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옥상
알레이나 민이 자랑했다.
"제가 원래 뭐든 회복이 빠른 체질이에요."
의사 김중석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병은 이전 케이스도 수술 성공 후에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줬습니다. 이러면 이젠 정말 회복력 대폭 상승이 그 병의 특징이라고 봐야겠는데요."
알레이나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좋은 거네요?"
"좋은 거죠."
"그럼 저도 이제 연지처럼 벽을 차고 날아다닐 수도 있어요?"
"어? 연지 상태는 어떻게 아셨…."
"드라마에서 봤죠."
"아. 그거 보셨구나."
김중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연지한테는 비밀입니다. 걔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비밀수술 덕분에 살았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까요."
"당연하죠. 알려주더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 알려줘야죠. 그래서 저도 이제 날아다닐 수 있어요?"
"모르죠."
"네?"
"연지는 원래부터 엄청 잘 뛰던 애라서요. 완치되고 나서는 더 빨라져서 벽 차고 날아다니게 된 거라,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저도 무대 위에서는 펄펄 날아다녔거든요?"
"다음 공연이 어떤 모습일지 정말 기대됩니다. 제가 알레이나 씨 팬이거든요."
"한국에서 공연할 때 티켓 보내드릴게요."
"앗! 고맙습니…. 아뇨. 그러다 의심받으면 큰일 납니다. 제가 표 사서 가겠습니다."
***
알레이나가 입원한 VIP 병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정호화 김중석, 손미연, 그리고 손미연과 가까운 간호사 한 명뿐이다. 그 간호사에게는 알레이나가 다른 곳에서 간단한 수술을 받고 이곳에서 쉬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병원에 알레이나가 입원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더 있다. VIP 병실 담당 관리자나 병원장도 모르게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이정호는 그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둘러대고 입단속을 당부했다.
그가 나름대로 관리를 했지만 모든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미국 팝스타가 입원했다는 소문이 느리게나마 퍼졌다.
병원 직원 두 명이 속삭였다.
"진짜 알레이나에요? 그 알레이나 민?"
"어. 너만 알고 있어."
"알레이나가 왜 우리 병원에 온 거래요? 빅쓰리나 빅파이브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정호 과장님하고 알레이나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같이 근무한 친구 사이래. 그래서 여기로 왔대."
"아아. 이정호 과장님이 영입하셨구나."
"큰 병은 아니어서 우리 병원에 왔대."
"무슨 병인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함부로 조회했다가 징계 먹을 일 있니?"
"아. 하긴."
"알레이나가 우리 병원에 있다는 건 진짜 너만 알아야 해. VIP실 환자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면 여러 사람 다쳐. 애인한테도 말하지 마."
"에이. 제가 바보인가요? 당연하죠."
***
기자 고동환에게 선배가 말을 걸었다.
"넌 또 노냐?"
고동환이 마우스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
"놀다뇨. 좋은 기삿거리를 찾아서 인터넷을 뒤지는 중이죠."
"좀 발로 뛰어다니면서 기사를 써라. 클릭으로 월급 받으려고 하지 말고."
"어허. 남현주 사건 특종 기자를 지금 뭐로 보고 그러세요?"
"너한테 그 공사장에 가보라고 한 거 누구냐?"
"형이죠."
"거기 가서, 너 혼자 단독 특종이라도 땄냐?"
"아니죠. 이미 남들이 와 있던데요."
"왜 남들이 먼저 와 있었겠냐? 네가 느리게 갔으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특종 기자?"
고동환이 변명했다.
"아니, 그래도 제가 남들보다 좋은 사진도 찍었고요. 그 초딩하고 인터뷰할 때 중요한 질문도 했고요."
"참 대단한 이 시대의 기자 나셨다? 그치?"
"왜요? 왜 이러는데요? 또 뭐 시키려고요?"
선배 기자가 말했다.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 취재 좀 하러 가라."
고동환이 툴툴댔다.
"제가 이 짬밥에 나이롱 환자 취재나 하겠어요? 그런 건 막내 보내죠?"
"환자가 민수경이야. 배우 민수경."
고동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은 초밥 드실래요? 제가 쏩니다."
"어딜 초밥으로 때우려고."
"점심 특선 말고 스페셜 특선 살게요."
선배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보여주었다.
"새벽에 교통사고가 났어. 큰 사고는 아니야. 받힌 쪽이 민수경이야."
"휀다만 조금 찌그러진 접촉사고네요."
"그런데 민수경이 곧바로 대형 병원 VIP실에 입원했다."
고동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수경이 요즘 형편이 어렵나?"
"그럴 리가 있냐? 지금 나오는 드라마 반응이 꽤 좋잖아."
"근데 왜 나이롱 환자가 됐을까요? 굳이 VIP실까지 쓰면서? 그것도 지금 드라마를 찍고 있는 바쁜 배우가?"
"수상하지?"
"수상하죠. 그런데 이거 우리만 아는 거 아니겠는데요?"
선배 기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우리만 알아. 현장에서는 피해자가 누군지 안 밝혀졌어."
"안 밝혀졌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병원에 민수경이 도착하는 걸 누가 우연히 봤대. 목격자도 확실히 본 건 아닌데, 민수경처럼 생긴 사람이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오더니 자기 발로 VIP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더라. 응급실도 안 거치고."
"어…. 그럼 양쪽 다 민수경이 확실한 건 아니네요?"
선배 기자가 피식 웃었다.
"확실하면 너한테 주겠냐? 내가 가지."
기자가 계속 설명했다.
"정황이 그래. 정황이. 내가 수상해서 그때 사건 기록을 뒤져봤더니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 방금 보여준 그거. 그리고 거기서 119구급차가 갈만한 곳에 그 병원이 있어."
"그 추측이 맞는다고 치고요. 그럼 민수경이 굳이 그 병원을 고른 이유는…."
고동환이 머리를 굴렸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사고 현장에서 가깝고, 구급차를 이용해 현장을 벗어날 수 있고, 빅파이브는 아니라 눈에 덜 뜨이지만 대형 병원이라 신분을 숨기기 좋은 VIP실이 있고, 즉시 입원이 가능해서?"
"다른 이유가 있겠냐? 당연히 그거지."
고동환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건…. 연예인 음주운전일 가능성이 있네요? 하루만 버티면 알코올이 분해돼서 증거가 사라지니까."
"그렇지. 민수경은 교통사고를 당한 쪽이지만, 술을 마셨으면 알코올이 사라질 때까지 어딘가 대피해야지."
"경찰은요?"
"경찰보다 앰뷸런스가 먼저 왔어. 거기다 가해자가 횡설수설하다가 도망치려고 했다더라.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그쪽부터 대응하느라 굳이 피해자를 쫓아가서 음주 측정을 하진 않았나 보더라."
고동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경은 술기운이 다 빠지면 퇴원할 테니까 늦어도 오늘 밤에는 나가겠네요? 빠르면 낮에 튈 테고요.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나가려는 고동환을 선배 기자가 잡았다.
"야. 어딜 기사 소스만 빼먹고 튀려고."
"네?"
"스페셜 초밥은?"
"그러다 민수경이 퇴원하면요? 갔다 와서 사실이면 사줄게요."
"사실이면 초밥 말고 저녁때 참치회에 술 사라."
***
고동환이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면서 투덜댔다.
"그냥 초밥 먹지 굳이 참치회를 찾아. 돈도 나보다 많이 벌면서 말이야."
그가 주차장에 앉아서 민수경의 이름을 검색했다.
"어?"
민수경처럼 생긴 사람이 입원하는 걸 봤다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본 사람도 많지 않고 댓글도 몇 개 없었다.
-민수경이 드라마 한창 촬영 중인데 병원 입원이 말이 되나?
-사진 없으면 구라지.
고동환이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제보받은 게 아니라 이거 보고 나한테 말한 거야? 자기도 인터넷으로 기삿거리를 알아보면서 왜 나를 구박해?"
그걸 근처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와 연결해 생각한 건 선배 기자다. 하지만 그 기자는 다른 취재가 예정되어 있어서 확실하지도 않은 이곳에 올 수가 없었다.
"추측대로 민수경이 음주운전을 한 거면 특종 성과는 우리 둘이 나눠 먹고, 아니면 나만 혼자 헛고생하다 끝나고. 그런 거네?"
고동환이 툴툴댔다.
"이러면 초밥이나 참치회는 그 형이 사야 하는 거 아냐?"
그는 툴툴대면서 병원으로 들어가 VIP실이 있는 병동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VIP실 근처에서 젊은 여자가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여자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데도 몸매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얼굴에는 마스크와 안경을 썼다. 머리에는 야구모자도 하나 썼다.
고동환의 눈이 반짝였다.
"딱 봐도 연예인이네. 이야. 진짜였어."
그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마지막 층에서 멈췄다.
"이 병원은 옥상에 정원이 있지? 거기 간 거네."
고동환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방금 본 여자가 옥상 정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고동환이 그 여자 환자에게 쓱 다가갔다.
알레이나는 얼굴을 가리고 옥상을 산책했다.
‘맑은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기분 좋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고동환이 말을 걸었다.
"민수경 씨. 바쁘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실까요?"
알레이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사람 아닌데요."
"다 알고 왔습니다."
"아니라고요. 나 지금 기분 좋으니까 가세요."
고동환이 상대의 반응을 보려고 조금 강하게 나갔다.
"음주운전 조사를 피하려고 구급차를 이용해서 병원에 위장 입원하신 거죠?"
알레이나가 인상을 쓰며 고동환을 돌아보았다.
"아니라고…."
그녀가 멈칫했다. 고동환의 모습에서 기자 느낌이 났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고동환이 쫓아오며 물었다.
"민수경 씨. 이런 식으로 아니라고 하시면 음주운전을 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운전을 하냐고요. 병실에만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거 다 압니다. 목격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진짜! 아니라고!"
옥상에 있던 환자 몇 명이 다가왔다.
"어이. 거기 뭐하는 겁니까? 그분이 싫다잖아요!"
고동환이 얼른 기자증을 보여주었다.
"기자입니다. 연예인이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고 VIP실에 입원한 의혹이 있습니다."
"어? 그, 그래요?"
"예. 공익을 위해 취재하는 거니까 협조 좀 해주시죠."
환자들이 물러났다.
고동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민수경 씨.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인정하십니까?"
다른 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음주운전이라니! 누가 음주운전이라는 거죠? 당신 어디 기자야! 지금 나한테 누명 씌우러 온 거야? 안 그래도 차에 받혀서 나 지금 열 많이 받았는데 왜 시비를 거냐고!"
고동환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환자복을 입고 목에 보호대를 댄 민수경이 마스크를 벗고 화를 내고 있었다.
"어? 미, 민수경 씨?"
"나 그 교통사고 때문에 목이 아파! 그래서 입원했어. 확실히 검사해서 우리 드라마 촬영 스케줄에 방해 안 되려고 입원했다고! 새벽까지 촬영하고 오던 길에 사고당했는데 얻다 대고 음주운전이래! 연예인한테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고동환이 눈을 굴렸다.
‘음주운전이 아닌가 보다.’
그가 협상을 걸었다.
"한 점 의혹이 없다고 기사 쓰겠습니다."
"의혹이 없다고 쓰는 것조차 의혹이라고!"
"그렇죠. 그냥 ‘민수경. 교통사고 피해자로 입원. 빠른 쾌유를 응원합니다.’ 라고 쓰면…."
"쓰지 말라고!"
"아니, 그래도 아무것도 안 쓰면 오히려 오해가…."
"아무것도 안 쓰면 오해도 안 생겨!"
고동환이 말을 돌리려고 알레이나 쪽으로도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민수경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봐요. 기자 아저씨. 어디서 말을 돌리고 그래요? 함부로 사진 찍은 거 있어요? 스마트폰 좀 보죠?"
"어허. 없습니다. 없…."
민수경이 스마트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고동환은 버텼다.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 민수경이 고동환의 스마트폰을 잡았다. 당황한 고동환이 민수경을 밀었다.
민수경이 밀리다가 알레이나와 살짝 부딪혔다.
알레이나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야!"
알레이나는 최근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시간은 짧았지만 수술규모는 대수술이었다. 놀라운 속도로 회복 중이긴 하지만 이렇게 부딪히면 수술한 곳이 아프다.
"아파…."
문제가 생겼다. 민수경과 부딪힐 때 알레이나의 마스크가 벗겨졌다.
민수경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며 얼른 사과했다.
"미안해요. 저 사람이 밀어서…. 어? 어?"
민수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레이나는 마스크가 벗겨진 걸 깨닫고 얼른 손으로 잡아 다시 썼다.
늦었다. 이미 목격자가 여러 명이다.
민수경이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아, 알레이나 민? 아니, 알레이나가 왜 여기 있어요?"
"어…. 그게…. 하늘 보러?"
옥상에 있던 환자들이 웅성거렸다.
"알레이나 민? 그 미국 팝가수?"
"와. 이 병원에 입원했구나."
"왜 입원했지?"
"어디가 아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