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세트
이동식 지휘통제 차량은 나강인의 말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네? 그냥 가시다니요?"
"지금 난리가 났는데 가시면 저희는 감당이 안 됩니다."
"가셔야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지금 이 사건보다 중요하진 않을 겁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인질 다 구출했으면 제가 할 일은 끝난 듯한데요."
"아니, 그렇지만…."
"제가 테러리스트 조사를 맡을 것도 아니고, 구출된 분들을 케어할 것도 아니니까요."
"어…. 하지만 언론에는…."
나강인은 오르카 패거리를 잡을 때 드래곤 헬멧을 쓰고 싸웠다.
"언론에 얼굴 깔 거면 헬멧을 왜 썼겠습니까?"
"아…. 그건 그렇죠."
나강인을 따라서 들어온 박순기가 말했다.
"나 사범님의 정보는 저희가 평소처럼 덮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입니다. 사건을 해결하실 때마다 노출 위험이 커지거든요. 게다가 이번에는 워낙 화려하게 하셔서…."
"그러니까 이런 일에 부르지 좀 마요."
박순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냥 휘말리시는 경우도 많은 데다가, 이번처럼 나 사범님밖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탁을…."
"직접 해결할 수 있게 더 훈련받아야겠네. 순기 씨. 이번 주말에 봅시다. 단계를 높여보죠."
박순기가 공손히 말했다.
"나 사범님. 살려주세요."
***
나강인은 전투복을 벗고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생수병의 물을 손에 조금 부어 헤어스타일도 살짝 바꾸고 위장용 안경도 썼다. 그런 후에 장비를 가방에 넣고 근처에 세워둔 차로 이동했다.
기자들은 대부분 빌딩 앞에 모여서 사람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민수경이 기자들의 어그로를 잘 끌어주고 있습니다. 조용히 빠져나갈 루트가 많습니다. 편하게 고르십시오.
배우 민수경 덕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가 있는 곳까지 가는 건 쉬웠다.
그는 장비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의 시동을 걸기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철인기공 이태성 본부장이었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왜?"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태성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젠 날개까지 만든 겁니까!
"왜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내에 있는 군과 경찰 장비 중에 우리 회사가 모르는 건 거의 없습니다. 개인이 비행 가능한 날개가 있다면, 아무리 기밀 장비라도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국내에서 우리 회사가 모르게 그 날개를 만들 수 있는 분은 나 팀장님뿐이죠.
"음…."
이태성이 확신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거기다 테러리스트 집단에 혼자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팀장님뿐이고요. 정보가 이렇게 많은데 못 알아볼 리가 있겠습니까?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그러면 알아본 사람이 더 있겠군요."
-아마도요?
"어쩔 수 없지요. 그거 확인하려고 전화하셨습니까?"
이태성이 신나서 말했다.
-우리 회사가 그 날개도 만들고 싶습니다!
"그건 만들어봤자 일반인은 조종 못 합니다."
-네?
"컨트롤이 어렵고 안정성은 떨어집니다. 민간에 레저용으로 보급하면 사망자가 속출할 겁니다.
-아…. 방법이 없습니까?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2082년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비행 보조 시스템을 장착하면, 지구연합군 강습사단 병사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이 쓰려면 고성능 비행 보조 시스템이 추가되어야 하는데요."
-지금 세상에는 그 장비가 없습니다.
"그게 없습니다."
이태성이 물었다.
-그럼 그것도 나 팀장님이 개발하면 되잖습니까? 각종 공학 전문가에 해커도 잘 잡으시니까 충분히….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요. 굳이 만들 생각도 없고요."
이태성은 미련을 남았다.
"나 팀장님은 진짜 날개처럼 자유자재로 쓰던데, 다른 사람도 훈련을 받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강인의 경우는 비행 보조 시스템의 역할을 AI 전지인이 처리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신체삽입형 전투지원 AI가 없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정도의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이 열심히 연습하면 되긴 되는데, 그런 사람 한 명이 익숙해지는 동안 일반인 도전자 열 명은 추락해서 죽을 겁니다. 너무 위험하니까 포기하시죠."
-아…. 저도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진짜 아쉽습니다.
***
스칼렛은 CNN 속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TV에서는 금속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며 싸우는 사람이 나왔다.
그녀가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제시카. 저런 개인용 비행 장비를 본 적 있어?"
그녀의 친구이면서 비서인 제시카도 놀란 눈으로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훨씬 더 크고 둔한 디자인의 날개라면 몇 번 봤지만…."
"저 날개는 진짜 날렵하잖아."
"그러게. 직접 날아다니는 걸 못 봤다면 콘셉트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아니면 영화 CG라고 생각했든지."
"어떻게 저런 멋진 걸 만들었을까?"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아볼까?"
"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누구?"
"누구겠어? 한 명밖에 없지."
스칼렛이 국제전화를 걸었다.
***
이태성과의 통화를 마친 후에 나강인이 차의 시동을 걸려고 했다.
그런데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이었다.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날개 강인 씨가 만든 거죠?
"지금 미국에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 뉴스를 어쩌다 봤지?"
-CNN에 속보가 떴어요.
나강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CNN이 왜 한국에서 일어난 인질 사건을 미국에 속보로 내보내요?"
-인질 사건이라서 뉴스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날개 달고 날아다니는 특수부대가 나타났으니까 속보가 떴죠!
"역시 윙슈트를 썼어야 했어."
-그 날개의 이름이 윙슈트에요?
"아니요. 기존에 파는 윙슈트는 작전시간 안에 빌릴 수가 없어서, 최근에 시험 삼아 만든 걸 썼습니다."
-역시 직접 만들었을 줄 알았어. 그 날개는 이름이 뭔데요?
"드래곤 윙입니다."
-어? 설마 드래곤 플레이트랑….
"세트 아이템이죠."
-대박! 세트 아이템이 있었어요? 드래곤 윙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 무슨 기술을 썼어요?
"날개의 베이스는 드래곤 플레이트 기술이고, 거기에 인공 근육을 써서 날개의 움직임을 제어했습니다.
스칼렛은 살짝 당황했다.
-네? 인공 근육이요?
"유나린 박사님이 샘플로 준 게 좀 있어서 썼죠."
-그럼 날개 제어 신호는 혹시….
"오메가테크에서 신경 신호 전달 장치를 테스트하라고 좀 줬잖아요. 그걸 썼습니다."
-어머! 그러니까 드래곤 윙에 우리 기술도 들어간 거죠? 와아! 인공 근육 기반의 의수를 만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새로운 제품이 나와요? 다음 단계는 당연히 의족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날개가 튀어나오네요?
"날개는 그냥 시험 삼아 만들어본 겁니다."
-엔진은요? 그 날개에 엔진도 네 개나 달았던데!
"RC 모형비행기용 가스터빈 엔진입니다."
-네?
"민간에서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것 중엔 그게 제일 적당해서요."
-잠깐만요. 양산품이라고 보기엔 불꽃이 너무 많이 나오던데요? 출력도 높고요.
"당연히 개조해서 출력을 강제로 높였죠. 대신에 내구성은 포기한 1회용 엔진이 됐지만."
스칼렛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회사에서 소형 제트엔진 개발한 거 있는데!
"음? 소형 엔진을 어디 쓰려고요?"
-당연히 소형 미사일용이죠! 출력이 장난 아니에요!
"미사일용이면 가격은 비싸고 연료는 많이 먹겠군요."
-세팅을 바꾸면 되죠! 출력을 뉴스에서 본 수준으로 낮추면 연료는 덜 먹을 거예요. 가격은 서비스로 몇 개 줄 테니까 공짜!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칼렛이 신나서 자랑했다.
-우리 엔진은 1회용이 아니에요. 출력을 낮추면 여러 번 비행할 수 있어요.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요원님! 이건 받으셔야 합니다! 뭘 고민하십니까? 공짜라는데! 오늘 한 번 쓰고 날려 먹은 엔진 네 개 가격이 이천만 원입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엔진값은 정부에 청구할 거야."
-이번엔 그렇지만 다음엔 어쩌시려고요? 현재 상태로는 한 번 비행할 때마다 이천만 원이 날아갑니다!
나강인이 스칼렛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나서 엔진을 공짜로 준다는 겁니까?"
-로망이잖아요! 로망! 나도 기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에서 사격하는 최종병기 엔젤이 되고 싶어요!
"네?"
흥분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이유를 추가했다.
-덤으로 우리 엔진 간접 광고도 되고!
"미사일 엔진을 광고해서 뭐하게요? 개인이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회사 이름도 좀 알리는 효과도 있을 거고요. 그러니까 드래곤 윙에 우리 엔진을 써줘요!
"광고 효과를 보려면 이번 같은 사건이 또 생겨야 할 텐데?"
-에잇! 선물이니까 그냥 받아요! 전투에 안 쓸 거면 그냥 비행하는 데라도 써요!
***
경찰이 용산 15층 건물에 진입해 오르카 조직원을 모두 체포했다.
나강인은 건물을 나오기 전에 폭발물 처리반과 함께 부비트랩을 해체했다. 해체하는 모습을 몇 번 보여주고 실습까지 도와준 덕분에, 남은 폭탄은 처리반이 쉽게 해체할 수 있었다.
오르카 일당이 건물을 점령할 때 직원 두 명이 총상을 입었다. 민간인 피해는 그 두 명만 입었다.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한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상황을 브리핑했다.
"총상을 입은 두 분은 헬기로 병원에 이송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두 분 다 수술을 빨리 받은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기자가 질문했다.
"인터넷 영상을 보면 그 두 분의 부상이 상당히 심하던데요. 제가 알아본 응급의학 전문가는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협상으로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구출 작전을 한 건, 그 두 분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구출에 성공해서 살렸지요."
기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나왔다. 완벽하게 성공한 구출 작전이라 분위기가 밝았다.
다른 기자가 물었다.
"그럼 그 빠른 구출 작전은 누가 결정한 겁니다."
"현장에서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 보고했고, 제가 주관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즉시 승인했습니다."
"장관님이 승인하신 겁니까?"
"최종 결정은 제가 했습니다."
"혹시 반대는 없었습니까?"
"이견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만."
김석명과 같은 당 국회의원이 격렬히 반대했었다.
"총상을 입은 사람들부터 살려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했습니다."
기자들이 진짜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하늘을 날아서 14층에 들어가 싸운 사람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특수작전에 참여한 요원의 신분은 대외비입니다."
장관은 나강인이 민간인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 민간에는 민영희처럼 프리랜서로 정부 일을 가끔 맡는 사람이 있다. 민영희는 정부에 고용될 때는 요원이라고 불린다.
장관이 생각했다.
‘그 사람과 정식으로 계약하거나 고용한 건 아니지만, 본인이 덮기를 원한다니까 요원이라고 해도 괜찮겠지.’
기자들도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해결한 다른 사건에서도 특수요원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원지 사건 때의 그 요원과 오늘 본 요원이 같은 사람입니까? 헬멧 모양이 똑같던데요."
"말씀드릴 수 없…."
"대답하실 수 없다는 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어….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
***
기사는 그 두 요원이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나갔다.
양쪽 사건에서 공개된 사진을 분석해 두 사람의 체형이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석 기사도 여러 개 나왔다.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그 두 사건을 다 해결했다고 이해했다.
***
나강인은 집으로 돌아가 간단히 씻고 옷도 갈아입은 후에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드라마 ‘바보의 사랑’ 촬영장은 너무 바빠서 최진욱 피디는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할 시간이 없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모두 정신없이 바쁜 건 아니다. 잠깐 짬이 나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용산 인질구출 작전 기사나 게시글을 보았다.
촬영 현장에 그 사건 이야기가 조금 퍼지긴 했지만, 대부분은 일하느라 바빠서 신경 뜰 틈이 없었다.
출연배우 중 일부는 촬영이 없을 때도 대본을 계속 보며 감을 잡았다. 그동안의 강행군에 지쳐 뻗어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시간에 기사를 찾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출연 분량이 제일 많은 김유찬이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쉬고 있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어. 강인 씨. 바쁜 일 있다더니요."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그럼 오늘 예정된 액션은 오늘 안에 찍을 수 있겠네요?"
"그렇죠."
"최 피디님이 좋아하시겠네."
신은하는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강인이 신은하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나강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냐?"
"총 맞은 거 아니지?"
"맞았겠냐?"
"혼자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좋냐?"
"그게 나라고 확신해?"
"응."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알았냐?"
"나는 강인 오빠의 모든 걸 알고 있거든."
AI 전지인이 말했다.
-뻥 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