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번호 II
프로팀 리더 권도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국내 팀 사이에서는 소문을 못 들었는데, 혹시 외국에서 프로게이머를 준비하시는지….”
나강인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평범한 일반인입니다.”
“저희가 3차전에서 진 건 에잇님 때문이었습니다. 팀 조직력의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도 그걸 뒤집는 개인 화력이 존재할 줄은 몰랐거든요. 진짜 아니십니까?”
톱스타 김유찬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에이. 아니라니까요. 우리 쪽 분입니다.”
권도운은 깜짝 놀랐다.
“예? 연예계요? 혹시 배우세요?”
나강인이 김유찬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김유찬이 말을 살짝 바꾸었다.
“그게 아니라 우리 쪽 업계 분이라는 거죠. 하하하.”
“아! 업계! 영화사나 방송국에 계시는 분이군요!”
“그…렇죠?”
권도운은 게이머 사이에서는 유명인이다. 그 인기 덕분에 가끔 예능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가 물었다.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방송국에서 뵌 적이 있나 싶어서요.”
나강인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바하테크 17층에는 기자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바하테크는 차 이사와 거래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얼굴을 공개해서 좋을 건 없다.
“일반인이라서 그건 곤란합니다. 얼굴이 알려지면 본업에 지장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곳에 침투해야 할 수도 있다. 얼굴을 공개하면 그때 정체가 드러날 위험만 커진다.
옆에서 알레이나가 말했다.
“나도 얼굴은 안돼요.”
그녀는 눈 주변만 변장했다. 마스크를 벗으면 코와 입이 드러나는데 그러면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다.
권도운이 알레이나를 돌아보았다.
“예? 숙녀분께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알레이나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내,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야 당연히 모르죠.”
“계속 모르세요. 그러면 돼요.”
프로팀 리더 권도운이 나강인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프로게이머가 되실 생각은….”
나강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뒤쪽에 있던 프로게이머들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그중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휴우.”
나머지 세 사람이 한마디씩 했다.
“프로를 안 하신다는 말을 듣고 안심을 하는 저 자신에게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국제대회에서 에잇 님을 만났으면 진짜 곤란했을 겁니다.”
“상대편 팀이 나올 때 프로게이머 네 명과 함께 에잇 님이 등장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무섭네요. 하, 하하.”
프로팀 리더 권도운이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경기였습니다.”
나강인이 그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프로게이머들도 다가와 나강인과 악수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막내는 두 손으로 잡았다.
최종 보스전은 휴식시간까지 포함해서 네 시간이 걸렸다.
바하테크 사장 방태석은 경기 시작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4차전까지 치러지는 경기를 다 보지는 않았다.
그는 1차전만 구경한 후에 외부 일정을 처리하러 나갔다.
이제 대회는 완전히 끝났다.
그들을 안내한 여자 직원이 제안했다.
“기념사진 어떠세요? 저희 홈페이지에 올리게요.”
안성환이 물었다.
“대회 홈페이지에요?”
이 경기 최종 보스전은 그동안은 대회 홈페이지에만 사진이 올라갔다.
“아뇨. 괜찮으시면 회사 홈페이지에….”
그런데 이번에는 톱스타 김유찬이 있다. 바하테크 홍보팀에서는 어떻게든 김유찬의 사진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혹시 초상권 문제가 있으시면 저희가 협의를….”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아. 괜찮아요. 그냥 참석 사진만 올리는 건 평소에도 많이 하니까요. 회사랑 연락해서 사진 사용처만 정확히 하면 돼요.”
“역시 듣던 대로 쿨하세요! 회사 홈페이지의 이번 대회 소식에만 쓸게요!”
그녀가 팀원들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도 같이 찍으실 거죠?”
나강인은 거절했다.
“일반인이라서 사진은 곤란합니다.”
알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사진은 안 찍어요.”
“네? 톱스타도 되는데 일반인 분들이 왜….”
김유찬이 얼른 말했다.
“자자. 사진 찍으러 가죠. 어떻게, 저기 저 장비들을 배경으로 하면 됩니까?”
“아. 저쪽은 사진으로 나가면 안 돼서…. 이쪽 PC 앞에서 좀….”
“그러시죠.”
그 모습을 보며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지인아. 저 여자도 뭔가 아는 거 같지?”
- 아까부터 좀 수상했습니다. 방태석의 최측근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쁜 얼굴로 살살 웃는데, 속에는 날카로운 게 들어 있나 봐.”
- 김유찬의 팬인 건 사실일 겁니다. 그것 외에는 다 의심하십시오.
안성환과 탱커 팀원은 신이 나서 김유찬의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여자 직원은 김유찬과 따로 셀카를 찍었다.
프로게이머들도 다가와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에는 김유찬과 도전팀 팀원 둘에 프로게이머 다섯 명까지 여덟 명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직원이 말했다.
“회사 홈페이지에는 지금 찍는 사진을 올릴게요.”
나강인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와. 저렇게 서니까 유찬 씨 혼자 빛이 나네.”
- 요원님은 같이 안 찍길 잘하셨습니다.
상품 인도식도 간단하게 치러졌다. 김유찬이 컴퓨터 세트 사진을 붙인 얇은 판을 상품 대신 들고 사진을 찍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상금 천만 원이 날아갔습니다.
“졌으니까 어쩔 수 없지.”
- 요원님이 전술 지휘를 맡았으면 혹시 몰랐습니다.
“다들 신나서 즐기고 있는데 상금에 눈이 멀어서 유찬 씨 지휘권을 빼앗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상금은 없지만 상품이 생겼으니까 괜찮아. 저거 팔면 돼.”
- 팔다니요. 제작 거점의 보조 장비로 사용해야 합니다. 더 많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좋고.”
상품은 컴퓨터 판매 업체에서 직접 배송해준다. 나강인의 상품은 김유찬이 대신 받아주기로 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 회의실에는 윤아름과 민영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성환이 윤아름에게 사과했다.
“아름아. 미안. 졌다.”
윤아름도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보았다.
“왜 이래? 프로 상대로 한 번 이겼잖아. 잘했어.”
“그치? 잘했지?”
윤아름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상품은 언제 보내준대? 아예 지금 팔아버릴까? 판매 업체에서 구매자한테 바로 보내라고 하게.”
“어? 차라리 그럴까?”
“그러자!”
톱스타 김유찬은 나강인의 옆에서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오늘 프로팀이 처음에는 나만 만나려고 하더니.”
프로게이머들은 17층에 들어오자마자 김유찬에게 다가가 그에게만 말을 걸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까 강인 씨부터 찾더라고요. 같이 게임을 해보니까 장난이 아닌 걸 알았나 봐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졌잖아요.”
“아까는 흥분해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강인 씨가 지휘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그러면 한 판도 못 이겼을 수도 있죠. 결과는 모르는 겁니다.”
“그런가요? 아! 다음 대회 때도 같이 플레이하죠. 이번에는 나랑 듀오로.”
“나야 뭐….”
알레이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나랑 듀오 할 건데요?”
김유찬은 깜짝 놀랐다.
“어? 두 분이 아는 사이세요?”
“좀 알아요.”
한국 톱스타 김유찬과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가 서로를 째려보았다.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김유찬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기며 말했다.
“김유찬입니다. 듀오는 저랑 하는 게 맞죠.”
한국에서는 김유찬이 더 인기가 많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팝스타 알레이나가 더 유명하다.
알레이나가 피식 웃으며 반대쪽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알….”
“알?”
“알아요. 안다고요. 영화 잘 봤어요.”
김유찬이 알레이나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이거…. 반응이 시큰둥한 게 우리 업계 분이신데? 그것도 탑클래스 유명인.”
“네?”
“그러면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누군지 짐작이 가야 하는데, 모르겠단 말이죠.”
당황한 알레이나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경호원 민영희가 얼른 그녀를 잡아주었다.
김유찬이 민영희도 힐끗 보았다.
“저분이 누군지 알아요. 저분이 경호를 맡았으니까 우리 업계 분이 더 확실한데, 누구실까? 가만히 보니까 화장이 묘하게 짙은 느낌인데….”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거든요?”
김유찬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요.”
그는 나강인의 변장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안다. 나강인이 특수분장을 직접 해서 복경산 장군과 부장으로 바뀌는 걸 봤기 때문이다.
김유찬이 눈을 번쩍 떴다.
“어? 혹시 변장?”
알레이나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얼굴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게 다가 아녔어? 왜 이렇게 날카로워!”
“흐흐. 맞군요. 내가 강인 씨하고 좀 놀았더니 이쪽으로 눈이 뜨이더라고요. 그래서 누구신지?”
“흥. 알려줄 거면 변장을 했겠어요?”
“좋아요. 그럼 모르는 척해주는 조건으로, 다음에 강인 씨와 듀오를 하는 건 나입니다?”
“이거 왜 이러셔?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나강인이 두 사람을 보며 한마디 했다.
“떡 줄 사람은 놔두고 둘이서 김칫국을 드링킹 하네?”
- 그러게 말입니다.
***
김유찬은 매니저와 함께 기자들을 만나러 갔다. 어차피 기자들이 원하는 건 김유찬이다. 그는 일부러 기자들을 모아서 다른 회의실로 데려갔다.
나강인과 알레이나는 그 틈에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밖에는 김유찬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김유찬 외에는 누가 나오든 관심도 없었다.
건물 외부 주차장까지 온 후에 알레이나가 물었다.
“이 변장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침에 거기로 다시 갈까?”
그녀의 변장은 아까 나강인의 제작 거점에서 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니까 그냥 호텔로 돌아가라. 손으로 만졌는데 쉽게 떨어진다 싶으면 그때 떼면 돼. 빨리 떼고 싶으면 따뜻한 물로 샤워라도 하든가.”
“샤워를 꼭 해야 해? 그냥 떼면 문제 생겨?”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눈썹이라도 뽑히면 좀 그렇잖아?”
알레이나가 얼른 손은 들어 눈썹을 가렸다.
“무서운 말을 하고 그래. 알았어.”
***
나강인은 알레이나와 헤어진 후에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안성환은 윤아름과 놀러 가기로 해서 데려다줄 필요가 없었다.
나강인은 차를 다른 위치로 옮긴 후에 합수부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 설마 또 사건이 터진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 휴우. 전화를 먼저 거실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오늘 바하테크 본사에서 게임 대회가 있었습니다.”
- 아. 그거요? 저도 인터넷 방송으로 잠깐씩 봤습니다. 바하테크는 제가 신경 써서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합수부 형사가 아쉬워했다.
- 우리 쪽 사람을 토너먼트 우승팀에 심을 수 있었으면, 17층 내부 정찰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제가 들어갔습니다.”
- 네? 거기를요? 아. 혹시 대회에 시선이 집중된 틈에 침투를….
“거기 들어가려고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습니다.”
- 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 다섯 명 중에 누구셨는데요?
“전투지원가에잇.”
- 헐…. 에잇이 선생님이었습니까? 프로게이머보다 잘하던데요?
“거기 침투하려고 게임을 열심히 했습니다.”
- 참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성과는 있습니까?
AI 전지인이 그곳에서 눈으로 확인한 정보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제작 장비 이미지가 많았다.
“그곳에는 다양한 제작 장비가 있더군요. 바하테크에서 그 장비로 미술관의 위조 액자를 만들었습니다.”
- 그 위조 액자를 만들 수 있는 장비를 거기서 찾으셨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장비로 만들었습니다.”
합수부 형사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 어…. 아무리 선생님이라 해도, 장비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 장비가 바하테크에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17층 서버에서 위조 액자 제작에 사용한 데이터 파일을 찾아냈습니다.”
- 예? 거기서요? 어떻게요?
“17층의 내부 네트워크에 게임용 PC가 연결되어 있더군요.”
- 아. 그러니까 게임을 하러 가신 김에 내부에서 해킹을…. 하긴, 대단한 실력의 화이트 해커시니까 가능할 수는 있겠군요. 하지만 현장에는 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요?
“사람들이 잠깐 안 보는 사이에 조사했습니다.”
- 잠깐 안 보는 사이에…. 대단하십니다. 그럼 증거 파일은 확보하셨습니까?
“파일을 빼낼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흔적이 남을 거라서요. 눈으로만 확인했습니다.”
합수부 형사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 그래도 괜찮습니다. 목격자가 있으니 조사를 본격적으로 하자고 제가 윗분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아직은 합수부가 바하테크를 대놓고 건드리면 안 됩니다.”
- 예?
“차 이사의 대포폰 번호를 하나 찾았습니다.”
합수부 형사는 깜짝 놀랐다.
- 헉! 그걸 어떻게!
“차 이사는 그 번호가 유출된 걸 아직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