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박람회
‘바보의 사랑’은 16부작 드라마다. 그 긴 드라마에 액션만 나올 리가 없다.
1화 초반에 액션이 화끈하게 몰아친 후에는 일상 모습과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세력 간의 갈등 장면이 이어졌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시청자들의 댓글이 다양하게 붙었다. 그중에는 이연지의 이야기도 있었다.
-주인공 여동생 귀엽네.
-누구지? 신인인가?
이연지가 입가에 중화요리 소스를 묻힌 채로 말했다.
"앗! 저 나와요! 저!"
이연지는 처음에는 귀엽고 철없는 여동생 캐릭터로 나왔다.
드라마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갈등이 고조돼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이연지의 캐릭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화면 속에서 이연지가 벽을 밟고 점프했다가 다시 기둥을 박차고 공중에서 수평으로 회전해 적을 걷어찼다. 고난도 기술이 화면에 선명하게 잡혔다.
그런 기술에 걷어차이는 역할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나강인이 적으로 분장해 이연지의 공격을 받았다. 공중에서 이연지가 내지른 발이 나깅인의 머리를 정확히 걷어찼다.
이연지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는요. 저 순간에 아저씨가 크게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신은하가 맞장구쳤다.
"그래. 우리 드라마는 액션을 재촬영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네가 그때 너무 놀라서 저건 다시 찍을 뻔했지."
다행히 재촬영은 하지 않았다.
최진욱 피디는 액션을 찍을 때 배치한 여러 대의 카메라 영상을 확인한 후에, 이연지가 깜짝 놀라는 장면은 빼고 나강인이 맞고 날아가는 모습만 남기면 된다고 판단했다.
이연지가 억울해했다.
"그때 진짜 발에 걷어차는 느낌이 확실히 났었다니까요?"
"다른 배우들도 그런 소리 많이 했어. 강인 오빠를 때릴 때 주먹에 반응이 와서 사고 친 줄 알았대. 하지만 아니잖아."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가 전에 물어봤는데, 그냥 상대의 감각을 속이면 된다더라."
"와…."
"반장한테 공부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그냥 하면 되던데.’라고 대답하는 걸 들은 기분이지?"
"되던데요?"
"응?"
"저 전교 1등."
"너 요즘 영화도 찍고 드라마도 찍었는데?"
"그래도 이번 시험에서 전교 1등."
"좋겠다?"
"히히. 넹."
발차기 연기를 한 이연지만 놀란 게 아니다. 그 장면을 본 시청자들도 놀랐다.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저 사람 죽은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진짜로 걷어찼잖아요.
-그냥 걷어찬 정도가 아니죠. 벽이랑 기둥을 박차서 힘을 얻고 회오리처럼 회전하면서 공중 돌려차기를 날렸어요. 저렇게 차면 곰이라도 죽을 듯.
-맞아요. 걷어차인 사람이 머리가 돌아가면서 옆으로 날아갔어요.
-합리적으로 생각하죠. 저 장면에서 상대 배우가 죽었으면 드라마가 어떻게 방영됐겠습니까?
-그래도 많이 다쳤을 거 같은데.
-많이 다쳐도 저 장면이 편집된다니까요? 안 다쳤으니까 TV에 나오죠.
-와. 액션이 너무 실전 같아서 오싹오싹하네요.
-진짜 리얼 그 자체네.
-근데 이런 명품 액션 드라마를 겨우 보름 만에 찍고 방영하는 거라고요? 그게 가능한가?
-아까 누가 이런 액션이 여러 번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초반 액션이 끝이라고 했는데?
-맞다. 그 사람 어디 갔지? 너무 진지하게 설명해서 난 방송 관계자인 줄 알았네.
-어? 또 액션이다!
-이번엔 지붕 위를 날아다닌다!
드라마 1화 마지막은 김유찬이 바보처럼 웃으면서 끝났다.
-벌써 끝났어.
-내 한 시간이 순삭됐어요.
-가면만 쓰면 카리스마 뿜어내던 김유찬이 마지막에 바보처럼 웃는 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에 박히나요.
-잘생겨셔?
-그런 듯.
-잘생긴 바보 너무 좋다.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드라마 첫 화의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최진욱 피디가 문자를 확인하고 실실 웃었다.
"첫 화부터 시청률 10% 넘은 거 실화냐?"
도주희 작가가 자랑했다.
"대본이 좋아서 그래."
"연출이 좋아서지."
신은하도 시청률 통계를 문자로 받았다.
"우리 드라마 10% 넘었대."
이연지가 물개 박수를 쳤다.
"우와! 첫 화부터 10%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우리 드라마는 설사 망했어도 첫 화는 10%를 당연히 넘어야 해."
"네? 왜요?"
"유찬 오빠, 나, 현주 언니랑 세나 언니. 배우 이름값만으로도 소문난 잔치니까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겠지. 먹을 게 많은 잔치인지는 더 봐야 아는 거고."
오세나도 시청률 통계를 받았다.
"내가 나오는 드라마가 10%도 안 될 리가 있어? 뭘 이런 걸 일일이 보내고 그래?"
매니저가 말했다.
"당연하지. 오히려 너무 급하게 드라마가 제작되는 바람에 홍보가 약했어. 그래서 시청률이 덜 나온 거야."
"내가 주연을 맡았으면 처음부터 20%를 넘겼을걸?"
"어…."
"왜? 안될 거 같아?"
"아니야. 당연히 그랬겠지. 네가 아니라 남현주가 주인공을 하니까 10% 선에서 그친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12%…."
"누가 정확히 말해 달래?"
"아니다."
남현주가 집에서 동생들에게 자랑했다.
"봤어? 내 액션 연기 어때? 쩔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고등학생 쌍둥이 남동생들이 대답했다.
"연기가 아니던데? 우리 때릴 때 모습 그대로던데?"
"평소에 맞아준 우리 지분도 있는 거 아냐? 용돈이라도 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옜다."
"누나 액션 연기는 세계 최고!"
"시청률 30% 가즈아!"
***
다른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느라 바쁠 때 나강인은 이정호 외과 과장을 만나고 있었다.
오늘은 알레이나 민의 아버지인 로버트 민도 있었다.
로버트가 말했다.
"한국에 연구 목적의 회사도 세웠고, 그 연구를 명분으로 수술에 필요한 물자도 들여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했습니다."
나강인이 이정호를 보았다.
"이 과장님 쪽은요?"
외과 과장 이정호가 대답했다.
"처남이 성형외과 직원들에게 내일부터 며칠 휴가를 줬습니다. 그 기간에 준비하고 디데이를 잡으면 됩니다."
"그럼 저도 디데이에 시간을 비우겠습니다."
로버트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수술, 성공할 수 있겠지요?"
로버트 민은 이 병의 전문가다.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성공을 100% 장담할 순 없습니다.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그럼 디데이까지 며칠은 광년…. 알레이나는 사고 치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지내게 해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언론에 노출되면 이 비밀수술은 못 합니다."
로버트가 장담했다.
"제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알레이나가 철은 없지만 바보는 아니니까 괜찮을 겁니다."
***
이튿날 아침에 알레이나가 나강인의 현관 벨을 눌렀다.
나강인이 문을 열었다.
"왜?"
"변장하러 왔어."
"어…. 밖에 나가게?"
"당연하지."
"너 당분간 좀 조용히 지내야 하지 않냐? 그러니까 며칠 집에서 쉰다든지…."
"어머. 우리 아빠인 줄."
"그런 말을 듣긴 들었구나?"
"난 아빠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아닌가 봐."
나강인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 네가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앗! 너 바보야?"
"너도 바보고 나도 바보고."
"나 바보 아니다!"
"그러니까 더 바보 같잖아."
"변장 안 해주면 나 그냥 이대로 확 나간다?"
"왜 그게 협박이 되냐?"
알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내가 노출되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아니지."
"쳇."
알레이나가 대놓고 실망했다.
나강인이 그런 그녀를 조용히 보았다. 수술 성공 확률은 100%가 아니다.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아니까 더 놀고 싶은 건가?’
"야. 감쪽같이 변장해줄 테니까 집에서 기다려."
"아싸아!"
"대신에 멀리 돌아다니지는 마라. 동네 식당하고 피시방까지만이다."
"알았다고. 나도 생각은 있다고."
"아냐. 너 그거 없어. 생각."
"근데 오늘 뭐 해? 점심은 직접 만드나?"
"아니. 오늘 아는 사람이 연구 발표하는 게 있어서 구경 간다."
"어? 그래? 심심한데 나도 갈까?"
"기술 박람회에 가서 뭐하게? 공학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지루할 수도 있는데?"
"이거 왜 이래? 나 첨단장비 잔뜩 나오는 영화 찍은 적 있어."
"그러냐? 대단한 첨단장비 전문가 나셨다. 근데…."
나강인이 생각을 바꿔보았다.
‘얘를 수술하고 미국으로 보내면 다시 볼 날이 없을 텐데, 사고 치고 다니게 두는 것보다는 데려가서 감시하는 게 나으려나?’
***
강남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로봇 박람회가 열렸다.
그 박람회에서는 주로 소형 장난감 로봇이나 가정용 로봇 청소기 등이 전시됐다. 주제가 일반인을 위한 로봇이라 공장용 조립 로봇 같은 대형 장비는 없었다.
오메가테크는 무기만이 아니라 로봇 공학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회사다. 박람회장 한쪽에 오메가테크의 전시관이 작게 차려졌다.
관련 업계 사람이 박람회장에 들렀다가 그 전시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메가테크? 저기서 왜 왔어?"
"왜? 로봇 기술력 좋잖아."
"이 박람회 콘셉트랑 안 맞으니까 그렇지. 오메가테크에서 군사용 로봇을 만든다면 모를까, 로봇 청소기나 장난감 강아지를 만들 리는 없잖아."
"어? 그러네? 진짜 여기 왜 왔대? 이번 박람회는 개인용 로봇이 테마인데 말이야."
그들은 오메가테크의 전시관을 살펴보았다.
"뭐야? 전시된 제품이 왜 하나도 없어? 무대가 너무 휑한데?"
"안내하는 사람도 없다."
"어제부터 이렇게 놔둔 거야? 이럴 거면 그냥 작은 부스를 하나 얻지 왜 전시관을 받았을까? 돈이 더 많이 드는데 말이야."
"전시관 위치가 구석 자리잖아. 저 자리가 계속 안 나가고 있었을걸? 막판에 급하게 참가를 결정했나 본데?"
업계 관계자만 입장이 가능한 어제는 오메가테크의 전시관이 그냥 비어 있었다. 회사를 소개하는 사진은 붙어 있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일반인 관람객들도 전시장에 들어왔다.
오메가테크는 일반인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회사는 아니다.
그런데 이 박람회에는 로봇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이 찾아왔다. 그래서 회사 이름을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오빠. 이 회사는 뭔데 썰렁해?"
"오메가테크? 이야아. 여긴 로봇이랑 무기 만드는 회사인데, 여기서 왔네?"
"로봇이랑 무기? 그럼 사람처럼 생긴 킬러 로봇을 만드는 거야? 영화에서 본 윙치킨 같은 거."
"에이. 그런 걸 만들었을 리는 없지만…. 궁금하긴 하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데?"
"11시에 발표한다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와보자."
나강인은 변장한 알레이나와 박람회장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오메가테크의 전시관으로 찾아갔다.
전시관 뒤쪽 스태프 공간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발표를 보러 온 사람들의 뒤쪽에서 구경만 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오메가테크가 어떤 개인용 장비를 발표할지 궁금해서 찾아왔다.
일반인들도 꽤 모였다.
오메가테크 직원들과 유나린 박사의 연구실 대학원생들이 무대를 준비했다.
11시가 되자 무대 위에 스칼렛 켈리와 유나린 박사가 올라갔다.
스칼렛이 먼저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오메가테크의 사장이고 연구 총책임자이며 공학 박사인 스칼렛 켈리예요. 저 한국말 잘하죠? 할머니가 한국분이세요."
회사 직원 몇 명이 열심히 박수를 쳤다.
유나린 박사도 인사했다.
"한국대학교 교수인 유나린입니다."
이번에는 대학원생들이 더 크게 박수를 쳤다.
스칼렛이 말했다.
"오늘 발표할 기술과 제품은 세 곳에서 협업해서 개발했어요. 공동으로 개발했지만 각자 맡은 부분은 달라요."
관객들의 뒤쪽에서 알레이나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광돌이가 아는 사람이 무대 위의 저 두 명 중에 있어? 누구야?"
"둘 다 알아."
"둘 다 여자네? 바람둥이야?"
"누명 씌우지 마라. 그런 사이 아니니까."
스칼렛이 기본적인 설명을 조금 더 한 후에 무대 뒤쪽을 가리켰다.
무대 뒤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양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강인은 그 사람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퇴역 군인 앤더슨.’
앤더슨이 무대 가운데 서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런 후에 왼손으로 오른손의 가죽장갑을 벗겼다.
오른손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의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퍼포먼스에 살짝 놀랐다.
일반인은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오메가테크랑 한국대학교가 연구한 게 의수인가 봐."
"같이 연구한 곳이 한군데 더 있다며. 거긴 어디야?"
관계자들은 다른 쪽에 주목했다.
"일부러 의수의 내부가 보이게 했네?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게 하려는 건가?"
"그런데 저거…. 모터로 구동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유압식인가?"
"아니, 유압식도 아닌데…."
앤더슨이 이번에는 의수로 만들어진 오른손으로 왼손 가죽장갑을 벗겼다. 오른손의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
왼쪽에서도 똑같은 모양의 의수가 나왔다.
"어어?"
"양쪽 다 의수였어?"
"당연히 왼손은 진짜 손인 줄 알았는데?"
앤더슨이 양복 재킷을 그 손으로 직접 벗었다. 반팔 와이셔츠의 팔꿈치 아래부터 사람의 팔이 아니라 의수가 보였다.
"와아!"
"양손이 다 의수인데도 저게 되네."
앤더슨은 넥타이도 그 손으로 풀었다.
"어? 넥타이까지…."
"의수의 손동작이 쩌는데?"
앤더슨은 넥타이를 푼 후에 와이셔츠의 제일 윗단추도 하나 풀었다.
상당수의 관객은 그냥 감탄했다.
"와. 요즘 의수는 진짜 잘 나오는구나."
"그러게. 저 정도면 거의 손 아니야?"
관련 기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훨씬 더 놀랐다.
"와이셔츠 단추를 의수로 풀었어! 우와아!"
박람회에 참석한 로봇 엔지니어들은 경악했다.
"저 사이즈에서 저렇게 정밀한 움직임에 저 속도가 어떻게 가능하지?"
"진짜 손처럼 움직이잖아. 사용자가 의수 컨트롤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왜 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