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스턴트맨
드라마 ‘바보의 사랑’의 도주희 작가가 최진욱 피디를 구박했다.
"국방부에 가서 날개를 협찬받아올 테니까 믿고 대본 수정하라며!"
구박받던 최진욱이 발끈했다.
"내가 괜히 거기 갔냐? 그 날개는 도 작가가 받아오라던 거잖아!"
"믿으라고만 안 했으면 내가 대본 수정을 했겠니?"
"에잇! 그까짓 거 CG로 처리하지 뭐!"
"CG가 진짜로 돼?"
"어…. 그게…."
예산은 좀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CG는 돈을 쓰면 쓸수록 시간이 줄어들고 퀄리티가 높아진다. CG를 만들 예산이 있긴 한데 만드는 기간을 줄일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최진욱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지금부터 CG를 천천히 준비하면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되겠니?"
"아. 몰라. 배 째! 그래도 내가 공격헬기는 협찬 따왔다고!"
"진짜 째 버린다?"
"야야. 칼은 놓고 이야기해. 누가 도 작가한테 은장도 줬어? 우리 드라마에 은장도가 왜 있어!"
"이거 소품 아니다! 운명의 창 굿즈다!"
***
알레이나가 드라마 ‘바보의 사랑’ 촬영장에 나타났다.
그녀는 원래는 이 드라마에 카메오로 한 번 출연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서 이제는 매주 한 번쯤은 드라마에 짧게나마 나온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앤서니가 미안하대."
"그 감독? 뭐가 미안해? 서로 하기 싫다고 이야기하고 깔끔하게 손 턴 건데."
"살려 달래."
"어디 납치라도 됐냐?"
"그게 아니라, 원래는 영화 액션에 전술 비행 슈트를 쓰려고 했대. 그런데 협찬을 못 받았다네?"
"아. 그거?"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앤서니는 운명의 창을 영화관에서 보고 나서 눈이 너무 높아졌어. 이제 실전 리얼 액션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됐대."
"그래서?"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지금 만드는 영화의 한국 촬영분에서 액션을 맡아 달래."
"나 바쁜 거 보이지?"
"안 보이는데? 넌 촬영장에 오래 있지 않던데? 남는 시간 좀 쓰면 되잖아."
"요즘 따로 하는 일이 많아. 됐다 그래."
알레이나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1억."
"1억?"
"응. 한 번에 1억."
"한 번이 아니야?"
"액션 촬영 스케줄이 세 번 있는데, 한 번에 1억씩 비용을 지급하겠대."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요원님. 3억은 못 참습니다.
"그치?"
-활동 자금이 더 필요합니다. 어서 저 눈먼 딸라를 빨아들이십시오.
나강인이 물었다.
"시간 상관없이 당일 액션 촬영분만 끝내면 1억씩이지?"
"당연한 거 아냐? 결과가 중요하지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일당으로 바로 입금?"
"응?"
"달러로?"
"으응?"
"아니면 안 하고."
알레이나가 큰소리쳤다.
"내가 내놓으라고 할게. 앤서니 개인 돈으로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영화사에서 받으면 되겠지. 걔 돈 많아. 나만큼은 아니지만."
"드라마 촬영 스케줄과 내가 요즘 하는 일 사이에 비는 시간대를 찾아보자."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잘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할리우드로…."
"안 간다고."
***
할리우드 영화 ‘매트로폴리스 헌터’는 한국에서 액션만 찍는 게 아니다. 일상 장면이나 갈등 장면, 로맨스도 찍는다.
액션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세 번을 찍기로 했다.
나강인이 현장에 도착했다. 오늘이 첫 번째 날이다.
미국 영화라서 영화의 시나리오는 영어로 인쇄되어 있었다.
앤서니 감독이 대본을 주면서 말했다.
"이건 최근에 수정한 게 아니라 그 전에 쓰려던 시나리오입니다."
드래곤 윙을 협찬받을 수 없으면 최신 수정본은 쓸 수 없다. 이건 용산 사건 전에 나온 시나리오다.
앤서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글 번역본을 미처 준비 못 했는데, 혹시 통역이 필요하면…."
알레이나가 옆에서 말했다.
"괜찮아. 영어랑 프랑스어 엄청 잘해."
"너 말고."
"응. 나 말고. 강인이도 잘해."
"그래? 다행이네."
나강인이 대본을 펼쳤다.
AI 전지인이 대본에 인쇄된 모든 영어 문장을 한글로 번역해 보여주었다.
나강인이 대본을 빠르게 넘기며 한글 번역본을 쭉 훑어본 후에 촬영장을 보며 작게 말했다.
"지인아. 이 시나리오대로 상황 구성해."
AI 전지인이 대본 속 내용을 3D 영상으로 만든 후에 AR 렌즈를 통해 보여주었다.
"음…."
촬영 현장 위에 홀로그램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사람은 정확히 묘사되지 않고 윤곽만 나오는 정도였지만, 영화로 만들어지면 실제로 어떻게 보일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강인이 촬영 현장으로 들어갔다. 현장 한복판에서 주변을 보면 영화관 스크린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강인도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에서 일하면서 안목이 늘었다. 그는 홀로그램 한복판에서 말했다.
"밋밋하겠네."
"예?"
나강인이 대본을 흔들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면 전투가 너무 밋밋해집니다."
‘운명의 창’이나 ‘바보의 사랑’은 나강인이 액션 촬영의 전권을 가지고 있다. 그 영화와 드라마는 그가 배우들의 동선부터 카메라 위치까지 모두 정했다.
그런데 앤서니 피트 감독이 준 ‘메트로폴리스 헌터’ 시나리오에는 배우들의 동선이나 행동이 이미 지정되어 있다.
"난 이렇게 안 찍을 겁니다."
알레이나는 그동안 드라마 촬영장에서 나강인이 어떻게 일하는지 여러 번 봤다. 그녀가 얼른 스케치북을 가져와 펼쳤다.
나강인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액션을 설명했다. 원래 시나리오의 전투는 완전히 날려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전투가 나왔다.
앤서니 피트는 옆에 서서 그의 설명을 들었다.
"이러면 전투 스타일이 완전히 변하는데…."
앤서니 피트는 실전 리얼 액션을 어떻게 찍는지 직접 본 적이 없다. 알레이나를 통해 어떤 식으로 하는지 말은 들었지만 다 믿지는 않았다.
그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우리 작가들과 전문가들이 여러 날 공들여서 만든 시나리오입니다. 이렇게 막 바꿨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그럼 원래 시나리오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액션을 맡겨요. 나한테 맡기면 이렇게 할 거니까."
"어…."
알레이나가 얼른 일렀다.
"네가 지휘하는 액션을 다 찍고 나면, 원래 시나리오로 다시 찍을 거래. 그래서 잘나온 걸 쓰겠대."
앤서니가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아니, 그건 드래곤 윙을 협찬받으면 그러겠다는 거였는데…."
협찬을 못 받았다.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뭐 마음대로 하시고."
앤서니는 스케치북을 보며 고민했다.
‘이 액션을 방금 현장에서 쓱쓱 만들었잖아. 대충 한 거면 어쩌지?’
그게 불안했지만, 그래도 나강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본 ‘운명의 창’이 너무 좋아서, 나강인만 할 수 있다는 실전 리얼 액션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찍어봅시다. 안 되면 다시 의논하고요."
첫날 촬영은 나강인이 설정한 대로 진행됐다.
‘매트로폴리스 헌터’는 히어로 영화다. 주인공은 다른 영화의 히어로처럼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싸운다.
나강인이 주인공의 대역을 맡았다. 연습은 없었다. 손도 맞춰보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이름이 좀 알려진 사람이 상대역을 맡았으면 이런 식의 촬영을 거부할 수도 있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날 촬영은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전문 스턴트맨이다. 그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가 등등했다.
촬영을 구경하는 알레이나의 옆에서 남자 주연 배우 벤자민이 말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아니니까 보기나 해."
"이러다 사람이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안 다치게 한다니까? 아. 시작한다."
***
촬영이 시작됐다.
미국에서 온 스턴트맨들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 무술감독이 자세한 설명이나 연습도 없이 촬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진짜로 공격하라고? 내가 헬스로 몸만 키웠다고 생각하는 건가? 매운맛을 보여줘야겠어.’
그는 나강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리 연습해둔 시나리오를 날려버리고 새로운 판을 짠 것도 거슬렸고, 혼자서 모든 스턴트맨을 진짜로 상대하겠다고 하는 것도 불쾌했다.
게다가 상대는 할리우드의 잘나가는 액션 감독이 아니라 한국의 무술감독이다. 그래서 좀 얕잡아보는 면도 있었다.
다니엘은 권투는 꽤 오래 수련했다. 대회 출전 경력도 있다. 그래서 그는 주먹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나강인이 주인공 대신 가면을 쓰고 크레인 위에서 가볍게 점프했다. 카메라에는 주인공이 하늘에서 적들이 모여 있는 곳 앞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찍혔다.
적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다섯 명이 있었다. 그 뒤에는 여자 주연 배우가 서 있었다.
대사를 말하는 건 주연 배우가 할 일이다. 그 단계는 건너뛰고 나강인은 싸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스턴트맨 다니엘이 제일 먼저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장면에서 잽부터 날리면 그림이 좋게 나오지 않는다.
‘진짜로 치라고? 얼마든지!’
그는 처음부터 레프트 훅을 강하게 날렸다.
권투로 단련된 주먹이 나강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AI 전지인은 적이 총을 쏠 때 사격 방향과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예측해 표시한다. 그 스킬은 적의 주먹 공격도 감지한다.
다니엘이 레프트 훅을 날리기도 전에 나강인의 눈에는 공격 예상 궤도가 훤히 보였다.
나강인이 몸을 조금 돌려 그 공격을 간단히 피했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다니엘의 눈이 번뜩였다.
‘제법이다만!’
다니엘이 연속 동작으로 라이트 훅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에 닿는 감각은 없었다. 주먹이 허공을 크게 휘저었다.
다니엘은 두 번이나 헛손질을 한 게 쪽팔렸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적당히 하려 했더니!’
나강인의 턱이 보였다. 그는 그 턱을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나강인은 피하지 않았다.
‘이건 제대로 들어간….’
턱을 향해 올라가던 주먹이 갑자기 옆으로 휙 젖혀졌다. 오른팔이 옆으로 쭉 펴졌다. 가슴이 열렸다.
‘어?’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공격을 나강인이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어퍼컷을 간단히 옆으로 밀어냈다.
다니엘이 놀란 시간은 짧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격이 들어올 거야!’
그는 나강인의 어깨 움직임을 보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권투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상대의 어깨나 허리가 움직이는 걸 보고 공격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뒤로 빼려던 그의 가슴에 나강인의 손바닥이 닿았다. 손이 언제 닿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어깨 움직임을 못 봤는데?’
나강인이 다니엘을 주먹으로 치는 척하며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러면서 다리를 슬쩍 걸었다. 다니엘의 몸이 마치 주먹에 맞아 넘어가는 것처럼 뒤로 크게 젖혀졌다.
나강인이 앞으로 쓱 걸어가며 다니엘을 옆으로 툭 밀었다. 마치 앞을 막은 박스를 치우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다니엘은 옆으로 엎어졌다.
다니엘은 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깨달았다.
‘안 아프다?’
분명히 강하게 얻어맞아 나자빠지는 것처럼 제대로 굴렀는데,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넘어질 때도 바다에 두 손을 짚으면 충격을 줄이기 좋은 자세로 넘어갔다.
다니엘은 스턴트맨이다. 당황하긴 했지만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안다. 그는 즉시 바닥에 엎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끄으으…."
두 번째 스턴트맨은 다니엘이 어떻게 당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큰소리칠 실력이 있구나!’
그는 방심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소품용 칼은 군용 단검과 똑같이 생겼지만, 날을 세우진 않았다. 칼날의 재질도 플라스틱이라 몸에 닿는 정도로는 다치지 않는다. 그 소품용 단검으로 사람을 해치려면 대놓고 찌르거나 칼끝으로 피부를 강하게 긁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칼에 맞아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칼날이 나강인의 몸에 닿기만 해도 바로 NG다. 그러면 다시 찍어야 한다.
그 스턴트맨은 특수부대 출신이다. 단검으로 싸울 줄 알았다.
스턴트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칼날이 나강인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
나강인이 왼손으로 적의 오른손을 툭 밀어 단검 공격을 빗겨냈다. 하지만 상대도 다니엘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정도 방어는 예상했다.
그는 오른손의 단검을 옆으로 재빨리 던졌다.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으로 날아오는 단검을 받으려 했다.
나강인이 더 빨랐다. 그는 날아가는 단검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스턴트맨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 얼굴이 주변에 배치된 카메라에 정확히 찍혔다.
나강인이 상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어깨가 상대의 몸에 닿았다. 그 상태에서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고 상대의 몸을 강하게 밀었다.
상대가 두 손과 두 발을 앞으로 뻗은 채로 뒤로 날아가 앵글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정확히 찍혔다.
카메라 앵글 바깥에는 충격방지용 쿠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턴트맨이 그 위에 떨어졌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스턴트맨은 서로를 슬쩍 보았다. 그들은 혼자서는 나강인을 못 이긴다는 걸 깨달았다. 둘이서 같이 공격한다 해도 정면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왼쪽!"
"가자!"
두 사람이 나강인의 좌우로 뛰어갔다.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할 계획이었다.
나강인이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