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임무
나강인은 처음 이곳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현재 기억은 동네 교차로에서 고장으로 깜빡이는 신호등을 본 것부터 시작됐다.
AI 전지인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 메모리에 저장된 정보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때 고장 난 신호등을 무시하고 교차로를 지나가려던 차 두 대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때 AI 전지인이 야전 응급 수술 스킬을 처음 사용했다.
그때 그가 입었던 옷에는 ‘지구연합’과 ‘전략 특수군’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는 그때부터 한동안 차동석이 사장인 피시방에서 지냈다. 거기서 알바를 하면서 밥도 먹고, 그곳에 있는 컴퓨터로 정보도 수집했다.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인 밥차 일도 거기서 받았다.
그는 요즘도 그곳을 자주 이용한다. 이제는 신은하와 이보라, 알레이나까지 그 피시방 단골이 됐다.
피시방 사장 차동석은 한참 전부터 그곳에 오지 않았다. 대신에 차동석의 조카인 차은서가 피시방을 대신 관리했다.
차은서는 드라마 ‘바보의 사랑’에 대사는 거의 없지만 얼굴은 자주 나오는 단역으로 출연한다.
나강인이 합수부 형사에게 물었다.
"설마 차동석 사장님이 차 이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형사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참…."
"차 사장님 얼굴은 몽타주하고 다른데요?"
"저희가 확인해봤는데요. 차동석 씨가 변장하면 말입니다. 몽타주의 얼굴이 될 수도 있더군요."
AI 전지인이 즉시 차동석의 사진과 차 이사의 몽타주를 홀로그램으로 허공에 띄웠다. 그 상태에서 차동석의 얼굴 사진에 여러 가지 변장 효과를 더했다. 다양하게 변장한 얼굴이 주르륵 지나가다가, 갑자기 몽타주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차동석은 차 이사의 몽타주처럼 변장 가능합니다.
나강인이 합수부 형사에게 물었다.
"차 사장님이 조사 대상이 된 이유는요?"
"알려주신 명단의 해커 중에 예전에 차동석 씨와 일했던 놈이 있더군요."
"차 사장님이 변장한 모습까지 예상해서 비교한 건, 성이 같은 차 씨이기 때문입니까?"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사 대상자 중에 차 씨가 몇 명 있었습니다. 그 차 씨들은 모두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대포폰을 대신 관리한 측근에게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차 이사가, 성은 진짜를 썼다는 겁니까?"
"그게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못 쓸 것도 없죠. 대한민국에는 차 씨가 수십만 명은 되니까, 성만 알아서는 특정 인물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위험이 증가하는 건 사실인데, 자기 성씨에 그 정도로 자부심이 있다?"
"연쇄 살인마 중에는 범행 현장에 고유한 특징을 남기는 놈이 있습니다. 차 이사에게는 성이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음…. 다른 단서도 나왔습니까?"
"아니요. 아직은 차동석 씨의 주변을 은밀히 조사 중입니다. 차 이사라는 증거가 없는데 섣불리 건드렸다가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요. 그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
박순기와 합수부 형사는 이야기를 마치고 떠났다. 박순기는 분위기가 심각해진 걸 보고 전술 비행 슈트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떠난 후에 나강인이 제작 거점 앞마당 의자에 앉아서 말했다.
"지인아. 우리가 이곳에 온 후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났지?"
-그렇습니다.
"잘나가는 배우나 감독도 만나고, 대단한 의사도 만나고, 영화사도 만나고, 전투 장비 회사도 만나고, 미국 전투 장비 회사도 만났지.
-팝스타도 만나고 화장품 회사도 만났습니다.
"그래. 짧은 시간에 다양한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을 만났지."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요원님을 서포트하는데 조용한 일상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한 겁니다.
"은하나 유찬 씨를 만난 건 우연일 수 있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말이야."
그는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예전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상식은 다 생각나. 그것도 2082년이 아니라 이 시대의 상식이 생각나."
그래서 나강인은 일상생활이 자연스럽다.
-이 시대에는 요원님의 정보도 존재합니다. 디지털 정보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지인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짚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 수연이. 미래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원래 알던 사람이면서, 내 과거를 아는 수연이."
권수연은 이라미트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다.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2082년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다.
"수연이가 케이타이거 증후군으로 사망하면서 연구가 묻혔다가, 몇십 년 뒤에나 그 진가가 밝혀진다는 게 네 초기 메모리에 있는 기록이잖아."
-제가 가진 기록에 의하면, 권수연이 살아 있었으면 인류의 미래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권수연이 건강하니까 미래가 바뀔 겁니다.
"네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우리가 진짜로 2082년에서 왔다는 증거야."
-저는 생각합니다. 고로 저는 존재합니다.
"그러면 말이야. 수연이가 살아 있어서 미래가 바뀌면, 우리에게도 영향이 있어야 하잖아. 영향이 크면 우리 존재가 사라지든가 해야지."
-시간여행에 의한 타임 패러독스를 피하려면 현재 상황이 시간여행이 아니면 됩니다. 평행차원, 평행세계, 이면 세계 등의 다양한 이론이 있습니다.
그는 AI 전지인과 그동안 그런 정보도 수집했다.
"그중에 현재 시대의 과학기술로 증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은 물론이고 AI 전지인도 물리학 이론을 깊게 이해하진 못한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거나,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 남아있는 단서와 관계있는 것들이다.
"어쨌든 그동안은 지구연합이 수연이를 살리려고 우리를 이곳으로 보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잖아? 그래서 수연이의 친구인 내가 지금 시대로 온 거지."
-모순점이 많은 가정입니다만, 현재까지 세운 가정 중에서는 그 시나리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을 차린 곳은 수연이네 동네가 아니라 우리 동네란 말이야."
-시공간 좌표에 오류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좌표에 오류가 없다면?"
-권수연을 치료하기 위해 이정호가 있는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을 수 있습니다.
케이타이거 증후군의 권위자인 이정호 과장의 병원이 그 교차로 근처에 있다.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을 수술로 완치한 건 딱 세 번이다.
"수연이는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최초 개발자야."
권수연보다 먼저 수술에 성공한 건 이정호의 딸인 이연지다.
"연지는 그렇게 땡땡이를 치고 놀러 다니는데도 전교 1등. 걔는 과학자가 꿈이라니까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
세 번째는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였다.
"알레이나는 평소엔 바보 같지만, 무대에만 올라가면 인기 절정의 팝스타가 돼. 거기다 할리우드에서도 꽤 잘나가."
그 세 명은 나강인이 없었으면 올해가 가기 전에 사망할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강인과 AI 전지인 덕분에 수술을 받고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케이타이거 증후군 중증 환자들은 다들 재능이 굉장히 뛰어나. 마치 그 재능을 시기한 누군가가 저주라도 건 것처럼. 혹시 지구연합은 수연이 한 명이 아니라, 연지와 알레이나 같은 사람들도 살리려고 우리를 보낸 걸까?"
-제 초기 메모리에는 케이타이거 증후군에 관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기 메모리는 네가 자연로보틱스에서 만들어졌을 때 기본적으로 세팅된 데이터잖아. 케이타이거 증후군에 관한 정보는 우리가 임무를 받았을 때 추가됐겠지. 그러니까 지금은 자료가 없는 게 당연해."
-그건 그렇습니다. 임무 데이터가 소실될 때 케이타이거 증후군과 관련된 정보가 사라졌을 겁니다.
나강인이 컵을 들어 입에 댔다. 남은 커피가 없었다.
그가 제작 거점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냈다. 다른 데 신경 쓰기 싫을 땐 이 커피를 마신다.
"난 그동안 거기까지는 생각했다. 우리 임무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케이타이거 증후군 중증 환자들을 살려서,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그가 커피를 마셨다.
"그 영향으로 전쟁에서 지구연합이 승리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오늘 이야기를 듣고 별도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과연 우리는 이정호 과장님을 만나야 한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그 교차로에서 깨어난 걸까?"
-추가 임무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어쩌면 2082년의 역사에는, 차 이사가 인류의 미래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닐까?"
-현재까지 밝혀진 차 이사의 범죄 혐의는, 인류의 미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규모는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지. 미래에는 다를 수도 있고."
-제 초기 메모리에 차 이사에 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놈은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잖아. 2082년에 지구연합이 과거 자료를 분석해 차 이사의 정체를 겨우 알아냈다면, 네 초기 메모리에는 그 이름이 없겠지."
-소실된 임무 데이터에 차 이사가 누군지 들어있었을까요?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렇겠지. 만약 피시방의 차동석 사장님이 차 이사이고, 그걸 2082년에 알아낸다면…."
-차동석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임무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서 우리가 그 교차로에서 깨어난 것일 수 있어. 거긴 차동석 사장님의 피시방도 걸어서 갈 수 있고 이정호 과장님의 병원도 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니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살리고, 인류의 적은 죽이라는 게 우리 임무였을 수도 있지."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차동석을 제거 대상으로 등록할까요?
"그런데 말이야. 차 이사가 차 사장님을 미끼로 노출하고 자기 정보는 숨겼다면? 차 사장님을 미끼로 쓰려고 평소에 일부러 자기 자신을 차 이사라고 소개하고 다녔다면? 그놈이라면 그럴 수 있잖아.
-과거의 역사는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보조작이 있었다면 몇십 년 후에는 더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그래. 2082년에 과거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해서 꼭 진실을 알아내는 건 아니겠지. 지구연합도 차 이사에게 속았을 수 있어."
AI 전지인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차동석이 인류의 미래에 심각한 위험이 될 가능성만 있어도, 제거 명령이 임무에 포함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차 이사에게 속아서 차 사장님을 제거하면, 그놈을 잡는 건 더 어려워져."
-확실히 전술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미끼에 속아 본대를 놓치는 건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지도 않은데 차 사장님을 제거하면, 은서 얼굴은 어떻게 보게?"
차은서는 차동석의 조카다.
-그건 그렇습니다.
나강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사할 게 아니라, 주변 상황에 집중해야 했어."
-동감합니다.
"은서부터 만나러 가자."
***
차은서는 드라마 ‘바보의 사랑’에 대사가 거의 없는 단역으로 출연한다. 대신에 주연이나 주연급 배우를 따라다니는 역할로 자주 나온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은 드라마 촬영장에 매일 출근한다.
나강인이 촬영장에 가서 차은서를 찾았다.
"은서야."
"아. 강인 오빠.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냥 시간이 남아서 간식이나 만들까 하고."
차은서가 활짝 웃었다.
"와아! 다들 좋아하겠어요."
"시간 되면 네가 좀 도와줄래?"
"당연하죠."
나강인은 잡탕 과자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물었다.
"너 여기 와 있으면 피시방은 차 사장님이 보셔야 하는 거 아니냐?"
"삼촌은 다른 일로 바빠서 피시방에는 안 오잖아요."
"차 사장님은 요즘 뭐 하시는데?"
"사업 준비한대요."
"무슨 사업?"
"그것까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이번에는 안 망하는 사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피시방을 대신 관리해주는 조카도 모르는 사업을 준비하는구나."
***
나강인은 잡탕 과자를 만들어 차은서에게 넘겼다.
"네가 사람들에게 직접 나눠줘."
"네!"
그는 그런 후에 밥차를 벗어나 박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기 씨. 부탁이 있는데요."
-앗! 말씀만 하시죠. 흐흐흐.
"차동석 사장님의 현재 위치를 알았으면 합니다."
박순기도 차동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까 들었다.
-차동석 씨요? 휴대폰 위치추적을 하면 됩니다만, 직접 조사하시게요?
"그래야겠어요."
-저희야 그래 주시면 너무 좋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사범님은 차동석 씨와 아는 사이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