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클라이밍
도주희 작가가 모니터 속 남현주의 이름과 그 옆에 그려진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현주가 받은 표가 오세나는 물론이고 신은하보다도 한참 부족해."
그래프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선 형태였다.
오세나의 득표 그래프가 상승률이 가장 높았다. 남현주의 그래프는 오세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중간에 신은하의 그래프가 있었다.
최진욱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러게. 차이가 너무 커."
"남현주가 어디 가서 다른 배우한테 밀리고 그러는 배우가 아닌데…."
"오세나와 신은하는 올해 개봉한 천만 영화 두 편의 주연을 각각 맡았잖아. 둘 다 영화 버프를 제대로 받았지."
"이유가 그것뿐일까?"
"음…."
최진욱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국민 첫사랑 이미지가 이제 약발이 안 받는다고 봐야지. 남현주도 그때보다는 나이를 먹었잖아."
"하긴. 그건 벌써 8년 전에 딴 타이틀이니까. 지금 남현주는 그때처럼 청순한 첫사랑 느낌은 아니긴 해."
두 사람은 모니터의 그래프를 가만히 보았다.
최진욱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면 남현주는 우리 드라마 안 하겠지?"
"이 추세대로면 오세나가 주연을 가져가고, 주연과 경쟁할 수 있는 조연은 신은하가 가져갈 거야. 남현주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남은 자리엔 안 들어가겠지."
최진욱이 걱정했다.
"우리를 원망하면 어떻게 하지?"
도주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현주가 약빨이 떨어졌으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잖아?"
"아! 그렇지. 그러면 빈자리에 캐스팅할 배우를 빨리 알아봐야겠지?"
"당연하지. 오늘 찾아서 내일 바로 연락하자. 우리 이제 시간이 없어."
***
남현주는 차에서 내려 혼자 길을 걸었다.
그녀는 인터넷 선호도 조사의 현재 스코어는 모른다. 소속사에서 KMTV의 직원 몇 명에게 연락해봤지만, 진행 상황을 아는 사람은 최진욱과 도주희 뿐이라 성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면 그녀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다 꼴등이라도 하면 많이 쪽팔릴 텐데…."
그녀는 마음이 답답해 바람이라도 좀 쐬려고 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골목 구석구석까지 잘 알았다.
"우리 동네도 참 많이 바뀌었다."
그녀는 지금은 독립해서 다른 지역에서 따로 살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직도 이 동네에 산다.
그녀가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집밥을 먹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고등학생 쌍둥이 동생들에게 시달리면서 정신없이 보내고 싶었다.
"결과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그녀는 잠깐 그쪽으로 가던 생각을 그만하려고 일부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사장이 보였다. 아는 곳이었다.
"아! 저기서 어릴 때 놀고 그랬는데, 창고 헐고 새로 뭐 짓나 보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그곳에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터가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그 땅에 조립식 창고가 들어왔다.
지금은 그 창고를 부수고 새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중이다.
공사장의 가림막이 조금 비틀어져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빈틈이 하나 생겨 있었다.
그녀가 공사장으로 다가가 그 빈틈으로 안쪽을 보았다. 공사는 아직 초반이라 땅만 파놓은 상태였다.
"이제 겨우 땅을 팠으면, 건물 다 지으려면 오래 걸리겠…."
그녀의 귀에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방향은 가림막 안쪽이었다.
"응?"
그녀가 가림막 사이로 안쪽을 좀 더 확인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공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고양이가 내는 소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설마…."
그녀가 빈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건설업체는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깊게 파놓았다. 구덩이의 경사는 절벽에 가까웠다.
그녀가 그 경계에 서서 상체를 구덩이 안쪽으로 숙이며 아래를 보았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흙벽 안쪽에 초등학생이 매달려 있었다. 누군지도 알았다. 그녀의 본가 옆집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앗!"
그녀가 119에 신고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아. 차에!"
휴대폰은 로드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에 두고 내렸다.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서 119 신고를 부탁하려고 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아이의 겁먹은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녀가 다시 아래를 보았다.
구덩이의 벽은 절벽에 가깝긴 하지만 완전히 수직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아이는 그 중간 벽에 튀어나온 돌출물을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손을 놓치기 직전처럼 보였다.
아이가 매달린 곳 아래쪽은 진짜 낭떠러지였다. 거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꼭 쥐고 있어! 내가 구해줄게!"
남현주가 먼저 엎드려서 손을 뻗어 보았다.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팔이 닿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있는 건 아니다.
"손으로 위쪽 턱을 잡고 몸을 아래로 내리면 다리가 닿을 거야."
구덩이 아래쪽은 수직으로 파여 있었지만, 위쪽은 그나마 경사가 덜 심해서 몸을 벽에 잘 붙이고 내려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남현주는 일단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 위에 쓰고 마스크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후에 상체는 바닥에 붙이고 하체만 절벽 쪽으로 내렸다. 허리가 경계턱에 걸렸다.
그녀가 발을 움직여보았다. 굴착기로 판 흙벽은 우툴두툴한 곳이 많아 발끝을 디딜 수는 있었다.
"후우. 후우."
그녀가 숨을 몰아쉰 다음 두 손으로 절벽 턱을 잡고 조금씩 내려갔다. 상체는 흙벽에 바짝 붙였다. 발을 디딜 곳이 많아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 내려가자 그녀의 발이 아이의 손 바로 옆까지 갔다. 손은 여전히 절벽 위쪽 경계를 잡고 있었다.
"됐어. 이제 내 다리를…. 못 잡겠구나."
지금 아이는 겨우 매달려 있다. 그녀의 다리를 잡으려고 손을 하나 놓으면 바로 추락한다.
그녀가 숨을 다시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위쪽 경계턱에서 손을 살며시 놓았다. 벽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두 손과 두 발을 다 사용해 벽을 잡고 밟으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제 그녀의 손이 아이에게 닿는 곳까지 왔다. 그녀가 오른팔을 옆으로 뻗어 아이의 옷깃 뒤쪽을 잡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한 손으로 끌어올리는 건 무리다. 하지만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게 붙잡고 있을 수는 있다.
그녀가 아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잡고 있으니까 넌 얼른 내 몸을 잡아! 날 잡고 위로 올라가!"
초등학생 아이는 겁이 났지만, 남현주가 옷을 잡고 위로 당겨준 덕분에 두 손이 편해진 걸 알았다.
게다가 발성 좋은 남현주의 지시가 귀에 꽂혔다. 그녀의 음성은 선생님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힘이 있었다.
아이는 시키는 한 손을 옆으로 뻗어 남현주의 청바지를 잡았다. 그다음에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혁대를 잡았다.
"잡았어요!"
"이제 내가 널 끌어 올려줄 테니까, 너도 내 옷을 잡고 위로 올라가. 다리도 써."
아이가 그녀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꼬맹이 중에는 뭔가 타고 위로 올라가는 걸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도 비슷했다. 매달려 있느라 손에 힘은 좀 빠졌지만, 뒷덜미를 당겨주는 힘이 있어서 올라갈 만했다.
아이가 남현주의 바로 옆까지 올라왔다. 그러다 그녀와 얼굴이 딱 마주쳤다.
"어? 현주 이모!"
"너 내가 위험한 곳에서 놀지 말라고 했지!"
그녀는 옆집에 사는 아는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을 타고 내려왔다.
"자. 이제 더 올라가야지?"
"어떻게요?"
"날 밟고 계속 올라가."
아이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위로 올라갔다.
이제부터는 아이의 옷깃을 잡아서는 힘이 안 받는다. 그녀는 아이의 혁대를 잡고 밀어 올렸다.
아이가 결국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약간 더 올라가야 한다.
아이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해요?"
그녀가 오른손을 위로 들어 아이의 신발에 댔다.
"내 손을 밟고 올라가!"
한쪽만 도와주면 균형을 잡기도 어렵고 힘도 모자랐다. 그녀가 왼손도 위로 번쩍 들어서 손바닥으로 발 받침을 만들어주었다.
구덩이 끝부분은 경사가 그나마 덜 심하다. 거기다 남현주가 밑에서 밀어주는 힘까지 강하게 들어왔다.
마침내 초등학생 아이가 구덩이 위로 상체를 올렸다. 그때부터는 자기 힘으로도 올라갈 수 있었다. 다리를 옆으로 들어서 걸고 절벽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아이는 안전한 곳으로 올라가자마자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손을 내밀었다.
"현주 이모! 올라와요! 제가 올려줄게요!"
"꼬맹이가 어디서 힘자랑이니? 너 믿다가 나까지 떨어져. 비켜. 나 클라이밍 배운 여자야. 내가 올라갈…."
갑자기 그녀가 발을 디딘 흙이 무너졌다. 그녀의 몸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어? 어?"
지금은 경사가 수직은 아니라 몸을 붙일 수 있지만, 더 아래는 벽이 수직으로 깎여 있다. 계속 미끄러지면 바닥까지 바로 떨어진다.
그녀가 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흙벽에는 손으로 잡을 게 부족했다.
그러다 아이가 붙잡고 있던 돌출물이 손에 걸렸다.
그녀가 다급히 그걸 잡았다. 손에서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가 두 손을 다 써서 돌출물을 잡았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아이가 위에서 겁을 먹고 소리를 질렀다.
"이모! 죽으면 안 돼요!"
"안 죽었으니까 가서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해! 119에 신고도 해달라고 해!"
"하지만…."
"빨리!"
아이가 위에서 사라졌다.
남현주가 금속 돌출물을 단단히 잡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그냥 이러고 조금만 더 버티면 119구조대가…. 응?"
이제야 여기 쇠가 박혀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쇠가 왜 땅속에…."
그녀가 붙잡고 있는 쇠가 절벽에서 아주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쇠는 아이가 잡고 있을 때는 그대로 박혀 있었지만 어른인 남현주의 체중을 버티지는 못했다.
그녀는 조금 더 빠져나온 쇠의 형태를 보고 그게 뭔지 깨달았다. 전쟁 영화에서 보던 항공 폭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포, 폭탄? 왜 여기 폭탄이…."
폭탄이 벽에서 다 빠져나오면 남현주는 아래로 떨어진다. 절벽에서 추락하고 같이 떨어진 폭탄까지 터지면 확실히 죽는다.
"그, 그래도 119에서 오면…."
폭탄이 흙벽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이 속도면 119 구조대가 오기 전에 구덩이 아래로 폭탄과 함께 떨어진다.
"사, 살려주세요! 누가 나 좀 살려줘요!"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주연을 따낼 수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그 생각을 잠시라도 잊으려고 차에서 내려 길을 걸었다.
지금은 주연 생각이 날 틈이 없었다.
"살려줘요! 여기 폭탄이…."
그녀는 멈칫했다. 폭탄이 있다고 말하면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겼다.
"나 좀 살려줘야 하는데…."
갑자기 위쪽에서 사람의 얼굴이 쓱 나타났다.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사, 살려주세요! 저 좀 끌어올려 줘요!"
"어? 진짜 폭탄이다."
"괘, 괜찮아요. 이건 손만 놓으면 안 빠질…."
위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나 감독님?"
나강인이 아래를 보았다. 남현주가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서 툭 튀어나온 폭탄에 매달려 있었다.
AI 전지인이 남현주가 폭탄과 함께 추락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했다. 아직 1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서울 시내에 폭탄이 왜 묻혀있어?"
-6.25 전쟁 때 항공기가 투하한 불발탄으로 추정됩니다.
"저 폭탄이 구덩이 아래에서 터져도 피해가 생기겠지?"
-사람들이 대피하기 전에 구덩이 바닥에서 항공 폭탄이 폭발하면 건물이 밀집된 지역 특성상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 사람만 구할 게 아니라 폭탄도 같이 해결해야겠네."
남현주가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나 감독님! 왜 구경만 하는데요! 살려줘요! 이 폭탄 금방 터질 것 같아요! 벽에서 점점 빠져나온다고요!"
"그 폭탄이야 남현주 씨가 매달려 있으니까 당연히 빠져나오죠."
"밧줄! 밧줄이 필요해요! 그러면 안 빠…."
나강인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 사라졌다. 이제는 절벽 위 하늘만 보였다.
남현주가 잠시 멍하니 위를 보았다.
"폭탄이 터질 것 같으니까 도망친 거야?"
그녀가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나강인이 다시 쓱 나타났다.
남현주가 얼른 말투를 바꾸었다.
"나 감독님! 제가 감독님 팬인 거 아시죠? 저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버리고 간 거 아닌데."
"거짓말! 방금 도망쳤으면서!"
"나한테 화내나 보다."
"아, 아니요! 반가워서 그래요! 어머어. 제가 농담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으시구나? 저 원래 말투가 이래요."
나강인이 엄지를 세웠다.
"역시 배우 남현주. 화 안 난 척하는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워요."
"야! 쫌 살려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