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15화 (315/411)

315. 캐스팅

나강인이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집 바로 옆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기 불이 켜지면 안 되잖아. 저기는 빈집이어야 한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나강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말했다.

"아닐 거야. 광년이가 이사 갔으니까 다른 사람이 이사 왔을 수 있잖아."

나강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 아파트는 계단식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현관이 딱 두 개만 보인다.

그가 새로운 이웃을 기대하며 옆집 현관의 벨을 눌렀다.

곧바로 문이 활짝 열렸다.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광돌이 왔어?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넉넉히 해서 나도 좀 나눠주나?"

"광년이?"

"응. 나야.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썩었어?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너 지금 호텔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흐흐."

"웃지 마라. 정 들라."

그녀는 비밀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공식 활동을 할 수도 없고 기삿거리가 될 만한 일도 하면 안 된다.

이것저것 다 빼고 나니까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호텔에서 게임만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최근에 외부 활동을 남에게 들키지 않고 한 적이 있다.

바하테크가 주최한 게임대회 때는 나강인이 변장술로 그녀의 정체를 숨겨주었다. 눈 주변만 조금 변장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꾼 후에 마스크를 썼더니, 대회 참가자는 물론이고 그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앉아서 게임 팀을 지휘한 김유찬도 팀원인 그녀가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이라는 걸 몰랐다.

그녀는 거기서 해답을 찾았다.

‘광돌이가 내 얼굴을 조금만 만져주면 마음껏 놀러다닐 수 있어.’

그녀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물었다.

"나 말이야. 내일 아침에 변장 좀 해주면 안 될까?"

"응. 안돼. 꺼져."

알레이나는 멈칫했다. 그녀의 눈웃음이 젊은 남자에게 통하지 않은 건 무척 오랜만이다.

그녀가 투덜댔다.

"미인계가 안 통한단 말이지? 왜지? 시력에 문제가 있나?"

"미인이 아니라서 안 통한다는 생각은 안 드냐?"

"메이야? 나 알레이나 민이야!"

"그래. 광년아."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째려보다가 손가락으로 눈가의 힘을 풀었다. 그녀가 설득 방법을 바꾸었다.

"공짜로는 안 된다 그거지? 알았어. 나를 도와주면 내가 나중에 신세 팍팍 갚을게."

"나중에? 그런 말을 전문 용어로 공수표라고 한다."

"진짜야! 내가 소개해주면 특수효과 전문가로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다고! 나 거기에 아는 사람 많아!"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 먼 곳을 왜 가냐?"

"으응?"

"해외취업 안 한다고."

"아니, 이건 그냥 해외취업이 아니라…. 아, 왜 안 하는데!"

"바빠."

그는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가 왜 2082년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지 조사하는 것도 한국에서 해야 한다.

게다가 군용 신체 강화 시술을 받은 그의 몸이나, 신체삽입형 전투지원 AI 전지인이 공항 검색 시스템을 통과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인천공항에서 걸려도 문제지만 LA 국제공항에서 걸리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나강인이 말했다.

"난 관심도 없는 일을 하라고 하면 거래가 되겠냐?"

알레이나는 할리우드 떡밥 정도로는 씨도 안 먹힌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그녀가 방법을 또 바꾸었다.

"나 진짜 그동안 호텔에서만 지내니까 너무 답답해서 그래. 눈 주변만 변장해주면 나도 남들처럼 돌아다닐 수 있잖아. 나 숨 좀 쉬자. 좀 도와줘. 응?"

그녀가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나강인이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레이나가 대놓고 표정 연기를 한다는 건 알지만, 불쌍해 보이긴 했다.

‘비밀수술 날짜가 자꾸 미뤄지니까 답답하긴 하겠지.’

어차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알았으니까 내일 아침에 보자."

"아싸아!"

"내일 하루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놀고 호텔로 돌아가라."

"아참! 저녁밥은 언제 할 거야?"

"시켜먹을 거다."

"전처럼 2인분 시켜서 하나씩 나눌까?"

"돈은 네가 내라."

"당연하지! 내가 막 공짜로 변장 받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광돌이 건 곱빼기 시켜줄게!"

"응? 곱빼기?"

"짜장면. 이사 오는 날은 짜장면 먹는 거 아니야?"

나강인의 눈에 현관 안쪽 거실이 보았다. 거실에는 여행용 트렁크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그게 네 이야기였냐?"

***

이튿날 나강인은 KMTV 방송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가 방송국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알레이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왜?"

-광돌아! 이거 진짜 중요한 문제인데….

"뭐냐?"

-오늘 저녁에는 밥 해주나? 난 불잡탕조림이 땡기….

"꺼져."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KMTV의 최진욱 피디가 옆에서 물었다.

"누군데 그러십니까? 여자 목소리던데…."

나강인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빙빙 돌렸다.

"불쌍한 애입니다. 머리에 꽂을 꼽고 다니거든요."

"아아…. 저런. 쯧쯧."

그들은 방송국 회의실로 들어갔다. 드라마 작가인 도주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도주희 외에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신은하, 오세나, 남현주는 그 드라마의 여자 주연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다.

오세나가 나강인을 보며 방긋 웃었다.

"어머. 강인 씨. 어서 와요. 우리 이번에도 ‘햇살 좋은 날’ 찍을 때처럼 같이 작품 해야죠?"

오세나가 먼저 대놓고 친한 척하는 걸 본 신은하가 얼른 견제했다.

"어머어. 언니는 그 영화 재촬영에는 참여 안 했잖아요. 그래서 강인 오빠하고 촬영 현장에서 만날 일도 없었고요."

"마음만은 언제나 촬영장에서 함께 했거든?"

신은하가 피식 웃어준 후에 나강인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강인 오빠. 피디님하고 작가님한테 잘 보이려고 내가 먼저 왔어. 우리 둘이 같은 차로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호호호."

이번에는 오세나가 견제를 들어왔다.

"어머어. 은하야. 여기서 그렇게 말하면 강인 씨가 부담 가지시겠다. 남들이 보면 친한 줄 알잖아."

"우리 되게 친한데요?"

오세나는 나강인과 접점이 좀 있다. 파파라치 드론 폭발 사고로 크게 다칠 뻔했을 때는 나강인이 그녀를 구해주었다.

신은하는 나강인과 훨씬 더 많은 일을 겪었다. 총격전이나 독가스 공격 등도 경험했고 납치범을 찾으려고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연히 개인적으로도 친했다.

남현주만 나강인과 아무 접점이 없었다.

오세나와 신은하가 남현주를 슬쩍 보여 생각했다.

‘너는 오늘 강인 씨를 처음 보니까 이런 이야기 못 하지? 부럽지?’

‘혼자 저 뒤에서 시작하는 걸 이제라도 알았으면 이쯤에서 포기해도 되잖….’

남현주가 갑자기 나강인에게 들이댔다.

"나 감독님이 제 스타일인 거 아세요?"

신은하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야! 왜 급발진하는데요!"

오세나도 화들짝 놀랐다.

"뭐야! 오늘 처음 보는 사이 아니었어?"

남현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견제하는 게 보기 싫어서 질러본 건데? 난 아주 안중에도 없더라? 그리고 뭐, 나 감독님이 내 스타일이기도 하고. 난 진짜 싫지 않거든?"

나강인이 말했다.

"남현주 씨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

남현주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나 남현주예요! 국민 첫사랑 남현주!"

"예. 압니다. 제 첫사랑은 아니지만요."

"아니 뭐 이런 남자가 다…."

신은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 어디 우리 고릴라한테 함부로 들이대시나! 저 인간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한다고요!"

오세나도 대놓고 비웃었다.

"지금 여기에 국민 첫사랑 소리 한 번쯤 안 들어본 여자가 누가 있어? 어디서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려?"

도주희는 여자 작가다.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케엠. 케에엠!"

오세나는 당황했다.

"아니, 도 작가님 말고, 배우 중에서 말이에요."

"괜찮아요. 이미 상처받았으니까요."

최진욱과 나강인이 자리에 앉았다.

최진욱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최선희 씨와 김성현 씨는 사정이 생겨서 우리 드라마 출연을 고사했습니다."

그 두 배우도 얼마 전까지는 주연 경쟁에 참전했었다.

오세나가 말했다.

"선희는 몸을 급하게 만들다가 손을 삐었고, 성현이는 하기로 했다가 깠던 방송에서 항의가 강하게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자존심이라도 챙기려고 먼저 손 턴 거예요. 이미 소문 다 났던데."

"하, 하하. 그게 아니라…."

최진욱은 떨어져 나간 배우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일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 계신 세 분 모두 여자 주인공 배역을 원하시는데, 아시다시피 그 자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 분 다 워낙 훌륭한 배우라서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최근에 상황에 변화가 좀 생겼다.

"다행히 세 분 다 출연료를 조정해주겠다고 말씀하셔서…."

세 사람은 주연 경쟁을 치열하게 하다가 출연료에 손대는 강수까지 두었다.

그런데 세 명 다 출연료를 조정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에 그건 주연 경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결국 과도한 경쟁으로 출연료만 깎아 먹었다.

신은하가 오세나에게 물었다.

"어머. 세나 언니가 출연료를 왜 깎아요? 자존심이 있지. 그냥 평소처럼 받아요."

"나만 깎았니? 그러는 넌?"

"저는 지난번에 받은 거 그대로 가는 건데요?"

오세나가 피식 웃었다.

"운명의 창이 이만큼 대박이 났으면 네 출연료가 엄청 올라야 정상이잖아. 그런데도 안 올렸으면 그게 깎은 거지 뭐니?"

남현주도 한마디 했다.

"그러게. 둘 다 출연료까지 깎아가면서 그래야겠어? 나야 뭐 조금 조정해드리는 정도니까 다르지만."

"다르긴 뭐가 달라? 제일 먼저 출연료 깎아주겠다고 한 게 너였다더라?"

최진욱은 여배우들의 분위기가 사나워지자 어깨를 움츠리며 얼른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 예산으로 세 분 다 캐스팅이 가능해져서…."

신은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럼 우리 드라마 여주인공이 세 명으로 늘어나나요?"

최진욱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 드라마가 옴니버스도 아닌데 설마요. 그냥 여주인공 한 명에, 주연급 조연 두 명 자리가 비어 있다는 거지요."

오세나가 인상을 살짝 썼다.

"어머. 그러니까 주연에서 탈락하면 조연을 맡아달라? 최 피디님 너무하신다. 나 오세나예요."

최진욱이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원하시면 그런 옵션도 있다는 거죠. 다른 드라마였다면 세 분 다 당연히 주연을 맡으실 거라는 거 잘 압니다."

"우리 드라마 남주는 김유찬이잖아요. 거기다 제가 여주를 맡고 은하랑 현주가 조연이면, 초호화캐스팅이네요? 출연진만 보면 드라마가 아니라 대작 영화인데요."

최진욱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흐흐, 그렇습….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남현주가 옆에서 손을 들었다.

"제가 이 드라마를 하려는 건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어서예요. 물론 제가 주연을 맡아야 마땅하지만, 상황이 안 되면 조연을 할 수는 있어요."

"아! 그러십니까!"

"물론 그 배역이 능력만 되면 주연을 잡아먹을 수 있는 자리여야 하지만요. 그런데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누굴 주연으로 선택할 건데요?"

"어…. 그게 말이죠."

남현주가 나강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나 감독님이 우리 셋 중에 액션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고르시나요? 그런 거면 자신 있는데요. 저 유단자예요."

나강인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뇨. 저는 액션이 안 되는 사람을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누구를 주연으로 뽑을지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최진욱 피디가 말했다.

"여론조사로 정하려고요."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최진욱을 쳐다보았다.

"네?"

"주인공을 여론조사로 뽑아요?"

"우리 지금 드라마가 아니라 선거에 나가는 건가요?"

최진욱이 계획을 설명했다.

"인터넷으로 우리 드라마 여주인공에 누가 어울리는지 시청자 투표를 받아서 공정하게 결론을 내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신개념 캐스팅이죠."

오세나가 따졌다.

"아니, 그런 걸 왜 하죠? 저는 처음 들어보는 방식인데요?"

캐스팅이 더 늦어지면 드라마 촬영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이건 궁지에 몰린 최진욱과 도주희가 고육지책으로 만들어낸 편법이다.

"뭐든 처음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최진욱과 도주희도 이게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고민해도 이것 외에는 경쟁에서 탈락한 두 명의 원성을 피할 방법이 없다.

최진욱이 도주희를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이렇게 하면 누가 떨어지든 우리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투표한 사람들 탓을 하겠지.’

도주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최 피디가 잘해서 저 배우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야.’

그게 이 고민의 원인이었다.

두 사람의 피디와 작가로서의 명성보다 오세나, 신은하, 남현주의 인기가 훨씬 더 높다. 그 배우들이 이 드라마의 주연을 원하는 건 나강인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직접 떨어뜨리면, 자존심이 상한 스타들은 우리 탓을 하겠지. 다시는 우리 작품에 안 나올 수도 있어.’

피디나 작가 세계도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 잘나가는 여자 배우들을 다시는 섭외할 수 없게 되면, 두 사람의 경쟁력은 치명타를 입는다.

‘그러면 나랑 최 피디는 망하는 거야. 이게 최선이야.’

최진욱이 세 사람에게 제안했다.

"오늘 당장 인터넷 투표를 시작하면 내일 자정에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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