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복귀
할리우드에서 돈을 쏟아부어 만들어도 망할 영화는 망한다.
‘스파이 셰프’는 돈을 쏟아부은 것도 아니고 망할 이유도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액션이었다.
톰 감독이 말했다.
-스파이 셰프는 액션만 좋았어도 흥행에 실패하진 않았을 거라는 게 당시 평가였다고.
알레이나도 그런 말은 들었다.
"알죠."
영화에 문제가 좀 있는데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경우는 곧잘 있다. ‘스파이 셰프’는 액션이라도 멋있게 나왔으면 본전치기는 했을 거란 평가를 받았다.
-내 차기작의 액션을 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야. 그러니까 이리로 좀 보내줘.
"내 친구는 누가 부른다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액션 담당자로 일할 기회인데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지금 아쉬운 건 톰이다.
그가 지난번에 만든 영화의 액션은 엉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새 영화를 만들려면 그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최근에 그는 영화사에서 유출된 ‘메트로폴리스 헌터’의 한국 액션 1차 편집본 영상을 보았다. 유출된 분량은 짧았는데도 그는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 사람을 데려오면 영화사와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어!’
그는 나름대로 인맥을 동원해 그 액션을 담당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다 알레이나가 그 사람을 앤서니 피트 감독에게 소개했다는 걸 알아냈다.
알레이나는 ‘스파이 셰프’에 출연했다. 연락처도 안다.
그래서 그는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하며 알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톰은 당황했다.
-그, 그래?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내 친구를 거기로 부를 방법이요? 없어요."
-그래도 뭔가 방법이….
"아! 방법이 하나 있긴 있죠."
-뭔데!
"톰 감독님이 영화를 한국에 와서 찍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톰이 머뭇거렸다.
-아니, 그건 좀…. 영화를 굳이 한국에 가서 찍을 필요까지는….
"앤서니는 차기작을 찍을 때 그럴 생각이 있던데."
-어? 진짜?
"아예 한국에 미국 느낌의 세트장을 만들어서 찍는 걸 고려하던데요? 그렇게 해도 미국에서 찍는 것보다는 돈이 덜 들 거래요."
-에이. 설마 그러려고.
"액션만 그대로 쓰고 배경 건물은 CG로 처리하면 되잖아요."
톰은 믿지 않았다.
-실전 리얼 액션이란 게 대단한 건 알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데….
"내 이야기가 아니라 앤서니 이야기예요. 나도 들은 거니까 참고만 해요. 내가 좀 바빠서 끊을게요."
-어? 알레….
알레이나가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다시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으며 혼잣말을 했다.
"광돌이랑 같이 일해본 앤서니랑, 영상만 본 톰 감독님은 반응이 많이 다르네. 앤서니는 다음 영화의 절반쯤은 한국에서 찍을 생각이던데."
그가 할리우드 영화감독 톰과 통화하는 동안 게임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밀렸다.
"아오. 정글 차이로 어차피 질 게임이었는데, 이러면 나 때문에 진 것 같잖아. 왜 하필 지금 전화한 거야!"
***
지금까지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을 수술로 치료하는 데 성공한 건 딱 세 번이다.
그 세 사람은 치료 후에 공통된 특징을 몇 가지 보였다. 그중 하나가 놀라운 회복 속도였다.
이정호가 알레이나의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다.
"좋구나. 완전히 회복했다고 봐도 되겠어. 아니,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알레이나가 신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공식적으로 활동해도 돼요?"
"이미 하고 있잖아."
"지금은 드라마에만 가끔 잠깐 나오잖아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출연한다고요."
"더 해도 상관없다. 다른 케이스에서도 완치되고 나면 체력 회복력이 좋아졌는데, 너도 그런 것 같으니까."
이정호의 딸 이민지가 바로 그 케이스다.
"많이 먹으면 회복이 더 빠를 거다."
"그럼 당장 본격적으로 활동할게요."
"나는 괜찮다고 보긴 하는데…. 혹시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찾아오고."
"당연하죠!"
"어디부터 하게?"
"전 연기도 하지만 본업은 가수잖아요. 시작은 당연히 음악방송으로 해야죠."
***
공중파 TV의 심야 음악방송 PD가 방송국 근처 식당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린 망했다. 도성훈이 음주운전이라니."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가수가 바로 오늘 새벽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다. 그들은 밥을 먹으러 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메인 작가가 말했다.
"이럴 때는 우리가 생방송인 게 다행이네요."
"어디가 다행인데?"
"미리 찍어놓은 영상이 없으니 출연자만 교체하면 되잖아요."
"도성훈이 날아갔는데 누구로 땜빵하게?"
"우리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가수는 많으니까, 지금이라도 부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도성훈이 나온다고 그쪽 팬클럽에서 홍보를 많이 했어. 신인을 부르면 땜빵이 되겠냐고."
"그럼 도성훈과 비슷한 급으로…."
"생방송이 오늘 밤인데 비슷한 급 중에 누가 갑자기 스케줄이 되겠냐? 된다고 해도 그 급이 굳이 땜빵으로 나오고 싶겠어?"
"아…."
"급은 못 맞춰. 그러니까 피해를 줄일 방법이라도 찾아보자."
이 자리에는 음악방송 진행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음악방송의 진행자는 가수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그냥 내가 노래할까?"
"형님이요? 오늘 막방 하고 진행자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게요?"
"야. 나 가수야. 예전에는 엄청 잘나갔다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형님 포지션이 진행자에서 출연자로 바뀌면 시청자 인식도 그렇게 바뀌어요. 그럼 다음 방송부터는 힘들어져요."
"그렇겠지? 어렵네."
그 식당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강인이 밥을 먹었다.
알레이나 민이 변장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아서 말했다.
"내가 쏘는 거니까 메뉴판에 있는 거 다 추가로 시켜도 돼."
AI 전지인이 말했다.
-여기 맛있습니다. 광년이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어쩐 일로 네가 쏘냐?"
"나 오늘 완전 건강해졌다고 판정받았어. 그래서 쏘는 거야."
"굳이 방송국 근처에 와서 먹어야 하냐?"
"복귀방송 해야 하는데 어디 나갈지 아직 못 정했거든. 그래서 일단 아무 방송국이나 와봤어."
"음…. 한국에서 복귀하게?"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건데 당연한 거 아냐?"
"조건은?"
"음악방송."
"복귀방송인데 네가 주인공이어야지?"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빠를수록 좋아."
나강인이 다른 테이블을 슬쩍 가리켰다.
"저 프로는 어때? 가수를 초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하는 심야 음악방송인데, 생방송이다. 방송일은 오늘 밤이고."
"아. 나도 저 아저씨가 진행하는 방송 알아. 근데 방송이 오늘 밤인데 지금 어떻게 들어가?"
"방금 슬쩍 들어보니까 오늘 초대가수가 새벽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다네? 지금 대신할 사람을 못 찾아서 저렇게 죽상이야."
"응?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말하는 게 들려?"
"들리더라."
"네 귀에 도청장치라도 있어?"
"캔디가 있다."
"근데 나보고 음주운전자 땜빵을 하라고? 나 알레이나 민이야."
"빠를수록 좋다며? 싫으면 말고."
***
제작진은 밥을 먹으러 식당에 왔지만, 갑자기 터진 사고 때문에 입맛이 없었다.
밥그릇 앞에서 깨작대던 막내 작가는 스마트폰에 이메일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화면을 켰다.
이메일을 열어 내용을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마지막까지 읽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니님. 우리 큰일 났어요."
피디가 물었다.
"왜? 회의실에 불이라도 켜놓고 나왔냐?"
"알레이나 민이 이메일을 보냈어요."
"우리가 그렇게 연락을 시도했는데 대답 한 번 없더니, 답장을 주긴 주는구나. 뭐라는데?"
"우리 방송에 출연해달라고 부탁한 거요. 한다는데요?"
"어? 진짜? 포, 폰 줘봐!"
막내 작가가 얼른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피디가 이메일의 앞부분만 보고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좋았어! 오늘 방송은 말아먹더라도, 이러면 다음 방송에서 다 복구할 수 있어!"
옆에서 진행자가 급히 물었다.
"언제 나오는데? 다음 방송에 바로 나올 수 있는 거 맞아?"
지금 화면에는 이메일의 앞부분만 보였다. 이미 뒷부분까지 다 읽어본 막내 작가가 말했다.
"빠를수록 좋다고…."
"다음 주에 출연 가능하대?"
"그게 아니라, 오늘도 된다고…."
피디가 황급히 이메일을 넘겨보았다.
"지, 진짜다! 살았다!"
***
알레이나가 이메일을 간단히 보냈다. 잠시 후에 제작진 쪽에서 환성이 터졌다.
나강인이 말했다.
"저 사람들 정말 좋아하네?"
알레이나가 손등으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살짝 웃었다.
"훗. 봤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밥이나 먹자."
"응."
***
그날 밤 공중파 TV 심야 음악방송이 시작됐다.
방송사 게시판에 댓글이 듬성듬성 올라왔다.
-오늘 도성훈 나온다며?
-새벽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는데 나오면 에바죠.
-그럼 오늘은 게스트 없이 가나요?
-설마요. 시간 남는 가수 아무나 불러서 땜빵 하겠죠.
진행자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지내시는 분이시죠. 그동안 공식활동은 하지 않고 드라마에만 잠깐 나오셨는데요. 그래서 저희가 음악방송 중에서는 처음으로 모셨습니다."
사회자가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알레이나 민입니다."
무대 객석이 웅성거렸다. 방송을 직관하러 온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 알레이나 민?"
"진짜야?"
조명이 추가로 켜지면서 어두웠던 무대 한쪽이 밝아졌다. 그곳에 서 있던 알레이나 민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방송 게시판에 댓글이 미친 듯이 붙었다.
-진짜 알레이나 민이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아니, 이게 말이 돼? 도성훈 땜빵이 알레이나라고?
-이러면 땜빵이 아니지! 이쪽 본게임이지!
-이러면, 도성훈이 음주운전으로 빠진 게 나쁜 일은 아니네요?
-어디서 물을 타? 알레이나가 쩌는 구원투수인 거지, 도성훈이 잘한 건 아닙니다.
-구원투수로 메이저리그 현역 파이어볼러가 온 거네.
알레이나는 노래를 한 곡 부르고 진행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진행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참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그녀도 예쁘게 웃었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원래 잘하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발음이 너무 좋으신데요?"
알레이나는 최근에 그런 말을 몇 번 들었다. 게다가 한국어만이 아니라 모계 쪽인 프랑스어 실력도 좋아졌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한국에 와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한국어가 늘었나 봐요."
"알레이나 씨의 할아버지께서 한국분이신 건 저희도 압니다. 그런데 알레이나 씨는 한국에 와서 꽤 오래 머물고 계시면서 활동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한국에 친구 많아요. 푹 쉬고 잘 놀았죠."
"아. 친구요. 제가 듣기로는 신은하 씨하고도 아는 사이라면서요?"
"음…. 은하 씨는 같이 게임 하는 사이?"
진행자가 웃었다.
"하하하. 게임을 좋아하십니까? 주로 어떤 게임을 하십니까?"
"전설의 레전드요."
"아아…."
"무슨 게임인지 잘 모르시나 보다."
"하, 하하."
방송 게시판에는 댓글이 계속 붙었다.
-전설의 레전드라니.
-게임에서 상대편 가족관계 묻는 말을 많이 하다가 한국어 실력이 더 좋아진 건 아니겠지.
전설의 레전드는 다섯 명씩 팀을 이뤄 싸우는 게임이다.
-주력 포지션이 어딘지 궁금하다.
-전설의 레전드는 연예인 중에서는 김유찬이 잘하는데.
-김유찬이 게임도 해요?
-엄청 잘해요. 김유찬은 저번에 게임대회에 나가서 우승도 했어요.
이 방송은 생방송이지만, 워낙 급하게 출연자가 바뀌는 바람에 방송 대본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다. 알레이나와의 대화는 진행자가 알아서 잘 풀어나가야 한다.
진행자가 물었다.
"그 게임은 좀 하십니까?
알레이나는 한국에 와서 외부 활동을 중단한 기간에 게임을 붙들고 살았다. 피시방도 많이 다녔다. 그녀는 게임 부심이 꽤 있다.
알레이나가 씩 웃었다.
"쫌 많이 잘해요."
"하하하. 좀 많이요? 상상이 잘 안 갑니다."
"진짜예요. 저 게임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어요."
"아. 미국에서요?"
게이머의 실력은 미국보다 한국을 훨씬 더 쳐준다. 알레이나는 한국 게임대회에서 우승했다.
"아뇨. 한국에서요."
방송 게시판에 댓글이 붙었다.
-알레이나가 게임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이 있어?
-어? 난 왜 몰랐지?
-알레이나가 우리나라에 온 후에 어떤 게임대회가 있었지?
-당연히 아마추어 게임대회일 겁니다. 프로 선수로 대회에 나갔으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잖아요.
-어? 잠깐. 위에 댓글에 누가 김유찬이 나가서 우승한 게임대회가 있다고 썼는데?
-하이 캐슬 게임대회!
-맞다! 그거 알레이나가 한국에 온 후에 열린 대회입니다!
-그 대회 나도 알아요. 그때 김유찬과 같은 팀 중에 두 명이 누군지는 끝내 안 밝혀졌어요.
-어어어! 지금 검색해봤는데! 그 두 명 중 한 명의 닉네임이 레이 멕시멈입니다!
-알레이나 민? 레이 맥시멈? MIN? MAX?
-이 사람이다!
-레이 맥시멈이 알레이나 민이다!
-이거 실화냐?
-와! 나 그 경기 인터넷 생중계로 봤는데!
그때는 게임 화면만 인터넷으로 중계됐다. 참가자의 얼굴은 인터넷 중계에 나온 적이 없다.
그래도 이쯤 되면 그녀가 레이 멕시멈이라는 닉네임을 썼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이 누나다! 이 누나가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게임도 잘하는 누나다!
그 게임은 닉네임만 알면 과거 게임 전적을 인터넷으로 간단히 조회할 수 있다. 시청자들이 재빨리 조회했다.
-어? 알레이나 민의 게임 플레이 시간이….
-와아. 이 정도면 게임 폐인 수준인데?
-게임만 하느라 그동안 활동을 못 했나?
-알레이나 누나! 그동안 작곡 배우고 공연 준비하느라 활동을 못 했다면서요! 날 속였어!
-또 속았구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