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레스큐
배우 남현주가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 매달린 채로 악을 썼다.
"나쁜 새끼야! 나 버리고 가지 말라고!"
나강인이 위에서 말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함부로 하네."
"지금 죽게 생겼는데 오해가 문제냐! 살려주세요!"
나강인이 쇠파이프를 들어 보였다.
"난 공사장 가림막 옆에 이게 떨어져 있길래 도구로 쓰려고 주우러 간 거였는데."
그 파이프를 보자마자 남현주의 말투가 즉시 바뀌었다.
"믿고 있었어요!"
"안 믿던데."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파이프를 제 쪽으로 내려주시면 제가 잡고 올라갈게요! 땅에 엎드려서 팔을 쭉 뻗고 파이프만 아래로…."
파이프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았다. 남현주는 조금 전에 아이를 구할 때 똑같은 자세를 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거리 차이를 안다.
"조, 좀 짧지 않아요? 내려줘도 손이 안 닿을 것 같은데요? 더 긴 파이프 없어요?"
"밧줄 대신 쓰려고 가져온 게 아닙니다."
"네?"
나강인이 앞으로 쓱 움직였다. 그의 두 발이 수직에 가까운 각도의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남현주는 나강인이 추락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
"안돼! 올라가!"
남현주는 아이를 구할 때 벽에 몸을 붙이고 조심해서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런데 나강인은 급경사면에 서서 그냥 쭉 미끄러졌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자세를 보조했다. 덕분에 나강인은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흙벽에 살짝 대는 것만으로도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나강인이 서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래로 미끄러지다가, 갑자기 몸을 옆으로 비틀며 왼손에 든 파이프를 흙벽에 콱 박았다.
쇠파이프가 절벽을 깊게 파고들었다. 파이프는 그의 체중을 버티고도 남을 정도로 단단하게 박혔다.
바로 옆에 눈이 동그래진 남현주의 얼굴이 보였다. 손만 뻗으면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남현주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나 감독님 나이스!"
"이제 좀 믿음이 가시나?"
"계속 믿고 있었다고요!"
"뻥 치시네."
"뻥 쳐서 죄송합니다!"
나강인은 왼손으로 파이프를 단단히 잡고 왼발로 절벽을 툭 찼다. 흙이 푹 파여나가며 한쪽 발을 디딜 곳이 만들어졌다.
그는 그렇게 절벽에 몸 왼쪽을 붙인 상태로 남현주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아, 네. 잡…. 소, 손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옆집 초등학생을 구할 때만 해도 여기까지 내려올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구하고 난 후에 원래 예상보다 좀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거기다 지금 붙들고 있는 건 폭탄이다.
겁이 났다. 손에 힘도 조금씩 빠졌다. 발을 디딜 곳도 없었다. 나강인처럼 절벽을 걷어찼다간 그 반동으로 추락한다.
일단 겁먹고 나니까 조금 전 같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게 폭탄인데도, 손을 떼는 게 무서웠다.
나강인이 겁먹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제 회의실에서 액션은 자신 있다더니요? 촬영 때는 이것보다 더한 액션도 해야 하는데, 약한 모습을 보이시네."
"지, 지금 드라마 촬영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만큼 놀렸으면 화나서 오기로라도 힘을 낼 줄 알았는데 부족했나 보네. 더 놀릴걸."
"네? 네?"
나강인이 남현주의 옷깃 뒤를 꽉 잡고 위로 조금 당겼다. 남현주가 아이에게 했던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이제 힘이 좀 덜 들죠?"
남현주는 손에 걸린 부담이 약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훨씬 나아요!"
"이제 내 쪽으로 옮겨와요. 거기 계속 매달려 있다가 폭탄이 벽에서 빠져서 떨어지면 폭발하니까."
"네? 네!"
그녀가 왼손을 살짝 놓다가 갑자기 옆으로 휙 뻗어 나강인을 붙잡았다.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나 놓으면 안 돼요!"
"안 놓습니다."
그녀가 왼손으로는 나강인을 단단히 잡고 오른손을 폭탄에서 살짝 떼보았다. 두 발을 디딜 곳이 없는데도 나강인이 위로 당겨주는 힘 덕분에 몸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왼팔을 당겨 나강인에게 몸을 붙였다. 그런 후에 오른팔을 뻗어 나강인을 와락 껴안았다. 놓치면 죽을까 봐 어깨 위로 팔을 올리고 아주 꽉 안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폭탄이 흙벽에서 많이 빠져나왔습니다. 방치하면 아래로 떨어져 폭발할 위험이 있습니다.
"폭탄을 도로 집어넣어야죠. 폭발물 처리반이 와서 해결할 때까지는 저게 절벽에 박혀 있어야 하니까."
"네? 네? 우리 위로 안 올라가요?"
"저것부터 처리해야 하니까 잘 매달려 있어요."
나강인이 그녀를 매단 채로 오른손으로 폭탄을 잡고 꽉 밀었다.
"음…."
힘이 문제가 아니라 자세가 나오지 않아 폭탄이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넣다가 나강인의 몸이 흔들리면 매달려 있는 남현주가 떨어질 수도 있다.
AI 전지인이 폭탄의 꼬리 부분을 표시했다.
-이곳을 살짝 치십시오.
나강인이 남현주를 매단 채로 오른발을 들어 그곳을 툭툭 찼다.
남현주가 비명을 질렀다.
"뭐, 뭐하는 거예요!"
AI 전지인도 외쳤다.
-손으로 치란 말입니다! 손!
"여기는 발로 차도 아마 안 터질 겁니다."
"아, 아마요? 하지 마세요. 그러다 터지면 우리 다 죽어요!"
"회의실에서는 안 그러더니 겁이 보기보다 많으시네."
"이런 때에 누가 겁을 안 먹는데요!"
"나?"
"나 감독님 빼고요! 도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거예요!"
나강인이 겁먹은 그녀를 위해 발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폭탄을 밀었다. 자세가 나빠 작업 효율이 낮지만, 그가 누를 때마다 폭탄은 원래 있던 구멍으로 아주 조금씩 들어갔다.
남현주가 구출한 초등학생은 위에서 나강인만 찾아낸 게 아니다. 그 아이는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어른들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온 사람 몇 명이 차단막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
"어? 폭탄이다!"
"으아!"
몇 명은 폭탄을 보자마자 즉시 도망쳤다.
딱 한 명이 차마 도망치지는 못하고 물었다.
"그거, 혹시 터지는 겁니까?"
나강인이 대답했다.
"떨어지지만 않으면 안 터집니다."
"그, 그래요?"
"오신 김에 119에 연락 좀 해주시죠. 폭탄이 있다는 이야기도 하시고, 구조용 밧줄 꼭 가져오라고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남자가 사라졌다.
남현주는 나강인의 어깨 위로 두 팔을 걸쳐 껴안는 자세로 매달려 있다. 이젠 다리까지 나강인의 허리를 감았다.
남현주는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겁먹었다.
나강인이 폭탄을 구멍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우리 이러고 있는 거 누가 본다고 해서 스캔들이 나진 않겠죠?"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살짝 감동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아니요. 내 걱정이요."
"네?"
"난 스캔들은 좀 그래서."
남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지, 지금 나랑 엮일까 봐 그러는 거예요? 나 국민 첫사랑 남현주예요!"
나강인이 물었다.
"국민 첫사랑 그거, 바꾸고 싶어서 우리 드라마 하려는 거 아닌가?"
남현주는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중간에 포기한 다른 두 명과는 다르게 끝까지 남아 있으니까요. 선호도 투표로 배역을 정하자고 하는데도 순순히 받아들였고요."
"그건…."
나강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스캔들이 나면 손해 보는 사람은 나인 거로 합시다."
남현주가 그 목소리에 넘어갈 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반박했다.
"아니거든요! 내가 손해 훨씬 더 많이 보거든요? 나 여배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스캔들이 터지면 여배우가 손해를 훨씬 더 많이 봐요!"
"내가 대중의 관심을 좀 부담스러워해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 아…."
그녀는 나강인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국내,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의 무술감독에,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내서 연예계에서는 핫한 인물인데.’
그런데도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언론이나 대중에게는 노출이 별로 안 된 사람.’
연기력도 좋았다.
‘복경산 장군 역을 맡아 연기한 거, 장난이 아니던데.’
그 연기력을 보고 군침을 삼킨 기획사가 여럿 있다고 들었다.
‘그 액션 능력에 연기력까지 좋은데도 배우를 안 해. 복경산 때도 현장 상황이 급해서 땜빵으로 출연했다고 들었어. 땜빵치고는 연기를 너무 잘했지만.’
그녀는 특히 그의 표정 연기에 감탄했다.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사진은 한 장도 돌아다니는 게 없는 사람.’
그녀는 스캔들이 싫다는 나강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러면요. 스캔들 터지면 서로 손해인 거로?"
"그렇게 퉁 칩시다."
나강인이 다시 폭탄을 조금씩 밀어 넣었다.
"아. 이런."
나강인에게 매달려 있던 남현주가 사색이 돼서 꽉 껴안으며 물었다.
"왜, 왜요? 터, 터져요?"
"이 동네 식당이 맛집이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늦으면 줄 서야겠네. 줄 서서 먹는 건 안 좋아하는데."
"네?"
"일부러 줄 안 서려고 일찍 찾아왔는데 말이죠."
AI 전지인도 불평했다.
-오늘 점심을 많이 기대했는데 실망입니다.
남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밥이 중요해요?"
"하긴."
"그렇다고 바로 수긍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역시 화가 나면 겁을 안 먹는 타입이네요? 그럴 것 같더라니."
"네?"
"이제 안 떨잖아요."
"아…. 그래서 일부러 식당 이야기를…."
"아뇨. 식당 이야기는 진짜입니다. 이 동네는 밥 먹으러 온 거라서."
위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구조대가 왔네요."
잠시 후에 119구조대원이 아래쪽을 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강인이 위를 올려다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벽에 박힌 쇠파이프를 붙잡고 있으니까 더 버틸 수 있습니다. 폭탄은 구멍에 도로 밀어 넣었으니까 폭발물 처리반이 올 때까지 괜찮을 겁니다."
"저희가 곧 구조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밧줄만 하나 내려줘요."
"예?"
"잡고 올라가게요."
"사람을 안고 어떻게 올라온다는 겁니까? 안됩니다!"
나강인은 밧줄 없이도 남현주를 안고 올라갈 자신이 있다. 지금까지는 폭탄을 집어넣는 게 먼저라서 그러지 않았다.
막상 구조대가 왔는데 그런 묘기를 굳이 보이는 것도 이상하다.
"식당 줄 더 길어지겠다."
다른 구조대원이 몸에 밧줄을 연결하고 나타났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저희를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믿는 거 잘하는 남현주 씨부터 구해줘요."
"예. 그러겠…. 헉! 남현주다!"
"누군지 모르셨나 보네."
폭탄 때문에 상황이 심각하긴 하지만, 그들의 위치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구급대원이 밧줄을 몸에 연결하고 아래로 내려온 후에, 남현주의 몸에 구조 장비를 단단히 걸었다.
"남현주 씨! 저만 믿으십시오!"
"고, 고마워요."
구조대가 장비를 사용해 그녀를 위로 끌어올리는 건 금방이었다.
남현주는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저 살았어요! 고마워요!"
"저도 남현주 씨를 구조해서 영광입니다!"
남현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제 빨리 저분을 구출…."
나강인이 혼자 힘으로 절벽을 올라왔다. 마지막에는 절벽을 발로 툭 차고 위로 가볍게 점프해서 바닥에 착지했다.
나강인이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말했다.
"옷이 더럽다고 식당에서 안 받아주면 곤란한데."
사람들은 당황했다. 지금 이 구덩이의 절벽은 그렇게 올라오기엔 경사가 너무 급하다.
남현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저길 그냥 올라온 거예요? 밧줄도 없이?"
"밧줄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요."
"아니, 난 겨우 매달려 있었는데…."
그녀는 무술감독 나강인에 대해 그동안 들은 전설적인 소문들이 생각났다.
"와. 실력을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진짜…."
그녀는 소문만 들은 게 아니다. 방금 겪은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나강인은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가볍게 미끄러지며 내려오다가 쇠파이프를 벽에 찍어 몸을 고정했다.
그런 후에 그 급경사에서 남현주를 매단 채로 폭탄을 구멍에 도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밧줄도 필요 없이 절벽을 혼자 올라왔다.
그중 어느 하나도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면 더 쩐다더니…."
구조대원들은 일단 두 사람을 데리고 현장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구조할 사람도 없는데 폭탄 근처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남현주는 선글라스를 쓰고 마스크를 도로 꺼내 얼굴을 가렸다. 그런 후에 나강인의 옆에 서 있었다.
인근에는 비상 대피령이 내려졌다.
인근 지구대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통제선을 치고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만약을 위한 조치였다.
폭발물 처리반이 포함된 경찰특공대도 도착했다. 처음부터 폭탄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도착은 빨랐다.
그런데 도착한 사람 중에 나강인이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이전에 수행한 작전에서 마주치거나 같이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원들의 얼굴 옆에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가 간단히 표시됐다. 그중에는 유나린 박사가 납치됐을 때 구출 작전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경특 팀장이 나강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뭐, 어쩌다 보니까요."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번엔 어떤 놈들입니까? 주변에 저격수부터 배치할까요?"
옆에 있던 남현주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