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 미국식
앤서니 피트 감독이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식탁 위에 태블릿 PC를 올려놓았다.
"이건 오늘 촬영본인데, 보면서 이야기하죠."
그는 남자 주연인 벤자민이 액션 중간에 넣을 용도로 짧게 연기한 영상을 재생했다.
"어떻습니까?"
벤자민이 감탄과 자랑을 동시에 했다.
"캬아. 내가 표정 연기를 이렇게 잘합니다."
"잘했죠. 잘했는데, 그 잘한 연기를 가장 완벽하게 찍을 수 있는 위치에 카메라와 조명이 배치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잘 나온 거죠."
"카메라나 조명 위치를 고민도 안 하고 정해주던데요. 나강인 씨는 오늘 촬영한 골목 전체 이미지가 머릿속에 3D로 들어 있는 것 같았다니까요."
엠마가 벤자민의 영상을 보며 투덜댔다.
"되게 잘 나왔네. 나도 이렇게 찍어주면 좋잖아."
벤자민이 한마디 했다.
"엠마. 너 그거 지금 앤서니 감독님한테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야."
엠마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내 말은, 나도 액션을 연기할 때 이야기야. 난 이런 상황이 없어서 아쉽다는 거지. 감독님. 내 마음 아시죠?"
앤서니 피트가 피식 웃었다.
"내일 액션 촬영은 엠마도 하니까 그때 알아서 잘 해보던가요."
"어머. 삐지셨나 보다."
앤서니가 말을 돌렸다.
"이건 카메라 배치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려고 재생한 거고, 진짜 보여주고 싶은 건 다른 겁니다."
그가 새로운 영상을 띄웠다. 이번에 나온 건 촬영용 드론이 공중에서 나강인의 뒤를 따라 날아가면서 찍은 영상이었다.
"여기 골목 곳곳에 배치된 카메라들 보이죠? 나강인 씨는 전체 액션을 멈추지 않고 한 번에 진행했는데, 모든 카메라가 정확히 필요한 장소에서 최고의 영상을 찍었습니다. 현재 한국에 들어온 인력과 장비로는 이것보다 나은 액션을 만들 수 없습니다."
벤자민이 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와. 하늘에서 보니까 또 느낌이 새롭네요. 감독님. 이 드론 영상도 영화에 쓸 겁니까?"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사장이자 대표 셰프인 오규철이 그들의 테이블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서비스입니다."
벤자민이 웃었다.
"오. 땡큐. 셰프."
오규철이 영어로 말했다.
"벤자민 씨. 엠마 씨. 제가 두 분 팬입니다. 하하하."
엠마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사람 많죠."
오규철의 눈이 태블릿PC로 슬쩍 향했다. 드론이 날아가면서 찍은 나강인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오규철이 한국어로 혼잣말을 했다.
"어? 강인 씨가 할리우드 영화에도 참여하나?"
앤서니 피트 감독은 한국어를 할 줄 안다. 그가 물었다.
"나강인 씨를 압니까?"
오규철이 영어로 대답했다.
"잘 알죠. 나강인 씨는 우리 레스토랑의 단골입니다."
앤서니는 바로 납득했다.
"아. 그래서 알레이나가 이 레스토랑을 아는 거였군."
의문은 남았다.
"이 사람이 나강인 씨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가면을 썼는데?"
나강인은 영상 속에서 벤자민의 액션 대역을 맡아 연기했다.
오규철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렇게 멋지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강인 씨뿐이니까요."
옆에서 벤자민이 자리를 권했다.
"정말 잘 아시나 보다. 여기 앉으시죠.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오규철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대표 셰프라서, 한 자리에 계속 있는 건 좀…."
"아…."
"싸인을 우리 업장에 걸어둬도 된다면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지만요."
앤서니가 얼른 제안했다.
"제가 싸인을 해드리겠습니다. 벤자민과 엠마의 이름도 남겨서."
"콜."
오규철은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대신에 옆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벤자민이 말했다.
"나강인 씨의 액션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최고죠. 그걸 우리는 나강인표 실전 리얼 액션이라고 부릅니다."
"아. 실전 리얼 액션. 우리도 그걸 어제부터 경험하고 있습니다. 진짜 감탄했습니다."
당장 오늘 촬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나왔다.
오규철은 방송 출연을 곧잘 하는 방송인이다. 나강인과 같이 방송한 적도 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들은 것도 많다.
그런데 그의 본업은 요리사다. 기왕이면 그쪽 이야기를 자랑하고 싶었다.
오규철이 물었다.
"그런데 나강인 씨와 같이 일하는 중이면, 나강인표 밥차도 먹어봤습니까?"
벤자민이 물었다.
"예? 그게 뭡니까?"
"저런. 쯧쯧. 그걸 모르시네."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오규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강인 씨는 액션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영화 촬영도 잘하는 거 압니다."
오규철은 당황했다.
"예? 촬영이요?"
"어? 그게 아니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당연히 요리죠."
"네?"
오규철이 벤자민의 앞에 놓여있는 요리를 가리켰다.
"지금 드시는 그 요리의 이름은 전장의 불꽃입니다. 맛이 어떻습니까?"
"최고죠."
"그 요리의 원형은 나강인 씨가 만들었습니다. 이건 그 요리를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만든 거지요."
"와…. 이 요리를 원래는 나강인 씨가? 그럼 원형은 혹시 더 맛이…."
"조리법은 다릅니다. 저는 동급의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아, 하하. 그렇겠죠."
엠마의 앞에도 같은 요리가 놓여있다. 그녀가 물었다.
"나강인이 요리를 그렇게 잘해요?"
오규철이 엄지를 세웠다.
"진짜 쩝니다."
엠마가 앤서니 감독을 돌아보았다.
"감독님. 나도 그 요리 먹고 싶어요."
"우리 촬영 현장에는 한국식 밥차가 없습니다. 식사는 주문해서 먹거나 촬영장소 근처 식당에서 먹으니까요."
"그래서 안 돼요?"
옆에서 오규철이 설명했다.
"밥차가 없으면 현장에서 요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내일 밥차 부르면 되겠네."
"예?"
"얼마면 돼요? 내가 부를게요."
"어…."
벤자민이 옆에서 물었다.
"밥차를 부른다고 해서 나강인 씨가 요리를 만들어줄까?"
"요리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면 하겠지."
오규철이 옆에서 말했다.
"나강인 씨는 남이 만든 요리를 먹는 걸 좋아합니다만?"
"네?"
"그래서 가끔 밥차에서 요리할 때는 다들 환성을 지른다더군요."
엠마가 시무룩해졌다.
"아…. 진짜 먹어보고 싶은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오규철이 팁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간식은 곧잘 만들어줍니다."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간식?"
"나강인 씨는 과자나 디저트도 정말 잘 만듭니다. 그리고 참 빨리 만들죠. 멀리서 오신 손님들인데, 잘 부탁하면 그 정도는 만들어줄지도 모르죠."
오규철이 세 사람 옆에만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서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거기까지만 말해주고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웃었다.
‘미국엔 그런 거 없을 거다. 후후.’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가기 전에 오규철과 사진을 찍어주었다.
앤서니 피트 감독은 A4지에 글을 적고 싸인도 남겼다.
[여기 진짜 맛집입니다. 벤자민과 엠마와 같이 먹고 갑니다. 할리우드 영화감독 앤서니 피트.]
그들이 나간 후에, 오규철은 A4지에 써진 글과 싸인을 보며 당황했다.
"이거…."
옆에서 직원이 보면서 말했다.
"저 외국 영화감독님이 전부 한글로 쓰고 가셨네요?"
"사람들이 이걸 보면 가짜라고 생각하겠지?"
"당연하죠. 이것도 사진 찍어서 우리 레스토랑 블로그에 올릴까요?"
"일단 놔둬 봐. 올리는 건 생각 좀 해보고."
****
세 번째 촬영일에 나강인이 현장에 도착했다.
나강인이 할리우드 영화 ‘메트로폴리스 헌터’에 참여하기로 한 건 오늘까지다.
그는 저녁때 현장에 도착했다. 오늘 액션은 야간에 촬영한다.
벤자민이 나강인을 발견하고 두 손을 번쩍 들며 반겼다.
"나강인!"
"왜 이렇게 반가워합니까?"
"어젯밤에 극장에서 운명의 창을 봤습니다!"
"좋은 영화지요?"
벤자민이 활짝 웃었다.
"정말 멋진 영화였습니다. 그런 명작을 볼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액션도 정말, 정말 대단했습니다!"
"액션은 그 정도는 아닌데."
AI 전지인이 한마디 했다.
-그건 겨우 훈련 교본용 영상 수준이었습니다. 훗.
"지인아. 너 이제 그렇게 웃는 것도 하냐?"
엠마도 조르르 다가왔다.
"나도 그 영화 봤어요."
"두 분이 같이?"
"당연히 다른 상영관에서 봤죠. 보면서 진짜 감동했어요. 그 영화에는 소울이 있어요."
"변형찬 감독님이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엠마가 제안했다.
"나강인! 우리 할리우드 가요! 내가 제작사도 소개해주고 투자자도 소개해줄게요!"
"내가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서."
"네? 무슨 그런 농담을…."
"농담 아닌데."
엠마는 당황했다. 거절 이유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벤자민이 옆에서 물었다.
"어? 그럼 정말로 비행기가 싫어서…."
"안 좋아합니다."
엠마가 얼른 말했다.
아! 그러면 배 타고 오면 되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일단 미국에 한 번 오고 나면…."
"배도 싫어해서."
"네?"
***
나강인은 촬영 직전에 현장에 도착한 건 아니다. 촬영장에서 나갈 때는 일이 끝나자마자 가곤 하지만, 올 때는 시간 여유를 두고 온다.
그런데 그는 촬영장 한쪽에서 익숙한 밥차를 발견했다.
"어?"
나강인은 김병호가 피시방에서 손을 다쳤을 때 그의 밥차를 잠깐 도와주다가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 이후로도 김병호는 나강인이 참여한 작품에 밥차를 몰고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김 사장님이 여기 오신 거 우연인가요?"
"오규쳘 셰프님 소개로 왔는데, 와보니까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 곳이네요? 저도 당황했습니다."
"거의 다 미국인일 텐데 메뉴는 맞춰서 가져오셨고요?"
"아니요. 식사는 따로 주문했으니까 간식거리나 좀 준비해달라던데요?"
"뭐지?"
엠마가 쓱 다가왔다.
"제가 레스토랑 사장님한테 부탁해서 불렀어요."
"간식은 사 먹으면 될 텐데 굳이 왜?"
"잡탕 과자라는 게 그렇게 맛있다던데."
벤자민도 쓱 다가왔다.
"저도 기다렸습니다. 하도 맛있다고 해서요."
AI 전지인이 영어로 된 문장 하나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질문이었다. 나강인과 궁금해하는 게 같았다.
"오 셰프님이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잡탕 과자에 대한 것만…. 뭐가 더 있습니까?"
앤서니 피트 감독도 다가왔다.
"엠마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요. 하, 하하."
나강인이 밥차를 보았다. 만드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지난 사흘 동안 하루에 1억씩 받고 있습니다. 이런 물주가 또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데 서비스로 잡탕 과자 정도는 만들어주시죠.
"그럼 스페셜 잡탕 과자로 할까?"
-밥차의 재료를 확인했습니다. 티라미수 스타일 잡탕 케이크도 가능합니다.
"돈도 많이 받았는데 둘 다 하자."
아직 야간 액션 촬영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나강인이 밥차에 들어가 스페셜 잡탕 과자와 티라미수 스타일 잡탕 케이크를 만들 준비를 했다.
나강인은 재료를 대량으로 챙기며 물었다.
"지인아. 이거 외국인들 입맛에도 맞을까?"
-야전 전술 요리는 세계인의 입맛에 두루 맞습니다만, 지역별로 세팅을 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동안은 한국식 세팅을 사용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미국식으로 가자. 다들 미국에서 왔으니까 태어난 국가가 어디든 미국식을 잘 먹겠지."
-야전 전술 요리 스킬의 세팅을 조정하겠습니다.
야전 전술 요리의 특징 중 하나는 빠르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강인이 많은 양의 잡탕 과자와 케이크를 금방 만들어서 내놓았다.
그런데 조리 시간이 너무 빨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실망했다. 대충 만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벤자민이 스페셜 잡탕 과자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이건 미군 전투식량에 들어가는 크래커처럼 생겼는데? 그것보단 좀 두툼하긴 하지만, 맛은 비슷하겠지."
엠마가 물었다.
"벤자민. 미군 출신이었어?"
"아니. 미군이 나오는 영화를 찍었지."
"아. 그 외계인하고 미군이 싸우는 영화?"
"그때는 실감 나게 찍으려고 전투식량을 가끔 먹었거든."
벤자민이 잡탕 과자 하나를 먹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어제 그 레스토랑 셰프의 장난에 속았…. 어? 이거, 생긴 건 전투식량 크래커인데, 왜 이렇게 맛있지?"
엠마는 케이크를 골랐다.
"군대 전투식량보다는 맛있는 거겠지. 좀 전에 보니까 너무 대충 만들더라. 이렇게 금방 대량으로 만들면…. 왜 이렇게 맛있는데!"
그녀의 눈은 이미 동그래져 있었다.
"와. 이건 진짜…. 내 단골 디저트 가게의 케이크보다 맛있는데?"
"이 과자도 그래."
다른 스태프와 배우들도 감탄했다.
"장난 아니게 맛있다."
"이제부터 이건 내 영혼의 과자야. 앞으로 과자는 이것만 먹어야지."
"파는 게 아니라 수제품이던데?"
"아…."
나강인이 엠마에게 다가왔다. 엠마는 케이크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과자도 맛을 보았다.
"이것도 맛있어!"
엠마는 이 영화의 여자 주연 배우다. 당장 오늘 밤에도 촬영 스케줄이 있다.
나강인이 경고했다.
"그거 고칼로리인데."
"네? 어느 게요?"
"둘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