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촬영
촬영 현장에서 KMTV 최진욱 피디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했다.
"정말 어려움이 많았던 우리 드라마, ‘바보의 사랑’이 드디어 촬영 시작합니다."
그의 앞에는 촬영 스태프와 배우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반면에 그의 뒤에는 A4용지에 출력한 고사상 사진 한 장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최진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고사상을 준비하지 해서 사진으로 때우겠습니다. 절을 하실 분은 나오세요. 단체로 하면 시간이 단축되니까 더 좋고요."
볼품없는 그 모습에 사람들이 머뭇거렸다.
"고사상 하나 얼마나 한다고 준비를 안 한 거야?"
"그거 준비하는데 사람을 쓸 여유가 없었겠지."
모든 사람이 어색해한 건 아니다.
고등학생 이연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앗! 그럼 고사 음식은 없나요? 기대했는데!"
"이따가 돼지머리 대신에 보쌈 세트 배달시켜줄게. 우리가 시간이 없지 식비가 없는 건 아니거든?"
"아싸아!"
언제나 밝은 이연지의 에너지가 사람들에게 퍼졌다. 어색하던 분위기가 밝아졌다.
최진욱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요즘은 사전제작을 많이들 하죠? 그런데 우리 드라마는 반대로 가겠습니다."
중견 배우가 물었다.
"반대라니요?"
"처음부터 일주일에 두 편씩 찍어서 바로 방영하는 거죠. 이거 당장 보름 뒤에 첫 방송이 잡혔습니다. 하, 하하."
이연지가 살려놓은 밝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하게 바뀌었다. 배우 중에는 방송 일정을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네? 그런 무리한 일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첫 편은 힘 빡 줘야 하는데…."
"다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드라마가 초반에 액션이 많아요. 그 액션을 빨리 찍으면 됩니다. ‘운명의 창’은 겨우 한 달 만에 촬영이 끝난 거 아시죠?"
사람들이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올해 극장가 최고의 화제작인 ‘운명의 창’은 영화의 높은 퀄리티에 비해 촬영 기간이 짧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영화를 그렇게 빨리 찍을 수 있었던 건 변형찬 감독이 사전에 치밀하게 짠 촬영 계획과 나강인의 실전 리얼 액션 덕분이다.
최진욱 피디가 말했다.
"제작 일정이 늦어지는 동안 도 작가와 제가 촬영 동선은 물론이고 편집 계획까지 디테일하게 짜 놨습니다."
그가 나강인에게 부탁했다.
"그러니까 나 감독님만 믿습니다. 액션 파트에서도 일정을 팍팍 줄여주셔야 저희가 삽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렇게 줄여도 방영일을 못 맞추면요?"
"저랑 도 작가는 칼 물고 죽는 거죠. 하, 하하. 살려주세요."
***
촬영은 바로 시작됐다.
‘바보의 사랑’은 액션이 중요한 드라마이긴 하지만 ‘운명의 창’ 같은 사극은 아니다.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제작진은 촬영 기간 단축을 위해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대부분의 촬영은 서울과 경기에서 해결할 계획이다.
장소 협찬 때문에 장거리를 뛰어야 하는 경우는 촬영 B팀을 보냈다.
최진욱이 도주희에게 말했다.
"나중에는 멀리 갈 수 있지만, 초반에는 이동하는 시간도 아껴야지."
"말만 해. 근처에 딱 맞는 장소가 없으면 대본을 수정해서라도 가까운 곳으로 배경을 바꿔줄 테니까."
"내가 도 작가 덕분에 산다. 알지?"
"알면 잘해라."
이 드라마는 초반부터 액션 장면이 많았다.
나강인은 액션 촬영에 한해서는 전권을 가지고 있다. 배우의 동선부터 카메라의 위치까지 모두 그가 정했다.
나강인이 촬영 장소인 건물 1층 로비에서 작게 말했다.
"지인아. 시나리오에 나오는 상황 띄워봐."
AI 전지인이 대본을 해석해 가상의 인물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출연 배우들의 모습도 실제와 똑같지는 않지만 대충 비슷하게 재현했다.
그렇게 만든 영상을 AR 렌즈를 통해 홀로그램으로 구현했다.
나강인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이 싸우는 모습을 입체 영상으로 보았다.
그는 그 영상 속을 돌아다니며 여러 방향에서 배우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입체 영상이라 모든 방향이 구현되어 있었다.
"카메라 위치는?"
주변에 카메라 표시 세 개가 나타났다.
-현장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필수 카메라 3대를 표시했습니다.
허공에 작은 화면 세 개가 추가로 떴다. 그 화면에는 각각의 카메라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이 찍히는지가 나왔다.
"나만 잘 나오면 되겠냐. 다른 사람들 모습도 살려야지. 저쪽도 좀 나오게 하자."
-4번 카메라를 추가했습니다.
작은 화면도 하나 더 생겨 그 카메라로 찍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도를 왼쪽으로 조금 틀어."
-4번 카메라의 촬영 방향을 조정했습니다.
나강인은 홀로그램 사이를 돌아다니며 카메라 네 대를 추가하고 위치를 조정했다.
그런 후에 최진욱과 촬영감독에게 말했다.
"카메라 세 대는 저기, 저기, 저기로 하죠. 그래야 주요 전투 장면을 놓치지 않고 찍을 수 있습니다."
촬영감독이 물었다.
"세 대면 충분할까요?"
"아니요. 좋은 거 세 대는 메인에 놓고, 보조 카메라는 네 대만 쓰죠."
그가 나머지 네 곳의 위치도 지정했다. 촬영팀이 카메라와 조명부터 옮겼다.
나강인이 주변 사물도 가리켰다.
"저기에 매트리스를 좀 깔아두세요. 사람이 날아가다가 저기 떨어질 겁니다. 저기 의자는 치우시고요. 저 화분은 저기 있으면 깨져서 사람 다칩니다."
남현주가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나 감독님이 진짜 감독님 같아."
신은하가 말했다.
"거기다 연기까지 직접 하잖아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배역 안 맡았잖아."
"아뇨. 대역 연기요. 강인 오빠가 원래 유찬 오빠 대역으로 시작했잖아요. 이번 드라마에서도 대역으로 출연하기로 했어요."
본격적인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나강인이 가면을 쓰고 김유찬 대신 배우들과 싸웠다. 배우들은 망설임 없이 나강인을 향해 주먹과 발을 날렸다.
남현주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와…. 진짜로 싸우는 거 아니지?"
"반쯤은 진짜죠. 괜히 실전 리얼 액션이라고 부르겠어요?"
액션 촬영은 중간에 멈추지 않고 한 번에 끝났다. 그런 후에 나강인이 그 장소에서 나오고 똑같은 복장의 김유찬이 들어가서 대사를 말하면서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 촬영까지 끝난 후에 현장의 카메라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남현주가 감탄했다.
"진짜로 연습 없이 한 방에 액션 촬영을 끝내네?"
"그래서 액션이 많을수록 촬영 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촬영 현장은 처음 봐."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걸요?"
이 건물에서 액션 장면 몇 개를 찍고 나서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배우들이 쉬는 동안 스태프 중 일부는 일상 장면 촬영을 준비했다.
최진욱이 말했다.
"좀 무리한 일정이었는데 그걸 또 단축했어. 와…."
도주희는 대본 초고를 완결까지 써 놓았다. 드라마가 촬영되는 동안 다듬고 수정하고 교정해야 하지만, 초고가 다 나왔기 때문에 촬영장에 수시로 와도 될 만큼 여유가 있다.
도주희가 맞장구를 쳤다.
"‘푸른 하늘’ 때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액션 파트를 강인 씨한테 완전히 맡겨놓으니까 더 빨라졌어."
"액션을 찍을 때는 카메라 배치부터 조명까지 강인 씨가 다 세팅해준다. 우리는 그냥 지정한 자리에 카메라를 갖다놓고 찍기만 하면 돼."
"전에는 우리가 본격적인 액션 드라마를 찍은 건 아니라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능력이 장난 아니다."
최진욱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슬쩍 보았다.
"‘운명의 창’이 그렇게 빨리 촬영이 끝난 건 강인 씨가 있어서잖아. 우리도 액션 드라마니까 이러면 일정 맞출 수 있겠는데?"
"맞춰야지. 안 맞추면 방송이 빵꾸 나는데."
"이 속도로 찍으면 스케줄 빵꾸 나서 특별편으로 채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그러려면 강인 씨가 계속 이렇게 협조해줘야지."
"강인 씨 지금 어디 있어? 가서 어깨라도 주물러 드려야지."
***
신은하, 남현주, 오세나는 이동형 분장실 겸 소품 창고로 쓰는 개조 버스에 모여 있었다.
남현주가 감탄했다.
"와. 이래서 다들 나강인 나강인 하는구나. 진짜 모든 액션 촬영이 실시간으로 끝났어."
신은하가 화장을 지우면서 자랑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배치해 놓고 한 방에 찍는 거 봤죠? 그 영상을 편집하면 드라마에서 방영되는 시간이 실제 촬영시간보다 길어질 수도 있어요."
"진짜?"
"‘운명의 창’ 때는 그랬거든요. 찍을 땐 한 방이었는데, 편집 끝나고 영화로 상영될 때는 조연들의 움직임이 별도의 장면으로 들어가서 전체적으로는 더 길어지곤 했어요."
"와. 그럼 조연이 어떻게 찍힐지까지 다 계산하고 카메라를 배치한 거야?"
"그쵸."
"카메라 배치나 배우들 위치 지정은 현장을 잠깐 둘러보고 바로 정하셨잖아.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게 돼?"
신은하가 신나서 자랑했다.
"강인 오빠는요. 그 많은 카메라에 어떤 영상이 찍힐지를 촬영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나 봐요. 변형찬 감독님도 ‘운명의 창’을 찍을 때 강인 오빠의 그 능력에 감탄 많이 하셨어요."
남현주가 감탄했다.
"이래서 나 감독님이 영화감독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구나."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강인 오빠는 딱히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오세나가 끼어들었다.
"‘햇살 좋은 날’ 재촬영 때도 손태민 감독님이 강인 씨 덕분에 편집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고 했어."
"어머. 언니는 재촬영에 참여 안 했으면서."
"난 그 약쟁이랑 동선이 겹치는 게 없어서 재촬영이 없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강원도 촬영장에 구경이라도 갔을 거야."
남현주가 소품 정리 선반에 놓인 화장품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여기 백한수려하고 지구뷰티 화장품이 같이 있네? 두 가지가 다 있는 거 보면 화장품은 PPL이 안 들어왔나 보다?"
최진욱이 나강인을 찾으러 왔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둘 다 PPL입니다."
남현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경쟁 제품이 동시에 PPL로 들어와요?"
"백한수려하고 지구뷰티에서 경쟁이 붙었어요. 자기네 PPL을 꼭 넣어달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예산이 좀 많이 필요했죠. 세 분을 모시려면…."
오세나와 남현주는 원래 출연료가 비싸다. 신은하도 영화가 대박이 났으니 출연료가 크게 올라가야 한다.
세 사람은 이 드라마에 나오려고 출연료를 깎아주긴 했지만, 그래도 세 명분을 합치면 상당한 금액이다.
"아. 우리 때문에…."
"하, 하하. 그렇죠. 그래서 PPL을 둘 다 받아서라도 제작비 채워야 해서… 그냥 받았습니다."
"네? 아니, 최 피디님은 예산이 필요하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그 회사들이 그걸 받아들였다고요?"
"그러던데요."
"아니, 왜…."
신은하가 씩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 두 회사가 강인 오빠한테 신세 진 게 있어서 그래요. PPL이라도 넣어서 도와주고 싶었나 보죠."
남현주가 물었다.
"어? 무술감독한테 화장품 회사가 왜 신세를 져? 화장품 만들다가 누구랑 싸웠대?"
"그런 게 있어요."
오세나가 화장품에 손을 뻗었다.
"그럼 난 이거 써야겠다."
신은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이건 아니죠."
"뭐가?"
"PPL 화장품은 두 개인데, 우리는 세 명이잖아요."
"어머어. 그럼 선호도 조사 꼴찌인 네가 빠지면 되겠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억울하면 꼴찌를 하지 말든가."
옆에서 최진욱이 말했다.
"어…. 그게 말이죠. 오세나 씨가 양보해야겠는데요?"
오세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네? 왜요?"
"백한수려는 신은하 씨가 이미 스포츠 화장품 CF를 해서, 그 이미지와 PPL을 연동시킨다고…."
"그래도 하나 남잖아요!"
"지구뷰티는 공사장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남현주 씨가 써줬으면 한다고…."
"아니, 잠깐만요. 그럼 우리 드라마가 잘됐을 때 CF는요? 드라마에서 화장품을 쓰는 모습을 보여줘서 완판을 시켜줘야 CF도 들어올 거 아녜요?"
"그야 그렇…. 하, 하하. 아! 다음 촬영 준비해야지!"
최진욱이 차에서 도망쳤다.
신은하가 백한수려의 화장품을 쓱 챙겼다.
"난 백한수려 스포츠 화장품 CF를 했으니까 이건 내가 가져가는 게 맞지."
남현주가 얼른 지구뷰티의 화장품을 챙겼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오세나가 주먹을 꽉 쥐고 흔들었다.
"짜증 나!"
분장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나강인도 같이 들어왔다.
분장팀장이 말했다.
"화장 새로 해드릴게요."
세 사람은 조금 전에 짧은 액션을 찍었다. 이번에는 일상 장면이다. 분장도 바뀌어야 한다.
오세나가 말했다.
"난 자연스러우면서도 은근한 느낌으로 부탁해요."
남현주도 말했다.
"난 털털하면서도 예쁜 이미지 알죠?"
신은하가 말했다.
"난 럭셔리. 대놓고 럭셔리. 아주 그냥 샵에서 한두 시간 하고 온 것 같은 럭셔리."
남현주가 물었다.
"은하야. 우리 다음 촬영까지 시간 얼마 없는데?"
"괜찮아요. 이번엔 강인 오빠가 같이 왔잖아요."
"으응?"
분장팀장이 말했다.
"아까는 액션 준비 때문에 나 감독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지만, 오늘 액션 촬영은 이제 끝났으니까 잠깐 도와주시겠대요."
남현주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만요. 나 감독님이 은하 분장을 해준다고요? 은하 너 괜찮겠어?"
"당연하죠."
나강인이 신은하의 앞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원래 분장은 이미 지워뒀구나."
"척하면 척이지. 잘했지?"
"잘했다. 그럼 5분이면 다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