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알레이나
기자 고동환은 너무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진짜 알레이나 민이다!’
고동환이 급히 알레이나를 향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녹음 어플은 옥상에 올라올 때부터 켜놓았다. 그래서 조금 전에 민수경이 스마트폰을 확인하자고 했을 때는 녹음 중인 걸 숨기려고 그녀를 밀기까지 했다.
고동환이 다급히 물었다.
"알레이나 민! 이 병원엔 무슨 일로 입원하셨습니까! 음주운전…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어디가 아프십니까?"
알레이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마스크를 써봤자 의미가 없다.
"큰일 났네. 혼나겠다."
그녀가 마스크를 벗고 변장용 뿔테 안경과 모자도 벗었다.
옥상에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이가 외쳤다.
"엄마. 나 저 누나 TV에서 봤어!"
"진짜 알레이나 민이다."
"왜 미국에 아니라 여기에 있지?"
"저번에 국내에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있었나 봐."
심지어 민수경도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고동환을 밀어내며 말했다.
"알레이나! 팬이에요!"
"고마워요. 저도 민수경 씨 나오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어머. 진짜요?"
"병실에서 봤어요. 여기선 TV를 끼고 살거든요."
고동환이 두 사람 사이로 스마트폰을 다시 들이밀었다.
"알레이나 민! 무슨 이유로 입원하신 겁니까?"
"음…. 기자님 성함이?"
"고동환입니다!"
"앞으로 그 이름은 블랙리스트로 설정할게요. 이제 제 인터뷰에는 초대받지 못할 거예요."
"예? 그게 무슨…."
"가시라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라고."
민수경도 옆에서 말했다.
"맞아! 나한테도 음주운전 누명을 씌우려고 했어! 당신 가! 꺼져버려!"
고동환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공익을 위해서 선의로 한 일이니까 양해를 부탁…. 어, 어디 가십니까!"
더는 취재가 불가능했다. 알레이나와 민수경이 옥상을 벗어나 VIP실로 갔기 때문이다. 고동환이 뒤따라가긴 했지만 VIP실은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VIP 병실 통로 유리문이 닫혔다. 고동환이 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VIP 병실로 사라졌다.
고동환은 녹음은 했어도 사진은 한 장 못 찍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알레이나의 사진을 한 장만 찍었어도 기사의 질이 달라질 텐데…. 아, 이거 진짜 아쉽네."
그가 유리문을 좀 더 두드려보았다.
간호사가 다가와 항의했다.
"이봐요! 병동 유리문을 왜 두드려요? 여기 병원이에요!"
"내가 기자인데요."
"기자도 거기는 못 들어가요!"
고동환은 버텨봤지만 결국 병원 밖으로 쫓겨났다.
"할 수 없지. 이걸로 먼저 특종 기사부터 내자."
그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 자랑했다.
"부장님. 제가 특종을 잡았습니다."
-뭔데?
"알레이나 민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부장이 짜증을 냈다.
-이게 또 어디서 놀다가 헛소리야?
"진짜입니다."
-그게 왜 특종이냐고! 이미 인터넷에 떴어!
"네?"
-SNS와 인터넷 게시판에 알레이나 목격담이 떴다. 이미 소문 다 퍼졌는데 그게 왜 특종이냐?
"아니, 제가 방금 직접 봤는데 어떻게 벌써…."
그가 병원 건물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깨달았다.
"아…. 저 옥상에 있던 사람들이…."
부장이 물었다.
-어? 뭐? 너 지금 그 병원이냐?
"예. 알레이나의 마스크가 벗겨질 때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사진은!
고동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진은 못 찍었…."
-지금 당장 가서 찍어!
"이미 VIP실에 들어가서 찍을 수가 없…."
-그럴 거면 너 거기 왜 갔냐?
"그, 그러게요?"
-알레이나를 보자마자 속보를 냈어야지!
"인터뷰를 따려다가…."
-무조건 인터뷰 따! 못 따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한 거 당장 보내! 특종을 놓쳤으면 속보라도 내야지!
"아, 예. 지금 기사 써서 바로 보내겠습니다."
***
이 병원에는 VIP실이 두 개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통로는 전자식 잠금장치가 설치된 유리문으로 막혀 있어서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
민수경이 알레이나의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머. 옆방에 계셨구나. 간식도 많네요? 난 새벽에 들어와서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뭐 좀 먹을래요?"
"그래도 돼요? 고마워요."
민수경은 궁금한 게 많았다. 그중에 제일 궁금한 건 알레이나가 왜 입원했는지다.
‘진짜 궁금한데 함부로 물어볼 수가 없네. 아 답답해.’
그녀가 일단 대화의 물꼬라도 틀려고 어제 교통사고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제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야간 촬영이 있어서 제가 그냥 제 차 몰고 갔거든요? 우리 로드는 좀 쉬라고 했죠. 그러고 집에 오는데 이상한 사람이 제 차를 박아서…."
***
알레이나가 대형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사진은 없지만 목격자가 여러 명이었다.
기자들이 그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알레이나가 그 병원에 입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입원 환자의 명단을 제가 알 수는 없어요."
-알레이나 민인데 어떻게 모릅니까? 확인이라도 좀 해주시죠.
전화를 받은 직원은 은밀히 퍼지는 소문으로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옥상에서 목격됐다는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하지만 함부로 환자에 관한 걸 인정해서는 안 된다.
"환자에 관한 정보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아무것도 확인해드릴 수 없어요."
병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
AI 전지인이 인터넷에서 그 정보를 찾아내 나강인에게 보고했다.
-광년이가 사고를 쳤습니다.
나강인이 인터넷에 올라온 목격담을 읽어본 후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 광년이가 아니지. 무슨 사고든 칠 줄 알았다."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상황파악부터 하자."
나강인이 이정호 외과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 봤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정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새벽에 연예인 민수경 씨가 입원했습니다.
"그 기사는 봤습니다. 단순 접촉사고인데 드라마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최고의 치료를 받으러 입원한 거라면서요."
-예. 그런데 기자가 연예인의 음주운전 사건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민수경 씨와 알레이나를 착각하는 바람에 그만….
"알레이나가 병실이 아니라 옥상에 있었다던데요."
-알레이나의 수술 후 회복이 워낙 빠릅니다. 유착을 피하려면 좀 움직이는 게 좋아서 옥상에서 산책하던 중이었습니다.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을 때 정체가 드러났으면…. 수습이 가능하겠군요."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지요. 실수로 넘어져서 조금 다쳤고, 그거 치료하는 김에 과로로 지친 몸도 회복할 겸 푹 쉬는 중이라고 둘러대려고 합니다.
"활동도 안 했는데 과로요?"
-새로운 음악 창작을 위해 과로했다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알레이나가 직접 작곡도 합니까?"
-아니요. 그동안은 안 했죠. 이제부터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노력과 열정이 지나쳐서 쓰러진 거죠. 하, 하하.
"확실히 수습해야 합니다.
-당연하죠. 미국 팝스타까지 몰래 쓱싹했다는 게 알려지면 우린 큰일 나니까요. 로버트와 함께 대책을 찾아내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AI 전지인이 투덜댔다.
-광년이 욕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번에는 광년이 잘못은 아니잖아. 대책을 찾는다니까 해결하겠지."
***
로버트와 이정호가 알레이나의 VIP 병실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역시 작곡에 도전한다고 해야겠지?"
"차라리 새로운 공연 기획은 어때?"
"둘 다 한다고 하는 건? 그래서 과로했다고 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믿을까?"
"나도 모르지. 더 좋은 의견 있어?"
몇 가지 의견이 오갔지만 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알레이나가 제안했다.
"차라리 공식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이정호가 물었다.
"그러면 기자들의 관심이 더 몰릴 텐데?"
"그렇겠죠. 대신에 다른 기삿거리가 많으면 제가 왜 입원했는지는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을까요?"
"입원한 이유를 더 궁금해하는 기자도 나오겠지."
"지금 이대로면, 모든 기자가 그것만 궁금해할 걸요? 기삿거리를 분산시키는 게 낫죠."
이정호가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긴 하지. 가만히 있으면 입원 이슈만 더 커지니까. 통원치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알레이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저는 퇴원해서 집에서 다니면 되죠?"
"호텔에서 다녀야지. 그 집은 당분간 금지다."
"광돌이가 옆집에 살아서요?"
"당연하지. 거기 닥터 노네임이 산다는 게 알려지면 안 돼."
알레이나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알았어요.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집 한 채 따로 구할게요. 그래야 통원치료하기 좋잖아요."
"호텔이 싫으면 차라리 그래라."
***
돈만 쓰면 당장 들어가 살 집을 구하는 건 쉽다. 빈집을 구해서 계약하고 바로 입주하면 된다.
알레이나의 아버지인 로버트는 병원 옆 동네의 주거형 오피스텔을 한 채 샀다. 복층 구조에 평수도 제법 넓었다. 빌트인 가전과 가구도 기본적인 건 있었다.
현재 비어 있던 오피스텔이라 매매 후 즉시 입주가 가능했다.
고동환이 병원을 찾아갔다. 그는 VIP 병동 근처 간호스테이션에 찾아가 물었다.
"알레이나는 어때요? 좀 나아지셨나? 아까는 좀 아픈 것 같던데요."
아까 고동환을 쫓아낸 간호사가 지금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알레이나 씨요."
고동환의 표정도 같이 밝아졌다.
"뭔가 말해줄 기분이 되셨나? 내가 익명처리는 확실하게 해드릴 테니까…."
"퇴원하셨는데요."
"어? 네?"
"알레이나 환자분은 퇴원하셨으니까 이제 그만 좀 찾아오세요. 병원 업무에 방해돼요."
"아니…. 아까는 무척 아픈 환자처럼 보였는데…."
"별로 안 아파요. 그냥 넘어져서 타박상 조금 입은 거예요."
"그럼 왜 VIP 병실에…."
"과로도 겹쳤다던데요? 그리고 VIP 병실은 돈만 많으면 건강검진 받을 때도 이용하는 분도 계세요. 어차피 평소에는 비어 있는 병실이고 알레이나 씨는 돈이 많으니까 그냥 편하게 이용하셨겠죠."
간호사 혼자 그렇게 짐작한 건 아니다. 비밀수술에 참여한 손미연이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트렸다.
알레이나는 병원을 조용히 빠져나가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로버트가 말했다.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라. 제대로 된 침대나 TV는 곧 주문할 테니까."
"난 침대 없이 이부자리만 있어도 돼. 근데 기자들은?"
"너에 대한 건 공식 발표는 안 하기로 했다. 대신에 병원에 네가 넘어져서 살짝 다친 것 때문에 입원했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다른 정보가 없을 테니까 기사는 그렇게 나가겠지."
"그럼 이제 내가 공식활동을 시작해서 눈을 돌리면 되겠네?"
"어떤 활동부터 하려고? 작곡이나 공연 발표는 준비가 필요한데."
"전부터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어. 겸사겸사 방송에 출연하려고."
"방송 출연이라. 그것도 좋지. 그런데 어떻게 출연하게?"
"내가 한국 방송계에 인맥이 있잖아. 나한테 맡겨."
알레이나가 이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앗! 언니! 괜찮아요? 뉴스 막 났던데요!
"어. 난 괜찮아. 병원에서 나와서 근처 오피스텔로 옮겼어. 이제부터는 통원치료 받을 거야. 그리고 나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떡볶이 사오라고요?
"아니. 그런 거 말고. 나 너희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
-넹?
"카메오 정도면 충분하니까 기왕이면 오늘 당장."
***
이연지는 조연이라 매번 촬영장에 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촬영이 있었다.
휴식시간에 최진욱 피디가 오전 촬영 결과를 보며 말했다.
"오전은 액션이 없는데도 액션을 찍은 것 같아."
도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배우 셋이 진짜 싸우는 것처럼 연기하니까 그렇지."
"그래도 연지가 있어서 다행이야. 여배우들 기세가 너무 강할 때는 연지가 깍두기처럼 끼어서 좀 풀어주니까."
"내가 그렇게 되도록 대본을 잘 썼지."
"내가 연출을 잘한 거라니까?"
서로 자기 자랑을 하는 두 사람에게 이연지가 다가왔다.
"피디님. 저기요."
최진욱이 활짝 웃었다.
"오! 연지! 왜?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그게요. 제가 아는 언니가 좀 여쭤봐 달라고 해서요."
"응? 뭘?"
"그 언니가 우리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올 수 있는지…."
최진욱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가 도주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작게 속삭였다.
"얘가 연기를 꽤 하고 미래도 기대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벌써 누굴 꽂으려 하는 건 아니지. 어디서 이런 나쁜 걸 배웠을까?"
도주희가 말렸다.
"너무 뭐라 그러지 마. 얘가 뭘 알아서 그러겠어? 그 언니라는 사람이 막무가내로 시켰겠지."
"그래도 따끔하게 말해야지."
"살살해. 살살. 연지는 연기학원이나 기획사 출신이 아니야. 이 바닥 분위기를 잘 모르는 애잖아."
"하긴."
최진욱이 굳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내가 널 좋게 봐서 이야기하는 건데, 조금 뜨자마자 그런 거 청탁하고 그러면 안 돼. 벌써 그러면 남들한테 욕먹어. 너도 더 살아보면 내 말이 이해가 갈 거야."
이연지가 바로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앗! 네! 죄송합니다! 당장 전화해서 피디님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