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번갯불에 콩
나강인과 메트로폴리스 헌터 제작팀은 첫 번째 장소에서 순식간에 촬영을 마쳤다.
그들은 곧바로 장비를 챙겨 두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AI 전지인이 제안한 장소였다.
AI 전지인은 나강인이 고른 장소에서는 가상 카메라 여섯 대를 만들어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열 대의 가상 카메라가 홀로그램으로 표현되었다.
"지인아? 네가 고른 곳은 카메라가 더 많다?"
-더 완벽한 장소라 카메라를 더 제시했을 뿐입니다.
"대놓고 이러는 거 보면, 넌 정말 너무 사람이 됐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냐?"
나강인이 가상 카메라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 이미지들을 쓱 둘러본 후에 그중 하나를 골랐다.
"3번 카메라로 하자."
-3번 카메라의 촬영 예상 이미지를 확대합니다.
조그맣던 홀로그램 화면 하나가 즉시 100인치 크기로 커졌다.
나강인이 촬영팀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벤자민의 얼굴을 근접으로 촬영하면서 표정 변화도 넣읍시다. 카메라는 이쪽에 가깝게 배치하고요."
이렇게 중간중간 끼워 넣는 장면에는 격렬한 움직임이나 위험한 동작이 들어가진 않는다. 그래서 대역을 쓰지 않아도 된다.
"조명은 그쪽에. 조금 옆으로. 거기 그 각도로. 마이크는 지금 거기가 딱 좋습니다."
나강인은 이번에도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의 위치를 직접 지정했다.
그는 촬영장비를 설치할 위치와 장소를 고를 때 시간을 들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AI 전지인이 적절한 위치에 홀로그램으로 마이크와 조명 형상을 띄워놓았다.
나강인은 실제 장비가 그 홀로그램 영상과 잘 겹쳐지게 조정만 해주면 됐다.
덕분에 장비 배치는 금방 끝났다. 나강인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찍읍시다."
앤서니 피트 감독이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내가 좀 바빠서."
이번에도 대사도 없이 벤자민의 표정 연기만 찍으면 돼서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앤서니 피트 감독이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돌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급하게 촬영을 했는데…."
벤자민이 영상을 같이 보며 말했다.
"좋은데요?"
"그러게요. 이게 왜 완벽하지?"
나강인은 이미 다음 지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재빨리 걷어서 나강인을 따라갔다.
다음 지점에서는 AI 전지인이 먼저 제안했다. 대본 번역본도 같이 보여주었다.
-기존 대본의 일부가 요원님이 오늘 연기한 액션의 이 부분에 적용 가능합니다.
"그럼 써먹어야지."
-디테일한 부분은 요원님이 조정하십시오.
나강인이 그 홀로그램 입체영상 훑어보았다.
"간단하네."
-간단한 동작이지만, 설명할 문장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돼."
나강인이 액션을 어떻게 할지 궁리하는 척하며 한국어로 먼저 작게 말했다.
AI 전지인이 즉시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보여주었다.
나강인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원래 대본에 있는 장면을 하나 씁시다."
그는 어떤 동작인지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영어로 번역된 홀로그램 문장을 읽었다. AI 전지인이 발음과 발성을 교정했다. 그의 영어 발음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여기서 벤자민이 이렇게 미끄러지면서 멈추고, 카메라는 저기와 저기서 동시에 찍는 겁니다. 그런 후에 벤자민이 원래 대본의 대사를 말하는 거죠."
그가 영어로 말한 덕분에 감독은 물론이고 연기를 해야 하는 벤자민도 무슨 말인지 쉽게 알아들었다.
벤자민이 나섰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는 나강인이 시범을 보인 동작을 따라서 해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벤자민도 뭐가 문제인지 안다.
"보기엔 쉬웠는데, 막상 하니까 쉽지 않군요."
"음…. 그러니까 방금 동작에서 뭐가 문제냐면."
나강인이 스케치북에 벤자민이 해야 하는 동작을 그렸다.
손의 움직임을 AI 전지인이 보조했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순식간에 나왔다.
나강인이 그 위에 설명을 자세히 적으며 말했다.
"무게 중심을 이쪽으로 하면서 다리를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 팔 동작도 문제고요."
벤자민이 그림을 보면서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나강인 씨는 혹시 만화가도 합니까?"
AI 전지인이 얼른 영어로 된 추천 대답 네 개를 제시했다. 나강인이 그중 하나를 골랐다.
"스케치만 좀 하는 겁니다."
벤자민이 설명을 집중해서 듣고 다시 움직였다.
나강인이 벤자민의 바로 뒤에서 움직이며 동작을 실시간으로 교정해주었다.
충분한 설명과 실습 덕분에, 이제 벤자민은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벤자민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스타의 자리에 오른 배우다. 게다가 그는 액션 스타로도 유명했다.
그는 나강인이 시범을 보인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어? 됐다! 이렇게 하는 거군요! 그렇죠? 방금 느낌이 딱 왔습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90% 정도 재현했습니다. 나머지 10%를 채우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앤서니 피트 감독이 손뼉을 쳤다.
"100% 완벽합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가면 되겠어요!"
나강인은 90%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 바로 찍읍시다."
앤서니 피트 감독이 물었다.
"또 바로 촬영합니까?"
"내가 좀 바빠서."
이번 촬영은 앞에서 찍은 다른 영상들보다는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렸다.
하지만 영상의 길이는 어차피 10초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될 때까지 몇 번 다시 찍긴 했지만, 그래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괜찮은 영상이 나왔다.
나강인이 말했다.
"다음 장소로 갑시다."
그는 다른 장소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필요하면 시범도 보여주고 설명도 하고 스케치도 그려줬다.
이번에는 대사도 있었다.
아까 나강인과 싸운 배우들이 다시 모여 골목에 드러누웠다.
AI 전지인은 그 배우들이 아까 쓰러져 있던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배우들이 누운 자세가 아까와 조금 달랐다.
나강인이 그 배우들에게 말했다.
"다리 위치가 조금 바뀌었군요. 좀 옆으로 옮깁시다. 됐어요. 이쪽 분은 얼굴이 아까는 창백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멀쩡하지? 칼을 다시 던져야 하나? 아. 다시 창백해졌네요. 이제 찍읍시다."
이번에는 벤자민이 쓰러진 배우들을 상대로 몇 마디 던졌다.
나강인은 그렇게 촬영팀과 배우들을 데리고 골목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추가 촬영을 했다.
나강인이 골목을 벗어나기 전에 앤서니 피트 감독에게 말했다.
"추가 촬영분 중에 적당한 것만 골라 쓰시죠."
"뭘 고르고 뭘 버려야 할지…. 하, 하하."
제작팀은 드디어 골목을 벗어났다.
나강인이 선언했다.
"액션 사이의 추가 촬영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도 오늘은 여기까지."
주연 배우 벤자민이 급히 말했다.
"어? 나강인 씨. 시나리오에는 여기서부터 총과 칼을 들고 움직이는데요?"
"이 이후는 총을 쏘거나 칼로 베는 장면이 아닙니다만?"
"그렇긴 하죠. 남은 놈을 총과 칼로 압박해 정보를 캐내는 연기니까."
"그건 당연히 벤자민이 해야죠. 내가 오늘 도와줄 일은 다 끝났으니까, 난 이만. 내가 좀 바빠서."
나강인이 손을 가볍게 흔들며 돌아섰다.
벤자민이 급히 나강인을 불렀다.
"나강인 씨! 우리 다음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같이 찍읍시다!"
"내가 비행기를 싫어해서."
"무슨 그런 농담을 합니까? 하하하."
나강인이 그곳을 떠났다.
벤자민이 스태프에게 맡겨뒀던 스마트폰을 돌려받았다.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 추가 촬영이….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다 끝났네?"
앤서니도 시계를 급히 보았다.
"헐…. 진짜 한 시간도 안 지났어."
그들은 시계를 볼 틈도 없이 정신없이 촬영하며 골목을 지나왔다. 너무 많은 장면을 찍어서, 전체 촬영이 이렇게 빨리 끝난 줄은 몰랐다.
앤서니 피트 감독이 말했다.
"몇 시간은 찍은 줄 알았는데…."
벤자민이 물었다.
"감독님도 이렇게 빨리 찍을 수 있습니까?"
앤서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저 골목에서 단순히 촬영만 한 게 아닙니다. 카메라부터 조명에 마이크까지 다 새로 세팅하고 찍었습니다. 그 많은 씬을 이렇게 빨리 준비해서 찍는 건 불가능합니다."
"되던데요?"
"그러게요. 이게 되네요."
***
나강인이 떠난 후에도 촬영은 계속됐다.
앤서니 피트 감독은 골목 액션이 시작되기 전과, 액션이 끝난 후 골목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촬영했다.
그날 촬영은 예정보다 빨리, 해가 지기 전에 마무리됐다. 덕분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저녁은 각자 알아서 먹기로 했다.
***
앤서니와 벤자민, 엠마는 사전에 예약한 레스토랑 페넬로페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앤서니 피트가 말했다.
"알레이나에게 좋은 곳을 물어봤더니 이 레스토랑을 추천하더군요."
엠마가 요리를 먹으며 말했다.
"걔는 한국에서 오래 지내더니 좋은 곳을 아네. 여기 요리 맛있다."
벤자민도 동의했다.
"이 매콤한 요리가 정말 맛있어. 이거 이름이 뭐였지?"
"전장의 불꽃."
벤자민이 웃었다.
"이름부터가 나한테 딱 어울리는 요리야."
벤자민이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말했다.
"촬영이 일찍 끝나니까 여러모로 좋네."
엠마도 같은 생각이다.
"액션 촬영이 너무 빨리 끝났어. 이런 경험 처음이야. 감독님은 이럴 줄 알았어요?"
앤서니 피트가 요리를 열심히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강인 씨에게 빨리 찍는 능력이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다만 그건, 액션 촬영을 원 테이크로 할 때의 이야기였는데…."
벤자민이 말했다.
"오늘 추가로 촬영한 부분은 원 테이크가 아니었습니다만? 액션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나강인은 액션만 잘하는 게 아니더군요. 알레이나에게 들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엠마가 물었다.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소개했다고 했죠?"
"요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영화의 무술감독을 맡았다더군요."
"그 영화 제목이 뭔데요?"
"운명의 창."
"어디서 볼 수 있어요?"
"지금 상영 중이니까 극장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봐야겠다."
벤자민이 말했다.
"난 오늘 밤에 그 영화를 볼 거야. 그 영화에서는 액션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너무 궁금해."
세 사람 중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앤서니 피트뿐이다.
앤서니가 조언했다.
"영어 자막이 나오는 극장을 잘 찾아야 할 겁니다."
"찾으면 되죠."
엠마가 말했다.
"그런데 나강인이 오늘 하는 걸 보면, 무술감독이 아니라 아예 영화감독을 해도 잘할 거 같던데."
벤자민도 궁금했다.
"혹시, 나강인 씨에게 영화 자체를 만들 능력이 있을까?"
앤서니 피트 감독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 추가 촬영은 액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그런 경험 처음이었습니다. 엄청났죠."
"내가 어제 찍은 액션 촬영본을 어젯밤에 호텔에서 검토했는데, 그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잘 나왔겠죠."
"영상이 잘 나왔다는 건 어제 낮에 찍을 때 이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럼?"
"영상을 보다가,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
"게다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찍힌 영상들도 그림이 좋아요. 내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까?"
"처음부터 편집까지 고려해서 찍었다? 나강인 씨는 영화감독을 해도 되겠다?"
"와. 이 사람 뭐지? 천재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벤자민이 손뼉을 쳤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그 사람은 마치 머릿속에 영상이 어떻게 찍힐지 다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니까요. 거기다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요."
앤서니 피트가 말했다.
"나강인 씨는 좋은 시나리오만 있으면 영화감독으로 데뷔해도 될 겁니다. 오히려 왜 아직도 안 했는지가 궁금하군요."
"기회가 없어서였을까요?"
엠마가 손뼉을 쳤다.
"그러면 그 기회를 내가 소개해주면 되겠네? 좋았어. 그러면 나강인은 알레이나가 아니라 내 친구가 되겠네?"
앤서니 피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닙니다. 겨우 그런 방법으로 알레이나에게서 빼앗는 건 포기하는 게 좋아요."
"감독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미 내가 시도했거든요."
"네? 나강인한테 영화감독 자리를 제안했다고요?"
"그건 아니지만, 내 차기작의 액션 총괄을 제안했습니다."
"어머. 그래서요?"
앤서니가 아쉬워했다.
"단칼에 거절당했죠. 나강인은 관심조차 없더군요. 엠마. 당신이 뭘 제안하든, 그게 할리우드 대작 영화의 감독 자리 정도가 아니라면 안 통할 겁니다."
엠마가 혀를 찼다.
"쳇. 저예산 영화를 제안하려고 했는데."
벤자민이 물었다.
"참. 감독님. 그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거라니요?"
"기존 시나리오로도 액션을 찍어서 둘 중에 더 나은 걸 쓰겠다면서요. 내일 촬영까지 끝나면 기존 시나리오로 우리끼리 다시 촬영하는 건가요?"
앤서니가 피식 웃었다.
"굳이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인원과 예산, 촬영 기간으로는 나강인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지금 찍고 있는 영상이 극장에 걸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