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35화 (335/411)

335. 천장

나강인이 병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은 이미 터졌으니까, 현재 상황부터 확인하죠."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습니까?"

옆에 있던 로버트 민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정호가 로버트를 본 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없습니다."

이유도 재빨리 생각해냈다.

"일단 오늘 수술을 위해 빼돌린 약품과 혈액이 문제입니다. 이 병원이 다시 빌 때까지 약품을 몰래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고, 혈액은 보존 기한이 걸립니다."

"확실히 문제네요."

"우리 병원 VIP 입원실도 세팅해놨습니다. 그 일정을 변경하면 소문이 돌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문 나는 걸 조심해야 하잖습니까?"

"그러면, 오늘 수술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을 수도 있군요."

로버트가 다급히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할 수 있어요!"

"본인이 원해야 하지요."

나강인이 알레이나를 보았다.

"넌 나 믿냐?"

알레이나가 머뭇거렸다.

"어…."

"그래. 그동안 본 게 있는데 안 믿기겠지."

"근데 뭐, 믿으려고."

"너 나 왜 믿냐?"

"나 구해주는 게 처음이 아니잖아."

알레이나가 아파트 근처에서 브레드 밀러에게 협박당할 때 나강인이 구해주었다. 그러면서 강남 룸살롱 사장 조정철과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까지 날려버렸다.

"브레드 밀러 패거리? 이 수술과는 장르가 많이 다른데?"

"그것도 그렇고, 나가서 놀 수 있게 변장도 도와주고…. 뭐, 기타 등등. 여러 번 구해줬으니까 이번에도 살려줄 거 같아."

"너 사람 잘 믿냐?"

"아무나 믿는 거 아니거든?"

"그래? 그럼 됐다."

나강인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바로 진행하시죠."

***

알레이나가 수술실에 누워서 물었다.

"나 진짜 이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는 거야?"

나강인이 대답했다.

"너랑 같은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날아다니더라."

"뭐래. 두 명밖에 없잖아."

"아는 게 많네?"

"나 손 좀 잡아주면 안 돼?"

"응. 안돼. 내 손 소독했어."

"진짜 나 살려줄 거지?"

AI 전지인이 말했다.

-수술 성공 확률이 100%는 아닙니다. 수술 도중에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알레이나에게 말했다.

"내 수술 성공률은 100%야. 이 수술도 당연히 성공한다. 넌 나만 믿고 푹 자라. 일어나면 신세계가 열릴 테니까."

"다행이다. 무서웠는데…."

알레이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손성현이 마취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정호가 선언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하늘이 알레이나를 돕기를."

***

이튿날 나강인이 드라마 촬영장에 나타났다.

나강인은 액션 촬영이 있을 때는 당연히 촬영장에 오지만, 일이 없을 때 놀러 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회의도 최근에는 비밀수술 때문에 미룰 수 있는 건 미뤘다.

스태프들이 나강인을 발견하고 촬영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오늘 액션 촬영이 있어?"

"아니? 없을걸?"

"그런데 나 감독님이 왜 오셨지?"

"그게 왜? 못 오실 곳도 아닌데."

"아니, 요즘은 액션 촬영이 없으면 안 오시니까…. 무슨 일 있으신가?"

신은하가 나강인을 발견하고 신나서 다가왔다.

"뭐야? 나 보러 온 거야?"

"어."

신은하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진짜야?"

"너도 보고, 남현주 씨도 보고."

"와 씨. 사람 두근거리게 해놓고 뒤통수 치는 거 보소."

"그냥 평범한 일상을 보러 왔다."

"평범? 드라마 촬영장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이건 누군가가 원하던 평범한 일상이야."

남현주가 다가왔다.

"어머. 저 그거 좋아해요. 평범한 일상."

신은하가 손을 내저었다.

"쉭쉭. 언니는 가세요. 나랑 놀 거니까."

"사람을 뱀 취급하지 말지? 그리고 우리 촬영 바로 들어가야 하는 거 모르니? 그만 놀고 오렴."

"우리 서로 싸우는 씬이죠? 오늘 아주 영혼이 담긴 연기를 하겠네."

"어머. 나도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갔다.

신은하와 남현주가 서로에게 서슬 퍼런 기세로 대사를 쳤다.

톱스타 김유찬이 나강인의 옆에 앉았다.

"쟤들 연기 장난 아니죠? 진짜로 싸우는 것처럼 연기한다니까요."

"유찬 씨는 순박한 표정으로 연기하던데요."

"흐흐. 쟤들은 다 사납고, 나만 순박하고. 이 드라마는 그렇게 대비되는 분위기가 또 재미라니까요."

김유찬의 라이벌 역할인 송인준이 반대편에 앉았다.

"역시 내가 주인공을 해야 했어. 나도 바보처럼 웃는 연기 진짜 잘할 수 있는데."

김유찬이 실실 웃었다.

"내가 그냥 바보냐? 잘생긴 바보지. 흐흐흐."

"그렇게 웃으니까 연기가 아니라 진짜 바보 같다."

송인준이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나 감독님. 우리 드라마 인기가 심상치 않은 거 아시죠? 딱 두 편 방송했는데 반응이 엄청나요. 벌써 시청률 17% 찍었다니까요. 어제 방송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어제는 바빠서 방송을 못 봤습니다."

"아. 바쁘시구나. 그래도 방송은 보실 줄 알았는데."

"오늘 VOD로 보려고요."

"보시면 진짜 쩔어요. 다들 연기도 엄청나고요. 여배우들 기세 싸움도 장난 아닙니다. 특히 액션은 진짜, 와우."

송인준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나 감독님은 액션이 어떤 모습으로 찍히고 편집될지 촬영 전부터 정확히 아신다면서요? 그거 진짜 어떻게 하시는 거죠?"

AI 전지인이 말했다.

-제가 홀로그램 영상으로 합성해서 보여드립니다.

"그냥 상상하는 거죠."

-모든 방향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게 입체로 보여드리고, 각각의 카메라에 어떻게 찍히는지도 2D 홀로그램으로 또 보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잘합니다.

송인준이 말했다.

"난 내가 상상한 대로 나왔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꼭 본방사수하는데, 어제 진짜 바쁘셨나 보다."

"그렇죠."

"그 유명한 나강인표 밥차를 한 번도 안 하신 게 바쁘셔서였구나. 기대하는 사람 많은데."

"촬영을 서울에서 주로 해서 밥차가 따로 필요하지도 않던데요."

"제가 아쉬워서요."

"그래도 오늘은 밥차가 있으니까, 간단한 간식이라도 만들어볼까요?"

밥차 주인 김병호는 ‘햇살 좋은 날’ 때부터 알던 사이다. 그는 나강인이 밥이나 간식을 만들겠다고 하면 언제나 환영한다.

송인준이 활짝 웃었다.

"와! 간식! 뭐 하시게요?"

"잡탕 과자요."

"좋죠. 그런데 메뉴를 잡탕 과자로 고르신 이유가 있나요?"

수술 전에 알레이나가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는 걸 눈치챈 건 잡탕 과자 때문이었다.

나강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거 좋아하던 사람이 생각나서요."

***

"낯선 천장이다."

알레이나가 병원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로버트 민이 다급히 물었다.

"정신이 들어?"

"아빠. 나 지금 마취에서 깬 거야?"

"아니. 마취약의 약효는 벌써 끝났어. 넌 그냥 푹 잔 거야. 일부러 재웠어. 지금은 좀 강한 진통제만 들어가고 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눈 떴으니까, 수술이 실패한 건 아니지?"

케이타이거 증후군은 수술이 실패하면 수술실에서 사망한다. 괜히 이정호 과장이 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로버트가 활짝 웃었다.

"수술은 성공했다. 아주 완벽하게 성공했어."

알레이나가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나 이제 살았구나."

"그래. 넌 이제 살았어. 회복 속도가 깜짝 놀랄 정도야."

"걔가 한다니까 좀 불안했는데."

"닥터 노네임? 그 사람 덕분에 네가 살았어."

"알아. 걔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며."

"그것만이 아니야. 수술 도중에 돌발상황이 터졌는데, 닥터 노네임이 해결했다. 안 그랬으면 그때 이미…."

알레이나가 눈을 깜빡였다.

"나 죽을 뻔했어?"

"살았으니까 됐지. 그때 까먹은 시간도 닥터 노네임이 속도를 높여서 해결했어. 그 사람은 진짜…."

"잘해?"

로버트 민은 유명한 의사다. 수술 경험도 많다.

"사람 손이 아닌 것 같더라. 비상조치 능력도 대단해. 정말 엄청난 실력자야. 그런 사람이 왜 의사 면허가 없는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렇구나. 잘하는구나."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VIP실 창밖이 보였다.

"하늘이 참 파랗다. 구름은 하얗고. 다시 보니까 참 좋다."

"앞으로 실컷 봐라. 이제 그래도 돼."

"엄마는?"

"파리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었지. 괜히 들어왔다가 기자나 파파라치의 눈에 뜨이면 곤란하니까. 네가 회복되면 들어올 거야."

"엄마 보고 싶다."

"어? 나는?"

"아빠는 지금 보고 있잖아."

***

인공 근육을 이용한 의수 ‘리얼 핸드’는 공중파 뉴스에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의수의 핵심인 인공 근육이 한국대학교의 유나린 박사에 의해 개발됐다는 것 때문에 관심도 많이 끌었다.

설계를 주도한 ‘미스터 나’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체가 공개되진 않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리얼 핸드’에 적용된 다른 기술보다 ‘인공 근육’이 주는 임팩트가 훨씬 강했다.

구조설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업계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어렵지만, 인공 근육이란 말은 보통 사람도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술이 연일 뉴스에 나올 정도로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리얼 핸드’ 발표 첫날에는 수많은 뉴스에 나왔지만, 이튿날에는 줄어들었다가 사흘째부터는 공중파 TV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인터넷에는 후속 기사가 계속 올라왔지만, 첫날만큼 관심을 끌지는 않았다.

반면에 외국, 그중에서도 일부 국가에서는 큰 관심을 가졌다.

외국 언론사의 기자가 유나린을 찾아가 취재했다.

"그러니까 응용 분야가 많다는 거군요?"

"네. 기존의 장비 중에 인공 근육을 사용하면 성능을 높일 수 있는 게 제법 있어요. 대표적인 게 의수였죠."

"혹시 인공 근육이 달린 굴삭기도 만들 수 있습니까? 사람 손처럼 생긴 굴삭기요."

"만들 수는 있는데 기존 포크레인보다 가격만 비싸고 효율은 떨어져요. 인공 근육에도 에너지를 저장해야 하는 방식이라서 강한 출력을 계속 유지하는 건 어렵거든요."

기자가 아쉬워했다.

"아. 그러면 이족보행 거대 로봇은 어렵겠네요."

"아! 거대 로봇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그런 거 좋아하는데요. 인공 근육은 그런 용도로 개발한 게 아니에요."

스칼렛을 인터뷰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오메가테크의 사장과 인터뷰하려면 사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 미리 약속을 잡고 기자 몇 명이 찾아왔다.

"박람회에서 의수 시연을 한 엔더슨 씨는 전쟁터에서 양손을 잃은 군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퇴역 군인이죠. 동료를 구한 영웅이고요."

"다리를 잃은 사람들도 있는데, 같은 방식의 의족도 개발하실 겁니까? 그러니까 발가락까지 구현된 의족 말입니다."

"우리의 의체 개발은 이제 시작 단계예요. 리얼 핸드는 첫 제품이고요. 의족은 완전히 새로운 연구죠. 손과 달리 발은 신체 균형을 잡아줘야 하니까요. 더 어려워요."

"어렵지만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나중에는 가능하겠죠."

다른 기자가 물었다.

"팔과 다리가 있으면, 혹시 사람 같은 로봇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이보그 같은…."

스칼렛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예? 왜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아니라고 하시는지…."

"리얼 핸드는 이미 발표한 대로 세 곳이 협동해서 개발한 제품이에요. 오메가테크, 유나린 박사팀, 미스터 나. 그런데 미스터 나가 사이보그 개발은 안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미스터 나가 그 연구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까?"

"당연하죠. 이 프로젝트를 주도했는데."

"미스터 나는 누구입니까?"

"천재예요. 더 이상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신분 공개는 그분이 거절했거든요."

"과학자도 유명해지면 좋은 게 많을 텐데 왜 거절했을까요? 혹시 천재의 괴팍함?"

스칼렛이 발끈했다.

"괴팍한 사람 아니거든요? 신기한 사람이긴 하지만요.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서 그래요."

***

유나린 박사의 인터뷰가 항상 있는 건 아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인터뷰를 요청해도 되는 건 처음 이틀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기자들이 사전에 약속을 잡아야 인터뷰를 받아주었다.

나강인은 발표 며칠 뒤에 한국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는 먼저 권수연을 만났다.

이라미드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 권수연이 사과했다.

"미안."

"뭐가?"

"아빠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네가 준 잡탕 과자. 아빠가 가져갔어."

"알아."

"우리 아빠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내가 아껴 먹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통째로 가져가? 그리고 사과를 해도 나한테 해야지, 왜 너한테 해?"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건 뭐야?"

"새로운 디저트."

권수연이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어머! 예쁘다. 잡탕 과자하고 완전히 달라. 이건 진짜 뭐야?"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부대가 적진에 고립되어 탈출 가능성이 없을 때, 최후의 만찬으로….

나강인이 얼른 대답했다.

"신경 써서 만든 디저트. 그거 만들려면 손 많이 간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이거 나한테만 주는 거야?"

"아니."

"응? 아니야?"

"응.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