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39화 (339/411)

339. 무술감독

최진욱 피디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고등학생 신인 배우 이연지가 머리까지 숙이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당장 그 언니한테 전화해서 피디님이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셨다고 확실히 전할게요!"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닌데…."

이연지가 대놓고 미안해하는 걸 보고 최진욱은 마음이 약해졌다.

"연지야. 그 언니라는 사람 말이야. 혹시 일반인인데 방송에 얼굴 한번 나와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런 경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뭘 몰라서 부탁했을 수도 있지.’

이연지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며 대답했다.

"아뇨. 가수인데요."

"어? 가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어요."

"가수 겸 배우라…."

도주희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가수로는 히트곡이 없고 영화는 단역에 출연했겠지. 그래서 부탁하나 보다."

최진욱이 이연지에게 충고했다.

"그 사람이 우리 드라마에 잠깐 나온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아.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돼. 이 바닥이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이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우리 드라마에 나왔다고 그 언니 인생이 바뀔 리 없죠."

"아니, 그렇다고 대놓고 당연하다고 할 것까지야…."

"제가 당장 전화해서 피디님이 따끔하게 충고하셨다고 할게요!"

최진욱이 결국 피식 웃었다.

"너무 매정하게 말하진 마라. 우리나라에 성공한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나도 잘 알아. 그 사람도 방송 출연이 간절했겠지."

"네?"

"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요?"

최진욱은 살짝 당황했다.

"어? 외국인이야?"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분이신데 이민 가셨어요. 그 언니는 미국 사람이에요."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지내요."

최진욱의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잠깐만. 그럼 그 언니라는 사람은, 가수나 배우 활동을 미국에서 한 거야?

"당연하죠."

최진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오는 게 미국 연예계 활동에 무슨 도움이 되지?"

도주희가 이연지에게 물었다.

"그 언니라는 사람, 미국 영화 어디에 나왔어?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영화야?"

이연지가 대답했다.

"웅…. 일단 나이트 스트라이커랑 스파이 셰프?"

도주희가 손뼉을 쳤다.

"어머. 지역 독립영화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네?"

"그쵸."

"잠깐. 출연작 두 편이 알레이나랑 겹치는데? 혹시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알레이나를 알까?"

"네?"

도주희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개인적으로 알긴 어렵겠지."

"언니한테 자기 자신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할 텐데….

"으응? 그게 무슨…."

"그 언니가 철학적으로 고뇌하고 사색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옆에 앉아있던 최진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뭐? 잠깐만."

그가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지야.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야. 혹시 네가 말한 단역 지원자가…. 알레이나 민?"

이연지가 손뼉을 쳤다.

"네. 아! 제가 이름을 말씀 안 드렸네요?"

이연지는 한동안 알레이나가 어디 있는지 숨기려고 남들 앞에서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습관이 조금 남아서 방금도 이름을 말하는 걸 잊었다.

"알레이나 언니 맞아요."

최진욱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알레이나 민? 팝스타에 할리우드 배우인 알레이나 민?"

한국말을 한국인처럼 잘하는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은 국내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네. 알레이나 언니요."

최진욱이 벌떡 일어났다.

"네가 알레이나를 어떻게 알아?"

"우리 아빠랑 알레이나 언니 아빠가 옛날에 미국에서 같이 일했어요."

"아아! 부모님을 통해서 알게 됐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최진욱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알레이나 민이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대?"

"네. 가능하면 카메오 같은 거 하고 싶대요."

최진욱이 두 손을 위로 들었다.

"우리야 대환영이지!"

"네? 방금 안된다고 하셨…."

"돼! 도 작가! 카메오 자리 있지?"

도주희도 흥분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없으면 만들어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레이나인데!"

"역시 도 작가! 그런데 연지야. 알레이나 씨께서는 언제쯤 출연하고 싶다고 하시든?"

"그게요."

"왜? 괜찮아. 말해."

"오늘 되겠냐고…."

"돼! 무조건 돼! 도 작가! 그치?"

"바로 쪽대본 들어간다!"

도주희가 즉시 노트북에 워드프로세서를 띄운 후에 키보드를 두드렸다.

최진욱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연지야. 알레이나가 왜 굳이 우리 드라마에…."

"심심하대요."

"심심하시구나! 그럼 안 심심하게 해드려야지! 도 작가! 오늘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도 종종 나오게 하자!"

"나 대본 빨리 쓰기로 유명한 도주희야! 나한테 맡겨두라고!"

이연지가 물었다.

"피디님. 그럼 언니한테 따끔하게 충고는…."

"그거 하지 마. 하면 안 돼. 지금도 충분히 쪽팔려."

***

사람은 무슨 일이든 마감에 쫓기면 집중력이 올라간다. 원고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쪽대본은 30분 뒤에 나왔다.

도주희가 쪽대본을 보며 감탄했다.

"내가 썼지만 진짜 죽이네. 원래 이야기 흐름을 해치지도 않고 시청자들도 좋아할 3분짜리 상큼한 에피소드야."

"장하다. 도 작가. 해낼 줄 알았다."

최진욱이 대본을 재빨리 확인한 후에 물었다.

"어? 기왕이면 액션을 좀 넣는 게 좋지 않아? 왜 맛만 보여줘?"

"알레이나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사 못 봤어?"

"캬아. 연지야. 봐라. 우리 도 작가가 배우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다. 이 마음 꼭 전해줘."

***

알레이나도 그날 오후에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직도 회복 중이긴 하지만 천천히 걷는 것 정도는 큰 무리가 없다.

도주희는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막 퇴원한 걸 고려해서 일부러 움직임이 없는 에피소드를 썼다.

남현주가 알레이나를 먼저 발견하고 다가갔다.

"어머. 알레이나 민. 반가워요. 남현주예요."

"저도 반가워요. 출연하신 작품 많이 봤어요."

"호호. 저도요. 알레이나의 노래를 좋아해요."

오세나도 다가왔다.

"오세나예요. 저 알죠? 우리 친하게 지내요."

"네. 그래요."

알레이나가 두 사람의 뒤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은하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알레이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살짝 흔들며 인사했다.

신은하가 할 수 없이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여긴 또 왜 와요?"

"어머. 은하 씨는 오늘도 까칠하다."

오세나가 당황한 얼굴로 신은하에게 물었다.

"어? 뭐야? 네가 알레이나 씨를 어떻게 알아?"

"그냥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사이에요."

"왜 몇 번이나 마주치는데!"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김유찬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알레이나 민. 김유찬입니다."

알레이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머! 김유찬 씨! 저 유찬 씨가 나온 영화랑 드라마 다 봤어요!"

"저도 알레이나 씨의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물론 영화도 좋아하고요. 하하하."

오늘은 오후에 액션 촬영이 있다. 나강인이 촬영장에 도착했다가 배우들 사이에서 떠드는 알레이나를 발견했다.

나강인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대책을 세운다더니, 이거였어?"

-역시 광년이입니다.

나강인이 촬영장에 오면 인사하는 사람이 많다. 알레이나와 이야기하던 배우들은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 그쪽을 보았다. 알레이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알레이나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곧바로 활짝 웃으며 손을 위로 번쩍 들어 흔들었다.

나강인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알레이나가 신나서 물었다.

"너 여긴 왜 왔어? 아. 특수분장! 맞아. 그거구나? 맞지?"

"촬영 스케줄이 급할 땐 그것도 하긴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말하는 건데."

그녀는 나강인이 드라마 ‘바보의 사랑’에 참여한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이연지에게 전화해서 출연을 부탁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너는 여기 왜 있냐? 뉴스에 나고 싶어서 일부러 나온 거냐?"

"흐흐. 그것도 있고, 심심해서 나왔어.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

알레이나는 ‘운명의 창’의 무술감독이 누군지 궁금했다. 그동안은 기삿거리가 될만한 행동은 하면 안 돼서 적극적으로 찾아보진 못했다.

그러다 ‘바보의 사랑’을 보고 같은 사람이 액션을 맡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이유 중에는 그 무술감독을 만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알레이나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나한테 여기 안내 좀 해주나?"

"해주겠냐? 나 일하러 왔다."

"나도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는데?"

"그 카메오가 액션은 아니겠지?"

"액션이 살짝 있긴 한데."

"네가 미쳤구나?"

"근데 대본 보면 난 안 움직여. 김유찬 씨만 움직여."

"그럼 됐다. 난 피디님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다."

나강인이 최진욱 피디 쪽으로 걸어갔다.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오세나는 당황했다. 두 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소리로 대화해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낯선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눈치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알레이나 씨. 강인 씨하고 아는 사이에요?"

알레이나가 방긋 웃었다.

"친해요."

"네? 어떻게…."

옆집에 살았다고 말할 순 없다.

"음. 그냥 잘 맞아서?"

신은하가 작은 소리로 툴툴댔다.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김유찬이 나강인을 따라가며 물었다.

"강인 씨. 혹시 알레이나하고 잘 아는 사이에요? 그럼 페넬로페에서 모임 할 때 모시고 오지 그랬어요?"

나강인이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쟤랑 친해지면 피곤해지니까 조심해요."

"네? 혹시 알레이나의 실제 성격은 소문과 다르게 나쁘다든지…."

"착해요."

"그럼 왜…."

"쟤가 꽃을 꽂는 걸 좋아해서."

"네?"

"그런 게 있습니다."

***

오늘은 액션 촬영이 있는 날이다.

나강인이 촬영장 한복판에서 작게 말했다.

"지인아. 시작하자."

AI 전지인이 그의 주변에 홀로그램 영상을 만들었다.

-시나리오에 나오는 그대로 가상 입체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십시오.

AR 렌즈를 통해 사람 형태의 홀로그램들이 땅 위에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강인이 그 홀로그램 한복판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카메라 위치는?"

AI 전지인이 즉시 추천 위치에 카메라 이미지를 여러 개 만들었다. 카메라마다 번호도 따로 붙였다.

각각의 카메라 위에는 큼지막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하나씩 생겼다. 그 스크린에는 그 위치에서 카메라로 찍었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나강인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오른쪽으로 조금 돌렸다. AI 전지인이 그의 손짓을 인식하고 홀로그램 인물 모형들을 대본대로 움직였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1, 2번 카메라는 필수로 배치해야 합니다.

모든 카메라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모형들의 움직임을 각각의 위치에서 보여주었다.

나강인이 그 2D 영상들을 확인하며 말했다.

"일단, 1, 2번은 기본에, 4번과 6번은 살리고…. 음. 겹치는 게 있네?"

-3번과 5번 카메라 영상에 서로의 모습이 들어갑니다.

나강인이 오른손을 가볍게 쥐어 진행을 정지시키고 최진욱과 촬영감독을 불렀다. 그런 후에 액션이 카메라에 어떻게 찍힐지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아예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했다.

"이렇게 전투가 진행될 겁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의 도움을 받아 홀로그램 영상 속 이미지를 스케치북에 그대로 옮겼다.

최진욱이 스케치북의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강인 씨 그림 실력은 정말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요. 웹툰을 하셔도 되겠어요."

"스토리가 약해서요."

"우리에게는 도 작가가 있잖습니까?"

"도 작가님은 이 드라마에 집중하셔야 할 텐데요?"

"하긴 그렇죠."

나강인이 방금 그린 스케치 두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와 여기가 문제입니다. 배우들이 이동하면서 싸울 때 반대편 카메라가 영상에 잡힙니다."

촬영감독이 옆에서 입맛을 다셨다.

"디테일한 설명까지 들었더니 둘 다 포기하기 아까운데요?"

"시간만 충분하면 카메라를 CG로 지우면 되는데, 촬영 후에 방송까지 시간이 워낙 짧잖습니까? 편집할 시간도 빠듯할 테니까 카메라를 하나 뺄까 합니다."

최진욱이 갈등하다가 말했다.

"뭔가 만들어내는 CG라면 몰라도, 이렇게 지우는 CG가 제시간에 안 나오면 돈을 덜 쓴 건 아닌지 반성해야죠. CG 회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든 돈을 뿌리든 영상 속에서 카메라만 지울 테니까 둘 다 가시죠."

"그러면 이번 액션은 카메라 일곱 대로 찍겠습니다."

"여덟 대가 있으니까 한 대는 촬영 현장을 찍으면 되겠군요. 그건 나중에 후기에 쓰게요. 하하."

"그 후기에서 제 얼굴은 빼주시고요."

"물론이죠. 처음 빼보는 것도 아닌데요."

알레이나의 카메오 출연은 이 액션 촬영 이후에 있다. 당장 할 일이 없는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나강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쟤는 특수분장 전문가일 텐데 왜 감독처럼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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