전사단을 도와준 적이 있다. 신은하는 요즘도 바쁠 때는 나강인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메이크업은 잠입 침투 작전용 변장 스킬을 변형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 스킬의 원래 목적은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다. 변장에 필요한 도구도 이 제작 거점에 모두 준비되어 있다.
“날 믿어라. 사람들이 네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게 고쳐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