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남현주 II
알레이나의 피시방 고정석 주변에는 다른 손님은 없었다. 신은하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알레이나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마스크와 세트로 사용하는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알레이나는 신은하를 보더니 살짝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어머. 누구세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알레이나의 눈은 눈매가 바뀌어 있었다. 눈썹 모양도 평소와 달랐다.
나강인이 대충 해준 변장이라 그 두 가지만 조금 바뀌었다. 그런데도 길거리에서 마주쳤으면 못 알아볼 뻔했다.
그런데 여기는 알레이나의 고정석이다. 다른 손님은 결재 자체가 안 된다. 이용권 결재하지 않으면 PC를 쓸 수 없다.
그러니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다.
신은하가 물었다.
"변장은 왜 했어요?"
알레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표 나요?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광돌이가 변장을 기가 막히게 해줬는데. 우리 엄마가 봐도 모르겠던데."
"강인 오빠가 변장 전문가인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예요. 딱 봐도 강인 오빠 솜씨잖아요."
그녀는 나강인이 영화에서 복경산으로 변장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짧은 스케줄이 있을 때는 나강인에게 부탁해 고속 메이크업을 받기도 한다.
신은하가 물었다.
"근데 변장은 왜 했냐니까요? 무슨 비밀 임무라도 있어요?"
"뜬금없이 무슨 비밀 임무요?"
"그건 아니구나?"
"이렇게 변장하면 마음대로 놀러 다녀도 아무도 못 알아보거든요. 그래서 광돌이한테 부탁했어요."
"아…."
신은하는 탄식했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으면 나도 해달라고 할걸! 흥청망청 놀러 다닐 때 쓰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놀아요? 호텔로 옮겼잖아요. 거기서 놀아야죠."
"호텔은 그냥 잠깐 머무르는 곳이죠. 우리 집은 이 동네에 있어요. 그래서 돌아와 있으려고요."
"분명히 이사 갔잖아요."
"월세 기간 아직 많이 남았어요."
신은하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오늘 알레이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거슬리던 게 바로 이거였다. 알레이나는 나강인의 옆집에 살았다.
"집 안 뺐어요?"
"왜 빼요? 돌아올 곳인데."
신은하가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 집 내가 그냥 확 사버릴까 보다."
그녀는 요즘 영화가 히트하면서 CF를 몇 개 찍어서 은행 계좌에 돈이 제법 쌓였다. 시내에 독립해서 사는 집은 전세다.
매물로 나와 있기만 하면 나강인의 옆집을 오늘 당장에라도 살 수 있다.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어머. 이걸 어쩌나. 그 집은 내가 이미 샀는데."
신은하가 인상을 더 썼다.
"아니, 그 집을 당신이 왜 사…."
갑자기 나강인이 쓱 나타나며 말했다.
"광년이 네가 미쳤구나?"
알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놀라라!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홍씨 집안 길동이야?"
신은하도 놀랐다.
"깜짝이야! 깜빡이 좀 넣고 들어와!"
나강인이 알레이나에게 물었다.
"네 명의로 그 집을 산 건 아니지?"
그녀가 자랑했다.
"누굴 바보로 알아? 내 친구보고 사라고 했어."
"네가 친구가 있어?"
"이거 왜 이래? 미국에 친구 있어."
"바보는 아니구나."
"흥. 나 바보 아니다. 나중에 조용해지면 내가 걔한테서 다시 살 거야."
알레이나가 대답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집을 내 이름으로 사면 안 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했다가 기자들이 알게 되면 비밀수술이 취소될 수도 있다.
"기자들이 너를 찾아오면 옆집에 사는 내가 귀찮아져서 그랬다."
"쳇. 광돌이 매정해."
"닥쳐. 오늘만 놀고 갈 것처럼 말하더니 아예 둥지를 틀어?"
알레이나가 시선을 피했다.
"난 뭐, 가겠다고 대답하진 않았다고."
AI 전지인이 글자로 정리된 문장을 허공에 띄웠다.
-어제 현관 앞에서 나눈 대화의 녹취록입니다.
[내일 하루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놀고 호텔로 돌아가라.]
[아참! 저녁밥은 언제 할 거야?]
-옆집 광년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렸습니다.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미리 말해줘야지."
-광년이는 바보인 줄 알았습니다. 잔머리를 예상보다 잘 굴립니다.
"이걸 어떻게 쫓아 보내지?"
-변장을 해주지 마십시오.
"광년이가 원래 얼굴로 이 동네에서 놀다가 들키면 뒷감당은 가능하고?"
-목숨 걸고 노는 걸 보면 미친 게 맞습니다.
"이정호 과장님한테 이야기해서 빨리 끌고 가라고 해야겠다."
나강인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신은하가 옆자리인 그녀의 고정석에 앉아서 불평했다.
"쟤한테 변장은 왜 해 줬는데?"
"호텔에 갇혀 지내는 게 불쌍해 보여서 하루만 편하게 놀라고 해줬지."
"응? 알레이나는 우리 동네 아파트보다 호텔이 더 편한 거 아녔어?"
"아닌가 보더라."
***
하루가 더 지났다. 인터넷으로 하는 선호도 투표는 이틀째였다. 결과는 자정에 나온다.
남현주는 주연급 배우가 된 후로는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때 오디션을 본 적이 없다.
소속사에는 그녀에게 들어온 대본이 쌓여 있다. 회사에서 그중에서 좋은 것들을 따로 추려내면 그녀가 거기서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면 된다.
그 과정을 건너뛸 때도 있다. 그럴 때도 감독이나 작가와 협의해서 출연 여부를 결정했지 오디션을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오디션조차 아니고 시청자 투표 방식으로 배역을 결정한다. 겉으로는 홍보 이벤트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승자가 주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남현주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짧은 웹드라마에 신인을 쓸 때라면 홍보하려고 그럴 수 있지만, 정규 편성 드라마에서 이럴 줄은 몰랐네."
만약 다른 드라마에서 그런 제안을 했으면 그 자리에서 판을 엎고 나왔겠지만, 그녀는 그 방식에 동의했다.
로드 매니저가 운전하면서 물었다.
"누나. 이 드라마 꼭 해야 해요?"
"왜? 넌 안 하는 게 좋겠어?"
로드 매니저가 콧김을 뿜었다.
"누나가 어떤 분인데 이런 대접을 받아요? 이건 아니죠. 그냥 다 엎어버리고 다른 드라마나 영화 하시면 되잖아요. 누나 앞으로 들어온 대본이 얼마나 많은데요?"
"대본 많지. 그중에 좋은 것도 많아. 그렇지?"
"당연하죠! 더 유명한 피디와 더 좋은 대본을 고르면 이 드라마 따위보다 훨씬 더 대박이 날 거예요!"
남현주가 피식 웃었다.
"너 ‘햇살 좋은 날’ 봤지?"
"당연히 봤죠. 천만 영화인데 저도 이 업계 사람으로서 안 볼 수가 있나요."
"그 영화에서 액션은 어땠어?"
"정말 좋았죠. 실감 나는 액션에 정말 감탄했어요."
남현주가 설명했다.
"‘햇살 좋은 날’은 잘 만든 영화야. 시나리오도 좋고 영상도 좋아. 역시 손태민 감독님이야. 아마 액션이 없었어도 관객 오백만은 넘었을 거야. 어쩌면 팔백만 정도는 찍었을지도 몰라."
"맞아요. 재미있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영화가 천만 돌파에 성공한 건 액션 덕분이라는 거,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은 다 알아."
"그야… 그렇죠."
"그런데 손태민 감독님은 화면을 아름답게 찍는 로맨스의 대가이지 액션 전문이 아니야. 그럼 그 명품 액션은 누구 덕분이겠어?"
로드 매니저도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무술감독이 나강인 감독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영화의 거의 모든 액션은 예행연습이나 분할촬영 없이 한 번에 찍었다는 거 알아?"
"네?"
"그것까지는 몰랐나 보네? 내가 그 이야기 듣고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건 불가능한 일이거든."
"하지만 액션 장면은 시점이 막 바뀌던데요?"
"당연히 카메라 여러 대를 동시에 써서 찍은 후에 편집했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카메라들을 어떻게 배치할지도 나 감독님이 거의 다 정했어."
"네? 무술감독이 그런 것까지 다 정해요?"
"그러니까 나 감독님이 특별하지. 괜히 영화감독을 해도 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야."
"그럼 다른 무술감독은…."
"나강인표 실전 리얼 액션은 유니크한 거야. 다른 사람은 못해. 함부로 따라 했다가는 배우들이 단체로 다쳐서 실려 나갈 테니까."
"운이… 좋아서 아무도 안 다친 건 아니겠죠?"
"‘햇살 좋은 날’이 운이었으면 ‘푸른 하늘’에서 사고가 터졌겠지."
그 드라마는 중반 이후에 액션 청춘 드라마로 변했다.
"‘푸른 하늘’은 중반부터 시청률이 급등했어. 그 시점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하나뿐이야. 명품 액션."
"아…. 그렇죠. 저도 그 드라마는 중반 이후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남현주가 창밖을 보았다. 지나가는 버스 옆면에 영화 ‘운명의 창’ 광고가 붙어 있었다.
"그 드라마 다음에는 ‘운명의 창’이 극장에 걸렸지. 나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앤딩 크래딧이 올라가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잖아."
로드 매니저도 동의했다.
"진짜 최고죠. 그 영화."
"‘운명의 창’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이야기될 명작이야. 난 그렇게 확신해. 그런데 그 영화가 왜 그런 명작이 됐다고 생각해?"
로드 매니저도 분석 기사 정도는 읽어보았다.
"그 영화는 변형찬 감독님이 오래 준비하셨다면서요. 시나리오도 직접 쓰시고요. 영상, 시나리오에 담긴 메시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모두 명품이라던데요."
"맞아. 변형찬 감독님이 손태민 감독님 제자야. 스승의 장점을 잘 배워서 첫 영화에 써먹고 거기다가 자기 장점도 살렸어."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리고 그 영화에 ‘햇살 좋은 날’의 무술감독이 참여했지. 변 감독님이 준비한 이야기, 나 감독님이 없었으면 그렇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어렵…나요?"
"내가 전에 들었는데, 변 감독님은 오랫동안 준비한 시나리오를 나 감독님이 참여하면서 수정했다더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
"원 플러스 원?"
"영화가 마트니? 시너지야. 시너지. 변 감독님과 나 감독님의 시너지. 그 두 분이 다 있었기 때문에 ‘운명의 창’은 우리가 아는 명작이 됐어. 난 그렇게 확신해."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세웠다.
"자. 내가 방금 말한 세 작품의 공통점이 뭐다? 나강인이야. 초단기 재촬영에 참여하면 팔백만이 한계이던 영화가 천만을 돌파하고, 중간에 들어가도 드라마 시청률이 급증하는데, 이번 드라마는 명작영화 ‘운명의 창’ 때처럼 아예 처음부터 나 감독임이 같이 만드네?"
남현주가 이 드라마를 하고 싶은 이유는 두 개다.
그녀는 소속사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든 이유부터 말했다.
"이 드라마는 명품이 될 거야. 설사 명품이 못 되더라도 시청률 하나는 확실히 나오겠지. 나 감독님이 참여한 모든 작품이 그랬으니까. 성공이 보장된 작품인데 당연히 내가 주연을 해야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녀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 드라마의 주연을 맡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난 이제 국민 첫사랑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어. 그동안 그 이미지 덕을 많이 보긴 했는데, 사람들이 언제까지 나한테서 청순한 이미지만 기대할 거 같아?"
경쟁 배우인 오세나도 국민 첫사랑이란 별명 정도는 예전에 들어보았다. 그런 별명을 들어본 여자 배우는 찾아보면 더 있다.
그런데 남현주는 그 첫사랑 이미지가 특히 강하게 남았다. 그 이미지 때문에 다른 성격의 배역을 맡으면 손해를 많이 보았다.
"배우는 말이야. 청순한 이미지 하나만으로는 오래 못 버텨. 그건 나이 먹으면 망하는 거야. 배우 인생을 길게 가려면 더 늦기 전에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해. 난 이미 좀 늦었어."
"아뇨! 누나는 늦지 않았…."
"너한테 누나 소리 듣는데?"
"이제 ‘현주야’라고 부를까요?"
"맞을래?"
"아닙니다! 누님!"
로드 매니저가 물었다.
"그러면 어떤 이미지로 변신하시려고요?"
"청순의 반대가 뭐겠어?"
"퇴폐…."
"죽고 싶니?"
"섹시?"
"그거야 기본 스킬이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
"넌 어떻게 상상력이 외모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청순한 줄 알았던 여자가 알고 보니 싸움꾼인 건 어때?"
"하지만 그건 너무 큰 모험이잖아요. 그렇게 이미지를 왕창 바꿨다가 망한 사람 많대요."
"그래서!"
남현주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 드라마의 주연 배역이 나한테는 간절해.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주연인 내가 청순함을 버리고 싸움꾼 또라이로 나와도 시청자들이 좋게 받아들일 테니까."
"아…."
"국민 첫사랑은 이제 놓아주고 강한 언니 남현주가 되려면, 난 이 드라마의 주연 배역을 반드시 따야 해."
그게 그녀가 이 드라마를 꼭 하고 싶은 이유였다.
"이제 내가 왜 주연을 맡으려고 자존심 내려놓고 선호도 투표까지 하는지 알겠니?"
"넵!"
"알았으면 나 여기서 내려줘."
"어? 아직 더 가야 하는데요?"
그녀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운동화를 신으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 동네잖아. 답답해서 좀 걸어야겠어."
"제가 근처에 차 세워놓고 따라갈까요?"
"됐어. 이러고 다니면 아무도 못 알아봐."
***
KMTV 방송국 회의실에서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가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현재까지의 선호도 투표 집계가 나와 있었다.
이 자료는 방송국에서 그 두 사람만 볼 수 있다. 그들은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으로라도 모니터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회의실에서 투표 상황을 확인했다.
최진욱이 모니터 속 그래프를 보며 말했다.
"역시 오세나. 표를 확실히 많이 받았어."
도주희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신은하가 치고 올라왔지만 역부족이야."
"이러면 주연은 오세나겠는데?"
"그렇겠지? 득표 추세선을 보면 신은하가 자정까지 역전하긴 어려워 보이니까. 그런데 남현주는…."
"나도 놀랐어. 국민 첫사랑 남현주가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