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촬영 현장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안다고?"
나강인은 2021년까지의 과거나 2082년의 세계가 기억나지 않는다.
신은하는 당당했다.
"내가 강인 오빠를 쫌 알거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원래 주제 파악이라는 게 어렵잖아."
"그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야."
나강인이 촬영장을 보았다. 드라마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기는 문제 생긴 건 없지?"
"강인 오빠가 사라져서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사람들이 엄청 바빠졌지. 그런데 뭐 어쩌겠어. 어떻게든 해야지."
"내가 왜 사라졌는지 이야기한 건 아니지?"
"당연히 안 했지. 나 바보 아니다."
"응?"
그건 알레이나가 자주 하던 말이다.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레이나는?"
그녀가 인상을 썼다.
"왜 알레이나부터 찾는데?"
"너부터 찾아왔는데?"
"어? 그야 그렇지. 그래도…."
"바보 이야기하니까 알레이나가 생각나서."
"백치미 이야기야?"
"아니. 그냥 바보."
"알레이나는 아까 집에 갔어. 액션만 뒤로 미루고 다른 촬영 스케줄은 당겼잖아. 그래서 먼저 찍고 갔어."
나강인이 걱정했다.
"촬영하다가 쓰러지진 않았고?"
신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멀쩡하던데? 체력도 좋아 보이고. 왜? 알레이나도 액션을 시키게?"
"왜 그렇게 생각하냐?"
"알레이나가 자기도 실전 리얼 액션을 찍고 싶다고 엄청 말했거든."
알레이나는 최근에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회복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긴 하지만, 그 병의 전문가인 이정호나 로버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병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게 많기 때문이다.
나강인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액션은 아직 무리지."
"무리인 걸 강인 오빠가 어떻게 알아?"
"너 오늘 왜 이렇게 파고들지? 마음에 안 드는 거 있냐?"
"있지!"
그녀가 툴툴댔다.
"위험한 일 좀 하지 말라고. 인질구출 같은 건 방송에 나온 특수부대에 맡겨도 됐잖아."
"그럴 시간이 없었어. 빨리 구출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 다 죽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으응?"
"놈들이 폭탄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 그걸 다 터트렸으면 큰일 날 뻔했지. 그러니까 구박 그만해."
"아니, 잠깐. 그런 위험한 곳에 혼자 들어간 거야? 내가 진짜 못 산다"
"네가 왜…."
"닥쳐!"
***
최진욱이 촬영을 하나 마치고 나강인에게 달려왔다.
"으하하하! 강인 씨. 늦지 않게 오셨군요!"
"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요."
최진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이제 액션 촬영에 들어가면 스케줄은 안 밀리겠습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지금 세팅된 게 있으니까 하나만 더 찍고요. 그런데…."
최진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급하게 가셔서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요. 장소 협찬이랑 군대 장비 지원받기로 한 거요. 그거 어디까지 가능한 건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혹시 장비 지원으로 군 수송헬기 말고 공격헬기도 될까요? 그게 있으면 진짜 멋진 그림이 나올 텐데요."
"공격헬기가 드라마에 나와도 되는 장비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국방부에 먼저 접촉한 게 아니라, 아는 사람 통해서 지원 이야기를 들은 거라서요."
"아…."
"그쪽에서 먼저 협찬하겠다고 제안한 거니까, 그런 추가 옵션은 피디님이 국방부 홍보담당자한테 받아내 보시죠."
거짓말은 아니다. 나강인이 구출 작전에 참여해주면 시설과 장비를 적극적으로 협찬하겠다는 건 박순기가 먼저 제안했다.
"그렇군요. 네. 제가 국방부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공격헬기를 따내겠습니다."
***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은 용산 15층 빌딩에서 구출된 후에, 그 건물 앞에 모여 있던 기자들 앞에서 연설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자들은 김석명보다는 배우 민수경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김석명은 수색대 출신 개그맨보다도 관심을 덜 받았다.
그나마 관심을 보인 기자는 김석명의 신경을 건드렸다.
"구출된 후에 그 요원에게 화를 많이 내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허. 그거 오해입니다."
그는 그 기자 때문에 결국 인터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다.
김석명이 그의 집무실로 돌아와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옆으로 쓸어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 도대체 뭐야!"
보좌관이 옆에서 말렸다.
"의원님. 고정하십시오."
"야. 그 새끼 소속이랑 관등성명 당장 알아내!"
"그 기자 말입니까?"
"날개 달고 쳐들어온 그 새끼 말이야!"
보좌관이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 요원에 관해서는 이미 전화를 돌려봤습니다만, 대외비라서 자기도 모른다고…."
"내 이름을 댔는데도 그렇게 나와? 모르면 알아내야지! 모르겠다고 한 그 새끼는 또 소속이 어디야!"
"평소에 정보 주던 거기서…."
"정보원이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나!"
김석명이 씩씩대며 소파에 앉았다.
"날개 달린 그 새끼. 잘라버려야 하는데 소속을 모르잖아."
보좌관이 물이 담긴 유리컵을 김석명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의원님. 그래도 우리를 구해준 사람인데 왜 그렇게까지…."
김석명이 물을 벌컥 마신 후에 말했다.
"구해줘? 맞아. 구해줬지."
"예. 덕분에 저도 살았…."
"근데 그 새끼가 나만 구해준 건 아니잖아. 거기 있던 사람을 다 구해줬잖아."
"맞습니다. 그러니까 관대하게 넘어가셔도…."
김석명이 유리컵을 탁자에 세게 내려놓았다. 컵에 남은 물이 탁자 위로 튀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구해주기만 했는데, 나한테는 어떻게 했어? 내 권위를 깔아뭉갰잖아!"
"그거야, 인질 사이에 적이 숨어 있어서 그놈들을…."
김석명이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뭐? 이 새끼가 지금 누구 편이야?"
보좌관이 얼른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야. 박 보좌관. 정치인이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증거…."
김석명이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없어 보이는 거야! 비웃음당하고, 쭈그리가 되고, 무기력해 보이는 거라고! 그럴 때마다 유권자들의 표가 왕창 떨어져 나가! 경쟁자들은 만만하게 보고 덤빈다고!"
"아…."
"나한테 잘 보이려던 초선들도 내가 힘이 없어 보이면 다른 힘 세 보이는 놈을 찾아가겠지!"
"그야…."
김석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새끼가,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나를 깔아뭉갰잖아!"
먼저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알리려고 나선 건 김석명이다. 그는 그때 나강인의 경례를 받아내 자기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알리고, 그 권위를 이용해 그곳의 최고 권력자가 되려고 했다.
"씨발. 내가 사람들의 대표가 돼서 이끌다가 밖으로 나오면 그림이 얼마나 좋은데, 선거 때마다 써먹을 수 있는데."
나강인이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그 좋은 기회를 망치고 날 아예 쭈그리로 만들어? 내가 그 새끼 가만 안 둔다."
김석명이 보좌관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러니까 그 새끼 당장 찾아내. 누군지 알아내라고!"
***
드라마 ‘바보의 사랑’ 현장에서는 아까 찍으려다 뒤로 미뤄뒀던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나강인은 AI 전지인의 도움을 받아 배우들의 동선을 짜고 카메라들을 배치했다.
나강인은 액션 파트의 전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촬영 결과가 드라마의 선장인 최진욱이 보기에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다시 찍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의 도움을 받아 촬영하는 액션은 최진욱이 기존에 봤던 어떤 액션보다도 실감이 났다.
게다가 최진욱은 나강인표 실전 리얼 액션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냥 봐도 좋지만, 여러 대의 카메라에 나눠 찍힌 걸 최진욱이 편집으로 조합하면 영상이 더 좋아졌다.
그날 액션 촬영은 특별한 문제 없이 잘 끝났다.
최진욱이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역시 나강인표 실전 리얼 액션은 최고입니다. 하하하."
그날 촬영이 모두 끝난 후에 남현주가 나강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 감독님. 저 내일은 오전에 쉬는데 나 감독님도 내일 오전엔 촬영이 없죠? 오늘 밤에 차 한잔 어때요?"
이 드라마는 강행군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래도 술을 마실 사람은 마셨다.
하지만 남현주처럼 배역 분량 경쟁이 심한 주연급이나 주요 조연들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만 안 먹는 게 아니다. 야식도 망하는 지름길이다. 남현주는 야식을 먹고 팅팅 부은 얼굴로 신은하나 오세나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 같은 때는 허브티 같은 차가 부담이 없었다. 허브티는 카페인이 없고 취하지도 않고 붓지도 않는다.
그래서 남현주는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연기에 관해서 물어볼 게 많거든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연기는 현주 씨가 더 잘할 텐데요?"
"어머. 꼭 그런 건 아니죠. 나 감독님의 복경산 장군 연기가 얼마나 좋았는데요. 서로 결이 다른 연기를 토론하자는 거죠."
신은하가 쓱 끼어들었다.
"어머어. 현주 언니. 강인 오빠 오늘 많이 피곤할 텐데 시간 빼앗지 말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신은하는 나강인이 오늘 용산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오르카 조직과 전투를 치렀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걸 남현주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다.
"얼굴 딱 보면 알죠. 강인 오빠. 나 집에까지 좀 태워줘요."
남현주가 인상을 썼다.
"네 차는 어디 가고?"
"보냈죠. 우리 로드가 고생하는 거 같아서요. 나야 강인 오빠하고 같은 차 타고 가면 되니까."
"네가 나 감독님하고 같은 차를 왜 타는데?"
"우리 같은 동네 살잖아요. 몰랐나 봐요?"
"너희 집 거기 아니지 않아?"
신은하가 독립해서 사는 집은 다른 동네에 있다.
"거기 맞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쭉 산 우리 동네인데요? 요즘은 부모님 집에서 살아요."
"내가 알기로는 넌…."
이보라가 끼어들었다.
"나도 집에 데려다주나?"
신은하가 말했다.
"넌 네 차 있잖아."
"없어. 촬영이 늦어서 보냈어."
"아니, 왜 그걸…."
신은하도 차를 먼저 보냈다 그녀가 물었다.
"너도냐?"
"너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결국 나강인이 신은하와 이보라를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에 이보라가 말했다.
"오늘 그거 본 사람?"
신은하가 물었다.
"그거라고만 하면 어떻게 아니?"
"저녁 먹을 때부터 다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몰라? 기계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면서 총을 쏘는 히어로 말이야."
"넌 오늘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도 봤나 보다?"
이보라는 신은하가 거는 싸움을 재깍 받았다.
"이게 왜 또 시비지? 넌 배역 비중이 나보다 높아서 바쁘냐? 좋겠다?"
"응. 좋아."
"야!"
***
남현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요즘은 주로 본가에서 지낸다.
고등학생 쌍둥이 동생들이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두다다다!"
한 녀석은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고 몸을 비틀었다.
"피했다!"
"드래곤 나이트는 피하지 않아! 모든 공격을 튕겨낸다!"
"고속비행 무시하냐? 비행형 히어로는 뭐든 잘 피하는 게 국룰이야! 미사일도 피하고, 대공포도 피하고!"
남현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그 꼴을 보고 물었다.
"너희들 지금 뭐 하냐? 드래곤 나이트는 뭐고 비행형 히어로가 뭔데?"
"어? 누나 몰라?"
"전혀."
"어떻게 이걸 모를 수 있어?"
남현주는 오늘 바빴다.
"나 조금 전까지 쉴 틈도 없이 드라마 찍다가 왔어. 밥 먹는 시간도 아껴서 촬영 준비했다고. 나 주연배우잖아."
평소라면 아무리 강행군이라도 촬영 사이에 쉴 틈은 있었다. 밥 정도는 여유 있게 먹을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뒤져볼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신은하와 오세나가 그녀의 배역을 잡아먹으려고 매섭게 연기했다.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려면 남현주도 시간 날 때마다 대본을 보며 다음 촬영을 준비해야 한다.
그녀는 촬영이 끝나고 오는 길에는 너무 피곤해서 차에서 기절한 것처럼 잤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사건을 전혀 듣지 못했다.
쌍둥이들이 얼른 태블릿PC를 하나씩 가져와 기사와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봐."
태블릿PC에 용 스타일 헬멧을 쓴 사람이 날개를 펼친 채로 건물에 기관총을 갈기는 영상이 나왔다.
"영화야? 액션을 표현하는데 다큐 스타일로 멀리서 찍었네?"
14층에서 싸우는 영상도 나왔다.
"CG 되게 잘했다. 근데 이 퀄리티면 가까이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왜 이랬을까? CG 만들 예산이 모자랐나?"
"누나. 무슨 소리야? 이거 영화 아니야."
"그럼 이거 드라마야? 이야아. 역시 미국 드라마는 스케일이 다르네."
"이거 마포에서 찍은 거거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싸우는 드라마가 있어? 난 왜 몰랐지?"
"오늘 찍었으니까 모르겠지."
"응? 오늘 찍은 게 어떻게 벌써 돌아다녀?"
"기자가 인터넷에 생중계했으니까."
"장난해? 드라마에 무슨 생중계가 있다고…. 어?"
영상을 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영화나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좀 있었다. 영상에서 다큐멘터리 느낌이 났다.
게다가 실내에서 찍은 영상이 없었다.
"설마 이거,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야?"
동생들이 얼른 대답했다.
"리얼이야."
"오늘 있었던 실제 사건을 기자가 현장에서 찍은 거야."
남현주가 태블릿PC를 두 손으로 잡았다.
"대박! 이거 진짜였어? 진짜 오늘 있었던 사건이야?"
쌍둥이가 다른 태블릿PC에 띄운 기사를 보여주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사건이야. 건물에 폭탄도 설치됐고 사람들은 14층에 갇혀 있었대. 그래서 특수부대가 공중 기동 슈트로 하늘을 날아서 14층을 쳤어."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공중 기동 슈트라는 거, 진짜 끝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