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60화 (360/411)

360. 디테일

할리우드 영화 ‘메트로폴리스 헌터’의 그날 촬영은 원래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액션이 집중된 파트를 찍을 때 나강인이 시간을 대폭 줄여준 덕분이다.

아직 해가 하늘에 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온 배우와 스태프들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촬영이 안 풀리면 야간에도 찍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찍 끝나네?"

"어디 가서 한잔 마실까?"

"한국에서 좋은 곳 좀 알아?"

"물어봐야지."

***

여자 주연 배우 엠마는 오늘 밤을 멋지게 즐길 계획이 있었다. 그녀가 비서에게 말했다.

"그 무술감독 연락처 가져와. 저녁에 초대하게."

비서가 머뭇거렸다.

"그게…."

엠마가 인상을 썼다.

"뭐야? 아까 알아오라고 했잖아."

"물어봤는데, 스태프들도 모른대요."

"감독이 알잖아."

"감독도 모른대요."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감독은 연락처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사람에게 일을 맡겼는데?"

"알레이나 민을 통해서요. 그 무술감독은 알레이나와 아는 사이래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알레이나의 집안이 한국계랑 프랑스계지. 한국에 인맥이 꽤 있나 보다. 알았어. 내가 연락할게."

알레이나는 아까 촬영장에 왔다가 나강인의 액션이 끝난 후에 떠났다.

엠마가 알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알레이나. 오랜만이야."

-우리 아까 촬영장에서 봤잖아.

"멀리서 얼굴만 봤지 이야기는 못 나눠서 아쉬웠어."

-우린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인데 굳이?

"응? 소가 왜 닭을 봐?"

-한국 속담이야.

엠마는 알레이나와 잡담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다.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아 참. 오늘 우리 무술감독 말이야. 네가 아는 사람이라며?"

알레이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뭐지? 이거 내가 소문으로 듣던 그거야?

엠마가 얼른 둘러댔다.

"아니야. 그냥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는 거야."

-그냥 저녁 식사?

"응. 오늘 그 사람 덕분에 편하게 찍었거든. 그게 고마워서 내가 저녁을 사려고. 아주 좋은 거로."

-엠마. 내가 널 좀 아는데….

"응?"

알레이나가 짜증을 냈다.

-내 친구한테 접근하지 마. 어디서 또 수작질이니? 넌 그냥 또라이들이나 계속 만나!

엠마도 발끈했다.

"야! 그게 친구한테 할 소리야?"

-그래도 약쟁이랑 사기꾼은 빼고 말했잖아. 고마운 줄 알아!

"야! 나도 앞으로는 그런 이상한 놈들 안 만나고, 그 무술감독 같은…."

엠마가 말하다가 멈칫했다.

"어? 잠깐. 혹시 너랑…."

-그런 거 아니야! 꺼져!

알레이나가 전화를 뚝 끊었다.

엠마가 투덜댔다.

"옛날에 통화했을 때는 다 죽어가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기운이 넘쳐? 약은 알레이나가 한 거 아냐?"

***

다른 사람들은 그날 촬영 스케줄이 일찍 끝난 덕분에 놀러 가거나 쉬러 갔다.

감독 앤서니도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그는 호텔에 틀어박혀서 오늘 촬영한 영상을 확인했다.

다른 촬영분은 서둘러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지금 보는 건 오늘 찍은 것 중에서 액션 영상뿐이다.

오늘 액션 촬영에는 열 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래서 영상 파일도 열 개가 나왔다.

그는 고성능 노트북 두 대를 켜놓고 그중 한 대로 열 개의 영상 중 하나를 재생해 결과물을 확인했다.

"카메라 위치, 조명, 배우들의 움직임. 다 완벽해."

그건 아까 촬영하면서도 느꼈다.

이번에는 노트북 한 대에는 멀리서 찍은 영상을, 다른 한 대에는 가까이에서 찍은 영상을 동시에 재생했다.

가까이서 찍은 영상에는 악당 역할을 맡은 스턴트맨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잡혔다. 그런데 그 표정 연기가 베테랑 배우처럼 실감 났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왜 이렇게 찍혔는지는 짐작이 갔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 전투 같았겠지."

고민도 생겼다.

"표정 연기가 버릴 게 하나도 없어. 이거 다 스크린에 띄우고 싶을 정도야."

그는 다른 영상도 하나씩 재생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것 중에는, 나강인이 상대를 칠 때 충격을 줄이기 위해 주먹을 손바닥으로 바꾸는 동작이 찍힌 것도 있었다.

그 부분은 영화에 쓸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옆 노트북의 영상을 보았다. 그쪽 영상이 그림이 더 잘 나왔다. 게다가 그 영상은 손동작이 완벽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이러면 일이 간단하지."

손이 보이지 않는 영상을 골라 편집하면 된다.

어떻게 편집할지 생각하던 앤서니의 표정이 굳었다.

"어?"

그가 방금 본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다른 영상들도 하나씩 같은 부분을 재생했다.

"3번 카메라의 영상을 내가 쓰게 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움직였나?"

게다가 그런 부분이 하나가 아니다.

"3번 영상으로 두 사람의 전체 샷을 보여주고, 5번 영상으로는 세부 동작을 보여주면 딱 좋겠는데…."

그가 영상의 다른 부분도 확인했다. 나중에는 아예 두 대의 고성능 노트북 모니터에 영상 재생 프로그램 열 개를 작은 창으로 띄워 동시에 돌렸다.

"여기도 그러네. 6번 영상을 메인으로 보여주면서, 사이에 7번 영상의 배우의 표정 연기 부분을 끼워 넣으면…."

그렇게 해도 영상이 자연스럽게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자연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느낌이 끝내주겠는데?"

앤서니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를 다 쓰고 싶었다. 치고받을 때의 움직임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전투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열 개의 영상을 잘만 조합하면 보여주고 싶은 걸 다 보여줘도 속도감이 줄어들지 않겠어."

그가 대략적인 느낌으로 전체 시간을 계산했다.

"이렇게 하면 전체 액션의 상영 시간이 아마…."

실제 촬영시간보다 편집된 영상의 상영 시간이 훨씬 더 길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액션의 상영 시간은 실제 촬영시간의 두 배가 넘겠는데?"

문득, 영화 ‘운명의 창’에서도 그렇게 편집된 전투 장면을 여러 번 봤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 영화의 감독도 그래서 액션을 그렇게 편집했구나. 그런데 그 영화와 내 영화 모두 이렇다는 건…."

그가 다시 영상을 보았다.

"우연히 이렇게 찍힌 게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찍히게 움직인 거라고?"

그런 작업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시간만 충분하면 액션을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액션을 어떻게 할지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자마자 바로 결정했는데?"

자기가 말하고도 믿어지지 않는 소리지만, 그렇다고 안 믿을 수 없다. 증거가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나강인의 손동작이 보이는 영상과 보이지 않는 영상을 동시에 천천히 재생하며 비교했다.

"배우들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나강인을 공격했어."

그건 표정을 보면 짐작이 갔다.

"그런데 나강인이 그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카메라 각도까지 다 계산해 반격했다고? 거의 실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증거를 눈으로 보는데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이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는 배우가 나강인을 권총으로 쏘는 부분도 확인했다. 그건 영상의 가장 뒷부분에 있었다.

아까는 그냥 보고 넘겼는데 이번에는 여러 각도에서 천천히 재생하면서 자세히 확인했다.

"어?"

그러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는 여러 각도의 카메라 영상을 하나씩 띄웠다. 일시 정지를 시켜놓고 손가락으로 화면에 선을 그어보기도 했다.

"와. 이건…."

배우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총구가 향하는 방향과 나강인의 위치가 살짝 어긋나 있었다.

"저 권총이 진짜 총이었다고 해도, 총탄이 명중하는 건 하나도 없었겠어. 이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현실적이면, 사격 효과를 CG로 처리할 때 더 진짜처럼 보이겠는데?"

그건 좋지만, 이 영상 속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총을 피한 건가? 아니면 우연히 이렇게 된 건가?"

그건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사람하고는 절대로 싸우지 말아야겠다. 설사 내 손에 총이 있더라도 덤비지 말아야지."

그는 밤이 늦을 때까지 계속 열 대의 카메라로 찍은 액션 영상을 돌려보았다. 어떻게 편집할지도 대충 그려보고, 시험 삼아 가편집도 해보았다.

그는 가편집 영상을 마지막으로 돌려본 후에 만족했다.

"내가 편집만 제대로 하면, 완벽한 액션 영상이 나오겠구나."

영상을 보니 욕심이 났다.

"내일 촬영도 오늘처럼 완벽했으면 진짜 좋겠다."

***

나강은은 ‘메트로폴리스 헌터’ 촬영에 세 번 참가하기로 했다.

이튿날은 다른 장소에서 두 번째 액션이 촬영됐다.

앤서니가 공손히 대본을 내밀었다. 어제는 필요한 부분만 있는 얇은 대본이었는데, 오늘은 아예 영화 전체 대본을 주었다.

나강인이 영어로 된 대본에서 오늘 찍을 부분을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실시간으로 번역해서 한글로 보여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전투 조건이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좁은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싸우는 액션이기 때문이다.

"지인아."

AI 전지인이 즉시 주변 지형 전체를 3D 지도로 만들고, 대본 속 배우들의 움직임을 그 위에 표현했다.

나강인이 그 영상을 가만히 보다가 대본을 덮었다.

"다 엎고 새로 짭시다."

앤서니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아유. 그러셔야죠."

나강인이 앤서니를 돌아보았다. 어제와는 반응이 많이 달랐다.

"왜…."

"뭐부터 할까요?"

"어…. 일단 같이 걸읍시다."

나강인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골목으로 이동하며 배우들이 이동할 동선과 싸워야 할 곳을 설명했다.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스케치북에 그림도 그려가며 설명했다.

카메라를 배치해야 할 곳도 직접 지정했다.

오늘 촬영에는 고정식 카메라만 쓰는 게 아니다.

"뒤에서 뛰면서 따라오는 카메라맨은 여기서 다른 사람과 교대해야 합니다. 어차피 혼자서는 못 쫓아옵니다."

"그렇게 빨리 움직이면 속도감이 더 나겠네요. 기대됩니다. 하하하."

어제도 나강인이 시키는 대로 촬영을 하긴 했다. 그런데 그때는 배우들도 나강인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태프들도 의심했다.

감독인 앤서니도 어제는 시험 삼아 찍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손이라도 비빌 것처럼 나강인의 말을 잘 들었다.

이곳에서 연기해야 하는 액션 전문 배우들도 나강인을 따라가며 설명을 같이 들었다.

그중 한 명이 나강인이 방금 지정해준 위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쯤에서 기습하라고? 여기서 경고도 없이 들어가면 너무 위험하지 않나? 그러다 당하거나 다치면 어쩌려고?"

"안 당할 자신이 있겠지."

말을 꺼낸 배우가 어제 촬영 현장을 떠올렸다.

"하긴. 안 다치겠네."

주연급 배우들도 나강인을 대하는 모습이 어제와 달랐다.

촬영 코스를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난 후에, 남자 주연 벤자민이 손을 내밀었다.

"미스터 나. 어제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오늘 촬영이 너무 기대돼서 밤에 잠이 안 오더군요."

벤자민은 영어로 이야기했다. AI 전지인이 실시간으로 통역해줘서 듣는 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나강인이 영어로 말할 때의 발음이다.

나강인이 먼저 한국어로 작게 말한 후에 번역된 문장을 보고 다시 말하면, AI 전지인이 발음을 보조해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말하는 걸 반복하면, 상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하다.

앤서니 감독과 대화할 땐 상관없었다. 앤서니는 한국어를 할 줄 아니까 그냥 한국말로 하면 된다.

그런데 나강인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말하면 좋을 게 없다.

대책은 이미 세워두었다.

AI 전지인이 홀로그램으로 추천 문장 네 개를 띄웠다. 나강인이 손가락을 아주 살짝 까닥였다. 두 번째 문장의 색이 변했다.

나강인이 벤자민을 보며 그 문장을 말했다.

"액션 촬영은 어제처럼 한 번에 갈 겁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발음과 발성을 보정했다. 차분하고 듣기 좋은 완벽한 영어 발음이 나왔다.

나강인이 손가락을 다시 까닥였다. 문장 네 개가 옆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문장 네 개가 나타났다. 적당한 게 없었다. 다시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번에는 원하는 게 있었다.

"벤자민 씨가 등장하는 부분은 여러 번 따로 촬영한 후에 전체 액션과 같이 편집해야 합니다."

"그럼 조금 전에 하신 설명은?"

"액션 팀 위주로 설명한 거죠."

"아…. 어쩐지 바뀐 상황에서는 제가 직접 연기할 부분이 너무 없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벤자민이 활짝 웃었다.

"흐흐. 제가 오늘 진짜 멋진 연기를 보여주겠습니다."

"어제도 멋졌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밴자민이 웃으면서 생각했다.

‘무술만 잘하는 게 아니라 발성도 굉장히 정확하네? 사용하는 단어도 기품이 있어."

AI 전지인은 나강인이 영어로 말할 때 상대가 알아듣기 좋게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교정했다.

벤자민은 확신했다.

‘이런 억양과 발성으로 대사를 말하면, 관객들의 귀에 정말 선명하게 들리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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