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무술감독 II
이연지가 알레이나를 찾아왔다.
"언니!"
"연지 왔어? 여기 앉아."
"넹!"
이연지가 알레이나의 오른쪽에 앉았다.
"오늘 나 여기 출연할 수 있게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맛있는 거?"
"커피차라도 쏠까?"
"앗! 난 생과일주스가 더 좋은데."
"그것도 챙겨오라고 할…. 아. 내가 한국에는 매니저가 없구나. 그냥 배달시켜야겠다."
"이제 배달앱 막 써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공개 활동도 시작했는데 배달앱을 왜 못 쓰겠어?"
이연지가 실실 웃었다.
"히히. 언니 힘들게 출연시킨 보람이 있다."
"응? 힘들게? 여기서 날 거절할 리 없는데? 엄청 환영하던데?"
"그게요. 처음에는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반대하셨거든요. 근데 언니 이름 말하니까 당장 찬성하시던데요?"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나 알레이나 민이야.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냐?"
"올!"
"근데 연지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넹!"
알레이나가 촬영장을 가리켰다.
나강인이 지정한 자리에 카메라와 조명이 배치되고 배우들도 자리를 잡았다. 나강인은 그 사이에서 배우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쟤는 저기서 뭐하는 거야?"
"네?"
"쟤가 왜…. 어?"
나강인이 가면을 받아서 썼다. 그건 ‘바보의 사랑’의 주인공이 쓰는 눈과 코만 가리는 마스크였다.
알레이나도 이 드라마 1, 2편을 봤기 때문에 그 가면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그녀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저 마스크는…. 아야."
수술한 곳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이연지가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앗. 언니. 안 아픈 척해야 한다면서 왜 그렇게 막 움직여요?"
이연지는 알레이나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수술받았다는 게 비밀이라는 건 안다.
알레이나가 의자에 도로 앉은 채로 툴툴댔다.
"깜짝 놀라서 그랬지. 아니, 어쨌든, 쟤가 왜 저 가면을 써?"
"가면이면, 아저씨요?"
"어."
"그야 당연히…."
이연지가 설명하려다 말고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앗! 지금부터는 조용히 해야 해요. 촬영을 한 번에 끝내야 해서 소리 잘못 내면 혼나요."
촬영이 시작됐다.
김유찬이 나강인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나강인과 손바닥을 마주치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나강인은 카메라 앵글 바깥쪽으로 빠졌다.
남현주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앞에는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촬영이 시작됐다. 김유찬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 아가씨에게 손대면 죽는다."
남현주를 위협하던 세 사람이 돌아섰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넌 뭐야?"
"지나가던 사람이다."
"그럼 그냥 가던 길이나 갔어야지."
거기까지 찍고 최진욱이 외쳤다.
"오케이! 다른 분들은 대기! 선수 교체!"
나강인이 김유찬과 교대했다. 두 사람은 옷도 똑같고 헤어스타일도 같았다. 체형까지 비슷해서 가면을 쓰면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상대역을 맡은 배우 두 명이 나강인을 향해 걸어가며 이죽거렸다.
"괜히 이상한 가면이나 쓰고 끼어드니까."
나강인도 상대를 향해 걸어갔다. 대사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처맞잖아!"
나강인이 어깨만 비틀어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처음에는 빠르게 내지른 주먹은 상대의 몸에 닿을 때는 급격히 느려져 충격을 최소화했다.
주먹이 닿는 지점은 몸에 가려져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다. 일부러 타격 지점만 가려지게 카메라를 배치했다.
그는 상대의 몸을 때리기 직전에 손을 폈다.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이 상대의 몸통에 닿았다.
나강인의 상대의 몸을 쭉 밀었다. 상대가 옆으로 날아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나강인은 상대의 몸에서 손바닥이 떨어지자마자 주먹을 다시 쥐었다. 카메라에는 주먹을 쥔 모습부터 찍혔다.
그 모든 움직임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나강인이 주먹으로 쳐서 상대를 날려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옆으로 날아간 배우는 카메라 앵글 밖에서 두 발로 착지했다. 균형을 잡느라 몸을 몇 번 휘청이고 팔도 휘두르고 뒷걸음질도 쳤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는 즉시 뒷걸음질로 현장에서 좀 더 멀어졌다.
두 번째 배우는 당황한 모습을 연기하며 주춤거렸다. 나강인이 먼저 다가가 그 배우도 날려버렸다. 이번에도 주먹으로 쳐서 날린 것처럼 보였다.
상대는 전문 액션 배우였다. 뒤로 날아간 배우는 카메라 앵글 안에서 바닥에 떨어지며 옆으로 굴렀다. 나강인이 알아서 잘 던졌기 때문에 구르는 연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최진욱이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오케이! 다시 선수 교체!"
나강인이 뒤로 빠지고 김유찬이 들어갔다.
적은 아직 한 명이 남았지만 액션은 이미 끝났다. 적이 겁을 집어먹었다.
"뭐, 뭐야? 이, 씨…."
김유찬이 말했다.
"아가씨 앞에서 욕하지 마라."
"그, 그래야겠죠?"
"꺼져라."
"네, 넵!"
적이 동료들을 버려두고 도망쳤다. 바닥에 구른 배우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가 후다닥 튀었다. 제일 먼저 날아갔던 배우도 다시 돌아와 도망치는 모습을 슬쩍 보여주었다.
알레이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바로 이어서 김유찬과 남현주의 대사가 짧게 오갔다.
거기까지 찍은 후에 최진욱이 외쳤다.
"오케이! 아주 깔끔했어요! 이제 두 사람만 따로 갑시다!"
한 번에 촬영을 끝내는 건 나강인이 맡은 액션뿐이다. 다른 장면을 찍을 때는 평소처럼 한다.
스태프들이 움직였다.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뀌었다.
알레이나는 아직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이연지가 옆에서 말했다.
"언니. 그러다 입에 파리 들어가요."
그녀가 물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니?"
"우리 드라마 액션 촬영이요. 끝내주죠? 저렇게 카메라 여러 대를 써서 한 방에 찍으면 나중에 피디님이 편집하신대요."
"끝내주지. 연습조차 없이 한 방에 촬영이 끝나는 것도 대단하고, 진짜로 치고받는 것처럼 하는 것도 끝내줘. 난 정말로 사람을 팬 줄 알았는데…."
얻어맞은 역할을 한 배우들이 너무 멀쩡했다.
"저게 요즘 유명한 실전 리얼 액션이에요. 오직 아저씨만 할 수 있죠."
알레이나가 이연지를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걸 왜 광돌이가 해? 왜 김유찬 대역을 해?"
"아저씨가 무술감독이니까요."
알레이나도 조금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물어봤을 뿐이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았다.
"쟤가?"
"네."
"무술감독이라고?"
"네."
"그럼 역시, 좀 전에 촬영장소에서 손짓하면서 이야기하던 건…."
"액션을 찍을 때는 아저씨가 배우 동선부터 카메라 배치까지 다 정해요. 액션 파트는 전권을 가지고 있거든요. 나강인표 실전 리얼 액션은 원래 그래요."
이연지가 김유찬과 남현주를 가리켰다.
"근데 아저씨는 액션만 책임져요. 보세요. 다른 장면을 찍을 땐 피디님이 카메라 위치부터 다 바꾸시잖아요."
알레이나가 손뼉을 쳤다.
"아!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액션과 다른 장면이 구도부터 느낌이 다른 거였구나!"
"역시 언니는 배우네요. 그걸 TV에서 봤는데도 딱 아셨네요?"
"내가 좀 잘 하…. 후우. 내가 찾던 무술감독이 광돌이일 줄이야. 바로 옆에 두고 그동안 난 뭐 한 거야."
이연지는 촬영을 하러 갔다.
나강인이 알레이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물었다.
"광년아. 너 진짜 오늘 촬영 꼭 해야겠냐?"
알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강인아!"
"뭐지? 네가 날 그렇게 부를 리가 없는데?"
"에이. 사람을 광돌이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광돌이는 욕이 아니라며?"
"요, 욕 아니다!"
"맞는 거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가 이 드라마의 무술감독이라며?"
"방금 봤잖아."
알레이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운명의 창도 네가 무술감독이야?"
"그랬지."
그녀가 나강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 할리우드 가자."
나강인이 그 손을 쓱 밀어냈다.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이번엔 특수분장이 아니라 액션 감독으로 가자. 내가 소개해줄게! 나 할리우드에 아는 사람 많아!"
알레이나는 할리우드 영화에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만 출연했다. 그녀는 주연급 연기자는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배우보다는 팝스타로 더 유명하다. 그 명성 덕분에 할리우드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같이 가자! 할리우드!"
나강인이 말했다.
"내가 왜?"
"통하니까! 네 액션은 할리우드에서도 확실히 통한다고!"
"할리우드 영화 보면 이미 다들 잘하더라."
"거기서 액션이랑 CG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 알아? 액션 퀄리티가 올라가면 촬영 기간은 또 얼마나 길어지는데. 너한테는 거긴 그냥 블루오션이야. 블록버스터 영화를 골라잡아서 할 수 있어."
"다 좋은데 말이야."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치? 좋지?"
"안 간다고."
"어?"
"할리우드 안 간다고."
"아, 왜!"
"내가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
알레이나는 믿지 않았다.
"아닌 거 같은데!"
"됐으니까 필요하면 국내로 들어오라고 해. 그러면 생각은 해볼 테니까."
"거기서 오겠냐고!"
"안 오면 말고."
알레이나가 씩씩대다가 손을 배에 댔다.
"아. 나 갑자기 아픈 거 같아. 수술이 잘못된 거 같아. 책임져."
"뻥 치지 마라."
케이타이거 증후군 수술은 중간이 없다.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수술이 잘못됐으면 그녀는 이미 죽었다.
"쳇. 안 속네."
최진욱 피디가 다가왔다.
"알레이나 씨. 곧 촬영 들어가야 합니다. 대본은 보셨죠?"
"네. 다 외웠어요."
"그럼 분장부터 하시죠."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수술 전에도 그가 해준 변장 덕분에 놀러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잘 안다.
"난 강인이가 해줄 거예요."
최진욱은 아까 나강인이 촬영장에 도착해서 알레이나와 잠깐 대화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 두 분이 아는 사이십니까?"
"당연…."
나강인이 얼른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냥 오다가다 몇 번 본 것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은하 씨도 아는 사이라던데, 알레이나 씨가 한국 연예계에 인맥이 많으십니다? 하하하. 그럼 분장은…."
나강인이 말했다.
"제가 해야죠. 남한테 맡겨두기 찜찜해서."
나강인은 알레이나를 분장팀이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녀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기 온 건 기자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지? 그런데 나랑 친하다고 말하면 될까? 안 될까?"
"안되는구나."
"근데 왜 자꾸 그래?"
"깜빡했어."
"이 드라마 제목이 뭔지 아냐?"
"바보의 사랑."
"너한테 딱 맞는 제목이지?"
"응? 어느 부분에서?"
"설마 사랑이겠냐?"
"나 바보 아니다!"
***
촬영장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좀 더 활발했다.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며 말했다.
"알레이나가 카메오로 출연한대."
"피디님 섭외력 쩌네."
"피디님이 아니라 연지 통해서 된 거라는데?"
"쟤? 신인에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아버지끼리 아는 사이래."
배우들도 수군거렸다.
"알레이나가 한국에 들어온 지 꽤 됐는데도 방송에 안 나와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공식활동 시작인가?"
"활동을 왜 우리 드라마에서 시작할까? 아무리 아빠끼리 아는 사이라고 해도…."
"우리 드라마가 그만큼 명품이라는 거지. 알레이나가 고를 정도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냥 우리 드라마가 찍자마자 방송하기 때문 아닐까? 쪽대본 추가된 거 보니까 오늘 찍은 걸 이번 주 방송에 바로 내보내겠던데?"
"아. 그래서인가 보다."
***
알레이나가 촬영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스태프나 배우를 통해 언론사 몇 곳에도 전해졌다.
기자 고동환에게 부장이 말했다.
"야. 너 빨리 바보의 사랑 촬영 현장에 가봐. 알레이나가 떴다."
"네? 거기에 떠요? 왜요?"
"뭐? 왜요? 그건 네가 가서 알아내야지! 일단은 카메오로 출연하는 분위기라더라."
"그럴 리가 없는데요. 알레이나는 환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중얼거릴 시간에 가서 확인하라고!"
***
알레이나가 출연하는 장면의 촬영이 빠르게 준비됐다.
그녀의 현재 상태로는 액션을 찍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차분하게 움직이는 연기를 원했다.
도주희 작가는 욕심을 조금 부렸다. 그녀는 알레이나가 아니라 김유찬이 그녀의 앞에 나타날 때 액션을 보여주는 쪽대본을 썼다.
AI 전지인이 쪽대본의 상황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했다. 나강인이 카메라의 위치와 배우들의 동선을 확인하며 말했다.
"간단한 액션이니까 카메라는 세 대면 충분하겠네."
알레이나가 옆에서 물었다.
"그런 게 그냥 딱 보면 다 계산이 돼? 어떻게 하는 거야?"
나강인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알레이나와 홀로그램 가상 인물이 겹쳐 보였다.
"야. 방해하지 말고 비켜."
"할리우드 사람들한테 실전 리얼 액션 이야기를 하려면 나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서 옆에서 물어보는 거야."
"너 떡 좋아하지?"
"응?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렇게 김칫국부터 마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