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침투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속삭였다.
“아니, 형. 나한테는 위험한 일을 막 시킬 것 같은데, 은하 누나만 안전한 곳으로 보낸 거예요?”
“불안하면 너도 아름이는 보내.”
“쟤는 내 말 안 들어요.”
“나도 은하를 속여서 스케줄 보냈어.”
윤아름이 안성환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어? 은하 누나 이야기.”
“아! 여기 오면 스캔들 난다는 거? 하긴, 운명의 창 남자 주인공이 참가하는 대회에 여자 주인공이 응원 오면 스캔들이 나겠지.”
나강인이 팬과 기자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김유찬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유찬 씨가 어딜 가도 주변에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몰리지는 않았는데….”
윤아름이 설명했다.
“길 가다가 만난 게 아니라 토너먼트 우승자가 최종 보스전을 치르러 온 거잖아요. 여자 게이머들 사이에서 완전 난리 났어요.”
“저기 있는 여자들이 다 게이머야?”
“그렇대요.”
“너는 아닌데 왜 왔어?”
“저야 뭐, 성환이 응원하러 왔다가 겸사겸사…. 히히.”
김유찬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손도 잡아주면서 지나갔다. 싸인은 몇 명에게 해줬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줄 수는 없었다.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 사람들이 흩어졌다. 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기자들은 유찬 씨를 따라 들어갔고 팬들은 흩어졌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들어가자.”
윤아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우리도 유찬 오빠하고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는 건가요?”
“그러겠냐? 내가 다른 쪽 엘리베이터 위치를 아니까 거기로 가자.”
“췟!”
바하테크 본사에는 특정 직원만 들어갈 수 있는 독립 공간이 있다. 17층 전체가 그런 공간이었다. 18층 본사 건물의 17층에 있는 그곳을 직원들은 하이 캐슬이라고 불렀다.
토너먼트 우승자의 일행은 16층의 빈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윤아름은 김유찬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이미 17층으로 이동한 후였다.
16층 회의실에는 알레이나의 경호원 민영희, 안성환을 따라온 윤아름, 그리고 김유찬의 매니저 세 명이 있었다.
윤아름은 친화력이 좋은 편이다. 그녀는 한쪽에 준비된 다과를 두 사람 앞으로 옮겨주면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주로 김유찬의 매니저에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매니저가 아니라 김유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그래서 유찬 오빠는 뭘 좋아하세요?”
“먹는 거야 당연히 남들처럼….”
“역시 소고기인가요? 아니면 이슬만 드시나요?”
“사람이 어떻게 이슬만 먹고 살아요?”
“그럼 소고기군요?”
매니저는 윤아름의 질문공세를 피하려고 민영희에게 물었다.
“저기, 우리 언제 본 적 없습니까? 어쩐지 낯이 익은 느낌이 드는데.”
민영희는 연예인 경호 일을 가끔 한다. 주로 여자 연예인 쪽에서 그녀를 원했다.
그녀는 나강인 덕분에 얼굴에 약간의 보정이 들어간 상태다. 그녀가 보정된 얼굴을 자랑하려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행사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요.”
“그럼 혹시 우리 쪽 관계자….”
“그건 아니고요. 경호원으로요.”
“아! 누구신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하고 얼굴이 조금 다르….”
“화장이 잘 받아서 그런가?”
“화장만으로 그렇게까지 될 리가….”
민영희가 매니저를 째려보았다.
매니저는 민영희에 관한 무서운 소문이 기억났다. 그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화장이 진짜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습니다.”
머쓱해진 매니저에게 윤아름이 다시 물었다.
“다음 작품은 뭐 들어가세요? 이번에도 영화겠죠? 아! 유찬 오빠가 운명의 창으로 칸에 가실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인가요?”
“과자 맛있네요. 좀 들어요. 하, 하하.”
***
토너먼트 우승자 중 네 명이 17층 하이 캐슬에 들어갔다. 한 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7층 내부는 탁 트여있었다. 중간에 벽이나 기둥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17층 전체가 열린 공간이었다.
김유찬이 감탄했다.
“이야아. 여기 진짜 멋지네요. 가구도 다 고급이고, 저쪽에 유리로 된 벽 뒤에 신기한 장비들도 많고요. 영화 배경으로 쓰면 최고겠어요. 연구소 같은 거로요.”
안내한 여자 직원이 미소와 함께 설명했다.
“여기는 원래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제한구역이에요. 직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출입 자격이 있는 곳이라서, 영화 촬영은 무리죠.”
“저 장비 구경 좀 해도 되나요?”
“죄송해요. 저는 그러고 싶은데 제 권한이 아니라서….”
AI 전지인이 아쉬워했다.
- 장비에 자연스럽게 접근해 조사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나강인도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말했다.
“지인아. 저 장비들 말이야. 우리 제작 거점에 있는 것하고 비슷한 것들이 있네?”
반대편 끝에 있는 장비들이라 거리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모델명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AI 전지인이 장비 몇 대를 확대해 보여주었다.
- 그 미술관의 액자 프레임을 제작하기에 충분한 장비들입니다.
“여기가 그 사건의 배후라는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바뀐다.”
- 저도 그렇습니다.
아직 프로게이머 팀은 도착하지 않았다. 안내하던 직원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좀 늦으시나 봐요.”
김유찬이 손을 흔들었다.
“에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늦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정보다 일찍 온 거니까요.”
“어머. 역시 친절하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하하하.”
김유찬이 일찍 온 건 나강인이 여기서 일찍 만나자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나강인은 일부러 프로게이머 팀이나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왔다. 그래야 조사할 시간이 생긴다.
나강인이 직원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대회에 쓸 PC 상태를 점검해도 되겠습니까?”
“어머. 그럼요. 당연하죠.”
나강인이 자리에 앉은 후에 옆자리의 안성환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성환아. 여기 이 게임용 PC들이 내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해봐.”
“네? 왜요?”
“여기가 많이 수상해.”
“잠깐만요. 금방 확인할게요.”
안성환은 대학생 해커다.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이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보안 전문 사이트에서 활동한 고수다.
그가 잠시 후에 대답했다.
“확인했어요. 일단 이건 외부와 연결된 망이에요. 인터넷으로 이 게임을 플레이하려면 당연하겠죠.”
“저 구석에 있는 서버는?”
“17층은 다른 층과는 분리된 네트워크 장비를 쓰고 있어요. 저 서버와 이 PC는 같은 네트워크 장비로 연결되어 있고요.”
“그럴 줄 알았다. 역시 같은 공간에 들어오는 게 정답이네. 저거 뚫자.”
“저 서버에도 내부 방화벽이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그냥은 못 뚫어요.”
나강인이 USB를 하나 내밀었다.
“이걸 써.”
그 USB에는 AI 전지인이 만든 해킹 보조 툴이 들어 있다.
“어제 매뉴얼을 보내준 그 툴이야. 이게 있으면 되겠지?”
“매뉴얼에는 취약점을 공격하는 툴이라고 적혀 있던데, 그게 진짜라면 저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걸요?”
AI 전지인이 만든 그 툴에는 기본적인 기능만 들어 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해킹을 할 수 없다. 그 툴은 우수한 해커의 손에 들어가야 빛을 발한다.
안성환이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요. 해킹하다가 문제 생기면 형이 저랑 아름이는 구해주는 거죠?”
“알려지지 않은 취약점을 이용하는 거니까, 제대로만 하면 저 서버가 뚫렸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빠져나올 때는 내가 흔적을 지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잠깐만요. 알려지지 않은 취약점인데 형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원래 남들이 모르는 걸 많이 알아.”
안성환은 나강인이 유명 화이트 해커 ‘새벽 토끼’라는 걸 알고 있다.
“어….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설득력이 있네요.”
같은 층 같은 공간에 있는 그 서버가 뚫리는 데는 2분이면 충분했다. 안성환이 감탄했다.
“와아. 이게 이렇게 쉽게….”
“이제 자리 바꾸자.”
나강인이 안성환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 후에 AI 전지인에게 지시했다.
“지인아. 너한테 제한이 걸린 부분은 성환이가 해결했다. 이제 필요한 자료를 찾아.”
- 안성환 덕분에 시스템에 침투했습니다.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 자료를 외부로 업로드하면 흔적을 남길 위험이 있습니다.
“저쪽에서 눈치채면 꼬리를 자를 게 뻔하니까 눈으로 확인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차 이사에 관한 정보니까 그걸 최우선으로 찾아.”
AI 전지인이 작업을 시작했다. 손이 키보드 위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잠시 후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그 미술관 위조 액자 제작 관련 데이터를 찾았습니다.
“역시 여기구나. 차 이사는?”
- 정보를 찾는 중입니다.
옆에서 안성환이 말했다.
“형. 안내해준 직원분이 이리로 오는데요? 형이 키보드를 너무 열심히 친 거 아녜요?”
나강인이 오른쪽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김유찬이 앉아 있었다.
김유찬은 이미 나강인이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힐끗거리며 보던 중이다.
“유찬 씨가 저 직원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시간 좀 끌어줄 수 있어요?”
김유찬이 씩 웃었다.
“역시 사건이군요? 어쩐지 일찍 오라고 하더라. 기다려요. 내 연기력으로 해결할 테니까.”
김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가오는 직원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목에 건 사원증에 적혀 있었다.
김유찬이 씩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윤현아 대리님?”
그녀의 귀가 빨개졌다.
“네? 네?”
“저쪽에 있는 멋진 장비들은 진짜 구경시켜주면 안 되나요?”
“그게요….”
“우리가 예정보다 일찍 와서 시간도 남는데요.”
“하, 하지만…. 죄송해요. 그러다 걸리면 저 짤려요.”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윤현아가 안성환과 나강인을 보았다.
“그런데 다른 분들이 PC 점검을 열심히 하시….”
김유찬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윤현아의 팔을 잡았다.
“어어. 현기증이….”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관심은 김유찬에게 집중됐다.
“어머!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119 부를까요?”
“괜찮아요. 요즘 무리해서 활동했더니 기가 허해져서 그런 겁니다.”
“어머! 무리하시면 안 되죠. 김유찬 씨의 몸은 국보라고요.”
김유찬은 윤현아가 나강인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부탁했다.
“잠깐 쉴 곳이 있을까요? 저기 저 소파에 누웠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그러셔야죠!”
“부축 좀….”
“영광이에요! 저한테 안기세요!”
“파, 팔만 잡아주면 충분합니다.”
“아! 네!”
그녀가 김유찬을 부축해 고급 소파로 이동했다. 그 소파는 직원들이 술을 마시며 놀 때나 쉴 때 쓰는 것이다.
김유찬은 소파에 누웠다. 여자 직원은 김유찬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유찬이 직원을 붙들고 있는 동안 AI 전지인이 17층 하이 캐슬 내부 서버를 열심히 뒤졌다.
“뭐가 좀 나오냐?”
- 다양한 정보가 있습니다만, 차 이사를 잡을 단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건져야지. 좀 더 뒤져봐.”
- 찾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다. 문이 열리면서 프로게이머 팀이 들어왔다. 그들만 들어온 게 아니라 회사 사람도 몇 명 같이 들어왔다.
“어? 저 사람들이 왜 벌써 와? 아직 시간 있잖아.”
- 바하테크 사장 방태석을 발견했습니다.
방태석이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김유찬 씨가 일찍 오셨다면서요? 소식 듣고 달려왔습니다. 하하하.”
“이런. 유찬 씨가 너무 유명한 게 문제구나.”
김유찬이 그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하려고 일부러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 여기 있습니다.”
들어온 사람들이 김유찬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러려면 나강인이 있는 곳 근처를 지나가야 한다.
“지인아. 더 작업하긴 무리겠다. 방법을 바꿔야겠어. 일단 작업은 중단….”
- 찾았습니다!
“키보드는 최소한으로 쓰면서 데이터 확인해.”
화면에 문서 몇 페이지가 지나갔다.
-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제 서버에서 빠져나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을 몇 번 움직였다.
- 들어갈 땐 안성환이 필요했지만, 빠져나가는 건 쉽습니다. 흔적을 없애는 건 남겨둔 툴이 자동으로 처리하고 소멸할 겁니다. 이미 필요한 조치를 끝냈습니다.
모니터 화면이 바탕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잘했다.”
나강인이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그 모습은 사장과 프로게이머들이 들어와서 바로 앞을 지나가니까 일부러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은 나강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모두 톱스타 김유찬을 향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김유찬이 어그로를 잘 끌고 있습니다. 게임 속에서는 원거리 딜러이더니 현실에서는 탱커가 됐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김유찬의 앞으로 가서 웃고 떠드는 동안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찾아낸 데이터는 뭐야?”
- 전화번호입니다.
“마지막에 확인한 자료가 몇 페이지는 됐잖아.”
- 그 자료를 분석해 전화번호를 하나 찾아냈습니다.
어떻게 찾아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차 이사 거야?”
- 정황상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