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추적자
합수부 형사가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 아. 혹시 지금 계신 곳이….
“제가 장비 만드는 곳에 와보셨지요? 거기입니다.”
- 아! 거기! 대포폰이 탐지된 위치와 가까운 곳에 계시다니까 뭔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대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합수부 형사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 아시다시피 이 대포폰이 놈을 잡을 유일한 단서인데, 차 이사는 어설프게 건드리면 더 깊게 숨을 놈입니다.
“워낙 예민하고 꼼꼼한 놈이니까요.”
- 정보 유출도 걱정됩니다. 관계 기관 전체에 상황을 전파했다가 차 이사에게 그 소식이 들어가면 겨우 잡은 기회를 날리니까요.
“신중하게 접근하실 계획이시군요.”
- 예. 그 대포폰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요. 설사 오늘 못 잡는다 해도 또 켜지겠지요. 이번에는 그 위치 주변 CCTV 정보를 원격으로 수집하면서, 현장에는 믿을만한 팀을 조용히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팀은 지금 현장 근처에 있고요?”
- 그건 아닙니다. 가는데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제가 더 빨리 갈 수 있을 겁니다. 먼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나강인의 현장 작전 수행 능력은 합수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이 가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그런데 현장에 가셨다가 싸우게 되면…. 파생되는 문제는 저희가 해결해야죠.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현지 정보 부족과 합수부와의 공조 상황 등을 고려하면, 지원팀이 필요합니다.
“박순기 씨가 여기 있습니다.
- 아! 순기가 같이 있습니까? 경찰이 같이 가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차 이사를 만나도 죽이진 마십시오. 그건 저희가 덮을 수 없습니다.
“다들 왜 오해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사람을 막 죽이진 않습니다. 총도 없습니다.”
- 총이야 원래 빼앗아 쓰시…. 아니, 이번엔 굳이 그러진 않으시겠죠.
나강인은 통화를 끝내고 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배우 다섯 명은 고기를 실컷 먹었다. 그중 네 명은 술도 꽤 마셨다. 맨정신인 이연지는 미성년자다.
“쟤들은 당연히 여기 있어야겠지.”
- 저 병아리들은 데려가 봤자 방해만 됩니다.
나강인이 총권도 수련생들을 보았다. 그동안 지구연합군 교본을 이용해 훈련한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 어차피 박순기를 데려가야 한다면, 차라리 저 신병들을 데려가십시오.
그런데 그들 중 셋은 술을 꽤 마셨다. 운전해야 하는 두 명만 멀쩡했다.
“순기 씨는 차 이사를 잡고 싶어 하고, 술도 안 마셨고, 신분도 경찰이고. 당연히 같이 가야지.”
- 이제 겨우 신병 수준이 됐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나강인이 그들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수련생들이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군 요원인 이호석은 휴대폰에 비상연락이 왔는지부터 확인했다.
“나 사범님이 지원을 요청할 정도면, 무장공비 부대라도 침투한 겁니까? 여기까지 오려면 땅굴을 얼마나 길게 판 거야? 그럴 노력으로 광산이나 개발하지 말이야.”
“그런 건 아니고요.”
정보기관 요원 김경식도 휴대폰으로 비상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했다.
“그럼 중무장한 외국 테러리스트 부대겠군요.”
나강인이 말했다.
“아니라니까요.”
다섯 사람이 나강인을 보았다.
박순기가 물었다.
“그런 규모의 일도 아닌데 왜 지원팀이 필요하신데요?”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차 이사를 잡으러 갈 겁니다.”
그 말에는 네 사람이 즉시 반응했다.
경찰인 박순기는 원래부터 차 이사를 잡고 싶어 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단서를 찾은 겁니까?”
군 요원 이호석은 팔성테크에서 신형 국산 대전차미사일 기술이 유출될 뻔했을 때 차 이사에 대해 들었다.
“그놈은 꼭 때려잡아야지요.”
정보기관 요원 김경식도 산업스파이 사건에서 그 이름을 들었다.
“드디어 차 이사를…. 잡으면 설렁탕 맛 좀 보여줘야겠군요.”
경호관 최남수도 요인 경호 도중에 소문 정도는 들어보았다.
네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나강인의 말을 기다렸다.
합수부 형사는 믿을만한 팀을 움직이겠다고 했다. 총권도 수련생을 못 믿을 정도면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나강인이 설명했다.
“최근에 차 이사의 대포폰 번호를 하나 알아냈습니다. 차 이사는 그 번호가 유출된 걸 모릅니다. 그 대포폰이 방금 켜졌습니다. 위치도 확인했습니다.”
박순기가 물었다.
“체포팀이 출동했습니까?”
“합수부에서는 은밀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간다면 우리가 더 빠릅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럼 당장 가시죠. 차 이사 그 새끼는 꼭 잡아야 합니다.”
차 이사가 누군지 모르는 건 민영희뿐이다.
“잠깐. 차 이사가 누군데? 어느 회사 이사야?”
나강인이 말했다.
“가면서 들어요.”
“네? 저도 가요?”
“술을 마신 세 사람은.”
나강인이 배우 다섯 명을 슬쩍 보았다.
“저 사람들을 좀 챙기면서.”
그가 제작 거점을 가리켰다.
“저기서 연락과 지원을 맡아주시죠. 상황에 따라서는 각자 소속된 기관의 자원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나강인이 민영희를 보며 말했다.
“물론 이번 일에서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됩니다.”
박순기가 맞장구쳤다.
“맞아. 이건 원래 우리 일이야. 넌 지금은 민간인이니까 빠져.”
민영희가 와이번 플레이트 팔뚝 보호대를 쓱 들어 보였다.
“선물 받은 값은 해야지. 그리고 재미는 순기 너 혼자 보려고?”
“역시 싸울 자리는 안 빠지는 민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가서 말했다.
“일이 생겨서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먹고 있어라.”
“응? 어딜?”
“그런 게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신은하가 총권도 수련생들을 슬쩍 보았다. 박순기와 민영희가 서둘러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세 명도 이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신은하는 나강인을 만난 후로 많은 일을 겪었다. 이제 저런 모습만 봐도 느낌이 왔다.
그녀가 나강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건이야?”
나강인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차 이사의 현재 위치를 알아냈다. 여기서 가까워.”
“아. 그 새끼…. 내가 따라갈 자리가 아니구나. 이번엔 꼭 잡아.”
이보라가 옆에서 물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신은하가 배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면 다쳐. 여기 치우고 후식이나 먹자.”
***
박순기와 민영희는 나강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나강인이 운전하면서 대포폰이 켜진 곳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박순기가 스마트폰 지도로 그 위치를 확인했다.
“의정부와 고양시 사이군요. 그런데 여기는… CCTV가 없을 수도 있겠는데요?”
“차 이사가 일부러 그런 장소에 가서 대포폰을 켰을 겁니다.”
그들은 대포폰이 켜진 장소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차를 몰고 가다가 목적지 근처에서는 속도를 늦추었다.
박순기가 도로 옆쪽을 가리켰다.
“저 근처입니다.”
뒷좌석에서 민영희가 말했다.
“저기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러게. 이미 튀었나 보다.”
나강인이 도로에서 벗어나 목적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비포장도로를 조금 들어가서 공터에 차를 세웠다.
박순기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야아. 여긴 뭐, CCTV는커녕 차량 블랙박스도 없겠는데요? 주차된 차가 한 대도 없으니까요.”
민영희도 말했다.
“차 이사라는 놈은 놓쳤겠다.”
“아주 그냥 추적이 불가능한 위치를 딱 찍어서 대포폰을 켰어. 역시 차 이사는 철저한 놈이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하지? 나 사범님?”
두 사람이 나강인을 보았다.
나강인은 땅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비포장도로에는 차가 지나가면서 남긴 바퀴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지인아. 분석 가능한 차바퀴 자국은?”
- 두 개를 찾았습니다.
“종류는?”
- 흔적이 옅어 정확한 분석은 어렵습니다. 소형 트럭 한 대, 승합차 또는 광폭 타이어 승용차 한 대입니다. 승합차일 확률이 높습니다.
“최근에 지나갔으니까 그나마 분석할 수 있는 거겠지. 저쪽 도로에서 여기로 들어왔다가 차를 돌려서 다시 나간 차가 있냐?”
- 있습니다. 승합차입니다.
“그럼 소형 트럭은 일단 제외하자.”
AI 전지인이 타이어 자국 위에 붉은색 선을 그어 표시했다. 그 선은 도로에서 현재 위치로 들어왔다가 다시 도로로 나가는 형태였다.
나강인이 그 선을 따라 걸으면서 바닥을 살폈다. 박순기가 따라오면서 물었다.
“뭔가 찾으셨습니까?”
나강인이 바퀴 자국을 가리켰다.
“이건 최근에 이 공터로 들어왔다가 저기서 정차하고, 다시 이쪽으로 나간 차의 흔적입니다.”
“예? 그게 보면 보이십니까?”
“잘 보면 보입니다. 차량 종류는 승합차로 보이는데, 개조한 승용차일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차의 방향을 돌린 지점을 가리켰다. AI 전지인이 그 근처에 있는 발자국을 따로 표시했다.
“여기 발자국을 보세요.”
“예? 어디…. 아. 자세히 보니까 발자국 같기도 합니다.”
“그놈은 저기에 차를 세워두고. 저기로 걸어간 후에, 아마 대포폰을 켰을 겁니다. 그런 후에 돌아와서 다시 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왜 굳이 저기까지 걸어가서 휴대폰을 켠 걸까요?”
“혼자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통화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못 듣게 하려던 거겠죠.”
박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철저한 놈이라니까요.”
나강인은 차가 정차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놈이 대포폰을 켜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뭔가 했습니다. 발자국이 많아요.”
민영희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나강인이 도로를 가리켰다.
“놈들은 차를 몰고 저쪽으로 갔습니다. 의정부 쪽에서 와서 고양시 쪽으로 갔으니까, 우리도 저쪽으로 가봐야죠.”
“하지만 저 도로는 포장도로잖아요. 바퀴 자국이 하나도 안 보일 텐데요?”
“그게 문제인데….”
이곳에는 다른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일단 이 장소는 합수부에서 보낸 팀에게 맡기고 우리는 놈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 봅시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출발했다. 이번에는 박순기가 운전했다.
나강인은 가는 길에 합수부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현장에서 찾아낸 단서를 전달했다.
합수부 형사가 말했다.
- 그 현장으로 가는 팀에게 상황을 전달하겠습니다. 그 도로 CCTV도 확인해서 지나간 차량 정보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승용차나 승합차를 잘 보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후에 나강인은 앞쪽을 보면서 특이한 것은 없는지 보았다.
박순기가 운전하면서 물었다.
“합수부에서 그 현장을 조사해서 뭔가 더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회가 또 오긴 쉽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입니…. 음?”
나강인이 지금 달리는 차의 조수석에서 도로변을 보는 중이다.
도로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꽤 들어간 곳에 유원지가 있었다.
나강인이 오른쪽 앞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시죠.”
박순기가 차의 방향을 틀어 도로에서 벗어났다. 유원지까지는 1km쯤 더 들어가야 한다.
박순기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유원지가 있네요?”
박순기가 차를 길가에 세우고 얼른 스마트폰으로 그곳이 어딘지 검색했다.
“저기는 이 지역에 있는 유원지인데, 놀이기구도 좀 있습니다.”
“사람이 많군요.”
“원래는 붐비는 곳이 아닌데, 오늘은 지역 축제가 있어서 손님이 많나 봅니다.”
“추적을 피해서 뭔가 하려 할 때는, 사람들 속에 숨어서 처리하는 방법도 있죠.”
“어?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오늘처럼 축제가 있는 날은 외지인이 와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차 이사가 오늘 왜 굳이 이 도로를 탔을까요? 목적지가 저곳이어서?”
“그럴듯한데요?”
“일단 가보죠.”
박순기가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유원지 근처에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 진입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잠깐 세워봐요.”
그는 차에서 내려 도로를 확인했다.
“지인아. 좀 전에 본 그 차바퀴 자국을 구분할 수 있겠냐?”
- 최근 주행 차량이 많고 그곳과 이곳 모두 흔적이 옅어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타이어 패턴으로는 찾을 수 없겠구나.”
그는 다시 차에 탔다. 박순기는 주차장 안에 들어가 차를 세웠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문제가 있었다.
“음….”
넓은 주차장에는 지역 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의 차가 100대 이상 주차되어 있었다.
박순기가 옆에서 말했다.
“나 사범님. 여긴 CCTV는커녕 출입차량 차단기조차 없는데요? 주차비도 무료고요. 게다가 차는 또 너무 많습니다.”
“그러네요.”
“이제 어떻게 하지요?”
나강인이 주차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흩어져 있는 단서를 분석해서 그 차를 찾아야지요.”
“네? 무슨 단서요? 여긴 맨땅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