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앤서니 피트
영화감독 앤서니 피트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알레이나가 사는 동네로 택시를 타고 찾아왔다.
나강인의 옆집은 알레이나의 미국 친구가 샀다. 그런데 그녀는 요즘은 그곳이 아니라 아버지인 로버트가 사들인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그 오피스텔은 병원에서 가까웠다.
어차피 옆 동네라서 거기가 거기긴 했다.
알레이나는 앤서니 감독을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카페 구석 자리에는 남들 눈을 피할 수 있는 칸막이가 있었다.
그녀가 설명했다.
"이 자리에 앉으면 남들이 얼굴을 못 봐. 그래서 경쟁이 심한 자리야."
"일반인들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나 보군."
"일반인들이랑 경쟁하는 게 아닌데?"
"응?"
"이 동네에 배우가 좀 살아. 다들 지금 드라마 찍으러 가거나 학교 가서 이 자리가 비어 있는 거야."
"이 동네가 한국의 할리우드 주택가 같은 곳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앤서니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한국 서울 특정 지역의 상황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앤서니가 말했다.
"알레이나. 네가 꽤 오래 활동을 안 해서 건강을 걱정했다."
"내가 그동안 좀 조용히 지내긴 했지?"
알레이나는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게 된 후로 조용히 지냈다. 그때 그녀의 상태는 공연이나 파티를 하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러던 네가 갑자기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나오는 드라마 봤어?"
"당연히 봤지."
앤서니는 한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바보의 사랑’의 액션 부분을 미국에서 VOD로 보고 감탄했다.
알레이나가 물었다.
"내가 보라고 한 영화는 어땠어?"
"네가 하도 극찬을 해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그 영화부터 봤는데…."
그는 바로 오늘 인천공항 영화관에서 ‘운명의 창’을 보았다.
"감상이 어때?"
앤서니가 인상을 썼다.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해가 안 가는 영화였다."
"왜? 좋은 영화잖아. 어려운 영화도 아니고."
"명작이지. 이야기 흐름도 좋고, 갈등과 해소 방식도 좋고, 자잘한 에피소드와 유머도 좋았다. 그리고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여놓은 메시지도 훌륭했지."
"그런데 왜 당혹스럽고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앤서니가 커피가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영화에 액션이 정말 많더군."
"당연하잖아. 싸울 일이 많은 영화니까."
"일 년을 준비해서 찍었다면 당연하다고 하겠어. 여섯 달이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어. 그런데 넌 나한테 그 영화의 촬영 기간이 한 달이라고 했잖아."
"응. 맞아."
"액션이 없었어도 그런 영화를 한 달 만에 찍기는 어려워. 찍기 전부터 촬영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겨우 가능하겠지."
"근데 액션 엄청 많잖아."
"그러니까 한 달은 말이 안 돼. 그 완성도 높은 영화에, 그 대단한 액션을 그렇게 많이 넣었는데 제작 기간이 겨우 한 달? 그걸 믿으라고?"
"진짜라니까."
앤서니가 질문했다.
"네가 그 영화를 찍는 걸 옆에서 본 건 아니지?"
"나는 나중에 들었지. 기사를 읽기도 했고."
"답이 나왔네. 알레이나. 네가 속았어. 한 달일 리가 없어."
"아니야. 난 충분하다고 봐. 왜냐하면."
알레이나가 자랑했다.
"네가 그 영화에서 본 건 실전 리얼 액션이니까."
"실전 리얼 액션? 내가 모르는 액션 기법인데?"
"세상에서 오직 한 명만 할 수 있는 거니까 모를 수도 있지."
앤서니는 믿지 않았다.
"그 영화에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는데? 한 명만 할 수 있다면 그 배우들은 뭐지?"
"실전 리얼 액션이 가능한 무술감독 한 명이, 그 배우들의 움직임까지 유도하면서 찍은 거야."
앤서니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다 들은 이야기지? 네가 본 건 아니지?"
"내가 봤는데?"
"어?"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나 요즘 한국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가는 거 알지? 촬영장에서 내가 직접 봤어. 무술감독이 배우들의 동선부터 카메라 위치까지 다 지정한 후에, 딱 한 번에 전부 다 찍어."
엔서니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토했다.
"후우. 영화를 보면서 설마 했는데…."
"영화에서 뭔가 눈치챈 게 있어?"
"모든 액션을 원 테이크로 찍어서 다시 편집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 그 생각은 털어버렸지만. 그런데 그게 진짜였단 말이지?"
"당연하지. 어때? 이제 믿겠어?"
앤서니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 그 액션들을 원 테이크로 찍으려면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해야 해. 연습 기간을 포함하면 한 달이 아니지."
"연습 안 하는데?"
"어?"
알레이나가 신나서 자랑했다.
"실전이고 리얼인 액션이라고 했잖아. 연습하면 실전 느낌이 안 난다고, 연습 없이 그냥 찍어."
"하지만 넌 분명히 무술감독이 동선을 지정한다고…."
"배우들에게 어떤 순서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 정도만 정하는 거야. 그것도 현장을 딱 보고 그냥 그 자리에서 지정한다니까? 어떻게 싸울지는 안 정해. 그냥 알아서 배우들이 공격하게 해. 그러니까 실전 리얼 액션은."
그녀가 유리컵을 손톱으로 톡 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쨍하고 났다.
"진짜로 싸우는 거야."
앤서니는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사람을 갈아 넣기라도 하는 거냐? 그러다 다치는 사람들은 어쩌고?"
"아무도 안 다쳐.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하면서 단 한 명도 다친 적이 없대."
"도대체 어떻게…."
"무술감독이 무술 대역도 맡아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가 안 다치게 싸우거든."
"그런 게…."
"가능해. 내가 촬영장에 가서 직접 봤다니까?"
앤서니는 말문이 막혔다.
"21세기에 선진국에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여기선 그게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야."
알레이나가 물었다.
"그래서 어때? 그 실력이면 할리우드에서 통할 거 같아?"
앤서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당연하지. 내가 나이트 스트라이커의 후속작으로 스카이 이글을 준비하고 있거든? 네 말이 다 사실이라면, 내 영화에 꼭 필요한 인재다."
앤서니 피트가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메트로폴리스 헌터’다. 그런데 그 영화는 한국이 마지막 촬영지다.
그는 차기작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알레이나가 활짝 핀 얼굴로 물었다.
"나이트 스트라이커 후속을 맡을 거야? 그럼 나는?"
그녀는 ‘나이트 스트라이커’에서 중요 조연으로 출연했다.
"네 건강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연락을 못 했는데…."
"나 엄청 건강해!"
"당연히 너도 출연해야지. 팀에서 네가 빠지면 진정한 후속작이 아니니까."
"흐흐. 이번엔 내가 막 벽 차고 날아다니는 거 대역 안 쓰고 보여줄게."
"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내가 아는 애가 그거 잘해. 나도 앞으로 연습하려고."
앤서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
앤서니는 아직 찍지도 않은 영화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매트로폴리스 헌터를 한국에서 찍을 때, 그 사람에게 액션을 맡겨 봐야겠어."
"시나리오를 뜯어고치게?"
"시나리오는 최근에 수정됐어. 그걸 또 고칠 수는 없지."
"맡겨본다며?"
"그 무술감독이 그렇게 빠르다면, 한국 촬영 기간 안에 둘 다 찍을 수 있겠지. 나는 둘 중에 잘 나온 걸 쓰면 돼."
"액션이 마음이 들었나 봐?"
"최고였지. 영화를 보면서 너무 진짜 같아서 여러 번 경악했으니까."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뭘 상상하든 그것보다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액션을 찍을 수 있어. 이쪽 촬영을 먼저 하는 걸 추천할게. 일단 해보면 원래 촬영 계획은 바로 접을 테니까. 남는 시간엔 관광이나 하다 가."
"허풍이 심해졌군. 알레이나. 그 무술감독과 미팅을 연결해줘. 빠를수록 좋아."
"잠깐 기다려봐."
알레이나가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시간 돼?"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
"전에 말한 할리우드 감독. 한국에 들어왔는데 너 만나고 싶다고 해서."
-관심 없는데.
알레이나가 손으로 휴대폰 마이크를 가리고 속삭였다.
"내 얼굴 봐서 커피라도 마셔."
-내가 왜 네 얼굴을….
"집으로 데려가는 수가 있다?"
-어디서 보면 되겠냐?
알레이나가 카페 이름을 말해주었다.
-지금 집에서 나간다. 10분 뒤에 보자.
알레이나가 전화를 끊은 후에 자랑했다.
"10분 뒤에 올 거야."
"그렇게 빨리?"
"이 동네에 살거든."
"아. 역시 한국의 할리우드 주택가."
"아니라고."
앤서니가 물었다.
"그런데 그 무술감독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봐?"
"당연하지."
***
나강인이 카페로 찾아왔다.
알레이나가 양쪽을 소개했다.
"이쪽은 나강인. 나랑 엄청 친해."
"우리가?"
"응."
그녀가 앤서니를 가리켰다.
"이쪽은 앤서니 피트. 나이트 스트라이커 알지? 그 영화의 감독이야. 할리우드에서 꽤 잘나가."
앤서니가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앤서니 피트입니다."
"나강인입니다."
진동벨이 울렸다. 나강인이 테이크아웃 컵으로 커피를 받아와 한 모금 마셨다.
알레이나는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났다.
앤서니가 차기작인 ‘스카이 이글’의 간략한 기획서를 꺼냈다.
"지금 찍는 메트로폴리스 헌터는 한국 촬영만 마치면 거의 끝납니다."
그가 영어로 된 기획서를 내밀었다.
"다음에는 이 영화를 만들 겁니다. 스카이 이글. 나이트 스트라이커의 후속작이죠. 이 영화의 액션 담당으로 고용하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할리우드에 와서 테스트를 받아야 하지만, 알레이나에게 들은 대로의 실력이면 그 테스트는 통과될 겁니다."
앤서니는 영어로 설명했다. AI 전지인이 실시간으로 통역하고 있어서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나강인이 영어로 말할 때는 절차가 조금 복잡하다.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음성을 보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능을 쓰려면 그가 무슨 말을 AI 전지인이 미리 알아야 한다.
대본이 존재할 때는 그 보정 기능을 쓰는 데 문제가 없지만, 일상 대화에서는 쓰기 불편했다.
그는 얇은 기획서를 훑어본 후에 그냥 한국어로 말했다.
"바빠서."
"네?"
"바빠서 미국에 갈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냥 미국 관광이 아니라 할리우드입니다만?"
"압니다."
앤서니가 생각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 할리우드 진출을 마다해? 그것도 내 영화의 액션 담당 자리를?’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튕겨보는 거군. 그럼 나도 밀당을 좀 해야겠어.’
앤서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런. 좋은 기회인데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아쉽지만, 이 제안은 철회해야겠군요."
"그러시죠."
"네?"
나강인이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서니 피트 감독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난 이만."
나강인이 칸막이 너머로 나갔다.
앤서니가 의자에 앉은 채로 피식 웃었다.
"세게 나오는데? 협상할 줄 알아."
알레이나가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왔다. 그런데 앤서니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뭐야? 왜 혼자 있어?"
앤서니가 도로 물었다.
"그러는 넌 왜 혼자 오냐?"
"응?"
"너랑 이야기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
"누가?"
"나강인 씨."
"아닌데?"
앤서니는 당황했다.
"그럼…. 설마 진짜 그냥 간 거야? 내 제안을 거절하고? 아니, 어떻게? 할리우드 영화에 액션 담당자로 진출할 기회를 준다는데 어떻게 그냥 가?"
알레이나가 인상을 쓰며 앉았다.
"뭐야? 강인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아니, 나는 그냥…. 내 차기작에 고용할 테니까 할리우드로 오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했어?"
"바쁘다고 하길래, 싫으면 말라고 했지. 제안을 철회한다고 했더니 그냥 가네?"
"그러니까 네가 먼저 제안을 철회했다고?"
"진짜로 철회할 생각은 아니고, 나는 그냥 협상 기술을 좀…."
알레이나가 화를 냈다.
"앤서니. 내가 안 한다는 사람을 조르고 졸라서 겨우 자리를 마련한 건데 미쳤니?"
"어? 저 사람은 네가 부르자마자 10분 만에 왔잖아. 언제 졸랐다는 거야?"
"그동안 내가 별명 대신에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얼마나 졸랐는데! 그렇게 설득했기 때문에 오늘 부르니까 바로 나온 거라고!"
"아니…. 난 그냥…. 내가 좀 강하게 나가면 당연히 항복할 줄 알고…."
"나강인이 항복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어?"
"그럼 이번 영화 촬영은? 한국에서의 액션을 맡긴다며?"
"그건 말도 못 꺼내봤지."
"미치겠네. 너 바보니?"
앤서니가 계속 구박을 듣다가 더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알레이나! 왜 그렇게까지 저 사람 편을 드는데!"
"나한테는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그러지!"
그녀는 나강인의 무술감독으로서의 능력만 보고 미국 진출을 권한 게 아니다. 나강인은 옆집 사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다.
"넌 어떻게 내가 잠깐 없는 사이에 일을 다 망치니?"
앤서니 피트는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는 감독이다. 알레이나는 그가 만든 ‘나이트 스트라이커’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차기작에도 출연 예정이다.
그래서 촬영장에서는 알레이나가 앤서니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알레이나는 영화배우보다 팝스타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대중적인 인기는 알레이나가 앤서니보다 훨씬 더 높다.
촬영장 밖에서는 알레이나가 앤서니보다 세다.
앤서니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은 무슨 협상을 왜 저렇게 단호하게 해?"
"협상하러 온 게 아니라고! 안 한다는 사람을 겨우 데려왔다고! 그런 사람을 밀어내면 다가오겠어? 얼씨구나 하고 가버리지!"
"네가 말 좀 잘하면 다시 오…."
"시끄러워! 이미 버스 떠났어!"
***
앤서니 피트는 영화 제작팀보다 하루 일찍 한국에 왔다. 그는 카페에서 쫓겨나서 혼자 호텔 방에 들어왔다.
"누가 그렇게 가버릴 줄 알았나.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그가 투덜대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나강인에게 보여준 기획서가 아니라 다른 서류가 나왔다.
그 서류 속에는 용산 15층 빌딩 전투 사진이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드래곤 윙. 우리 영화에는 이게 꼭 필요해."
원래 촬영 계획은 이쪽이 진짜다. 그는 CNN 뉴스에서 드래곤 윙을 보고 작가들을 동원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