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충돌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은 찜찜했다. 대포폰으로 와야 하는 문자가 그의 개인 휴대폰에 들어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차 이사 이거, 설마 나보고 힘을 써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 있으면 대포폰을 꺼놓지도 않았다.
‘함부로 힘을 썼다가는 나까지 죽을 텐데 내가 왜?’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은 기관 한두 곳 정도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있다. 하지만 모든 기관을 틀어막을 수는 없다.
현재 여러 기관에서 차 이사를 잡으려고 나섰다. 그런 상황에 함부로 개입하면 틀어막지 못한 기관에서 차 이사를 잡으려고 그의 뒤를 캘 수 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차 이사는 지금 궁지에 몰렸잖아. 나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빽도 다 동원하면 혹시 모르나?’
정치권의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면 막을 수 있는 곳이 늘어난다.
‘누가 또 차 이사의 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 틀어막는 건 어려울 텐데?’
이 연락을 무시하고 싶었다.
‘지금 차 이사랑 잘못 엮이면 망하는데….’
하지만 무시할 수가 없다.
차 이사가 대포폰이 아니라 그의 일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엔 전화를 걸지도 몰라.’
그러면 일이 더 커진다. 차 이사가 붙잡히면 경찰이 통화 내역을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다.
보좌관이 물었다.
"의원님. 표정이 왜…. 무슨 문자입니까? 혹시 심각한 일입니까?"
김석명이 얼른 둘러댔다.
"어? 아니야. 보이스 피싱 전문가 김미영 팀장이 보낸 문자네? 얘 아직도 안 잡혀갔나 해서 보던 거야."
"예전에 체포됐습니다. 김미영 팀장도 짝퉁이 있나 봅니다."
김석명이 일부러 말을 돌렸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그 새끼가 그렇게 유명해? 이름이 나 뭐라고?"
"나강인입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나강인이 액션을 맡으면 대박이 난답니다."
"그렇게 잘나가는 새끼가 왜 구출 작전처럼 위험한 일을 굳이 하는데? 그때 파티장에 무장 테러리스트가 많았는데 거길 혼자 쳐들어왔잖아."
보좌관이 그때 일을 생각했다.
"혼자서 방탄조끼와 방패로 적의 총탄을 막아가며 싸웠죠."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죽을 수도 있었잖아."
"어…. 명예 같은 거 아닐까요?"
"명예를 원하는데 얼굴을 가리는 헬멧을 쓰고 싸우냐?"
"그, 그러게요."
김석명은 차 이사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것부터 해결해야겠어.’
"알았어. 난 퇴근할 테니까 나가 봐."
보좌관이 즉시 일어났다.
"김 비서에게 차를 대기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운전할 테니까 됐어."
"예? 어딜 가시려고…."
김석명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너, 수상한데?"
보좌관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즐거운 밤 되십시오."
***
김석명은 혼자 차를 몰고 국회의사당을 떠났다.
그는 영등포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먼저 들렀다.
그곳은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사무실이 아니다. 문앞에 붙여둔 간판도 가짜였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이곳을 월세로 빌렸다.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고, 월세는 현금을 년 단위로 지급해서 은행 거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낡은 건물에는 CCTV조차 없었다.
그곳은 김석명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물건을 두는 곳이다.
그는 수사기관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들키면 안 되는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그 사무실을 사용했다.
사무실 안에는 책상, 의자, 소파, 그리고 튼튼한 금고가 하나 있었다.
"여기 자주 오면 안 좋은데…."
그는 투덜대며 금고의 문을 열었다.
금고 안에는 서류와 돈, 금괴 등이 있었다. 구형 휴대폰도 세 개가 있었다.
그는 휴대폰에 붙여놓은 메모지를 확인하고 ‘차’라고 써진 것을 챙겨 그 사무실을 벗어났다.
***
그가 아까 받은 [2100]이란 문자는 오후 9시에 전화하겠다는 뜻이다.
김석명은 밤 아홉 시에 마스크를 쓰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대포폰을 켰다. 잠시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편은 말이 없었다.
김석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김입니다."
상대편에서 그의 음성을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락이 어렵군요. 휴대폰을 꺼놓았나 봅니다.
김석명은 차 이사가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이 대포폰을 계속 꺼놓았다.
"오해입니다. 요즘 분위기가 안 좋아서, 휴대폰을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보관해서 그런 겁니다."
-선수끼리 이러지 마시지. 왜 아무도 안 믿을 말을 합니까?
김석명이 짜증을 냈다.
"허.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봅시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이 누구 책임이요? 차 이사가 들켰으니까 생긴 문제잖아. 괜히 나까지 위험해졌다고!"
-그래서 고객분들에게 피해를 안 끼치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합니다. 그럼 도와주셔야지. 내가 잡히면 의원님도 많이 곤란해질 텐데.
곤란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 경력이 끝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조용히 사라지려는 사람이 내 개인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 날 협박하는 건가?"
-다른 사람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슬쩍 꺼내서 문자 한 번만 보내고 기록을 삭제한 후에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쪽에서 먼저 추적당할 일은 없습니다만?
"그, 그래요? 커흠. 역시 차 이사는 꼼꼼하군. 어쨌든, 내가 경찰수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엔 사이즈가 워낙 커서, 그랬다간 나도 의심받아요."
-설마 그런 걸 요구하겠습니까? 경찰을 막으면 다른 기관들이 눈치채고 의원님을 이용해서 날 잡으려고 할 텐데요?
김석명이 다시 짜증을 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락한 거요?"
-마지막 거래 대금을 아직 못 받았습니다만?
"어? 어…."
이건 김석명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거 받으러 올 여유가 없을 줄 알았는데?’
"커흠. 그건 내가 떼먹으려던 게 아니라, 돈을 보낼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휴대폰을 꺼두셨나?
"아니라니까. 거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못 믿나. 내가 전처럼 금괴로 준비해 뒀다니까."
-그 금괴는 안 받고 넘어갈 테니까, 뭘 좀 알아봐 주시죠.
김석명은 이번 일에서 발을 빼고 싶었다.
"어…. 이번에는 경찰의 수사 정보를 빼내기가 어려워요. 이 상황에서 경찰정보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내가 의심을…."
-용산에서 전술 비행 슈트를 입고 날아다닌 놈. 그놈 정체가 필요합니다.
김석명은 당황했다. 차 이사가 그 정보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어? 그놈?"
-김 의원님은 그때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 그놈이 누군지 찾아본다고 해도 의심받지 않겠지요?
"그야 그렇지."
-대답이 빠르신데? 혹시 이미 누군지 알아보셨나?
"어…."
-맞군요. 그놈, 누구입니까?
김석명은 용산 사건이 누구 짓인지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미 체포한 오르카의 이름만 알려지고, 차 이사의 이름은 언론에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누구 짓인지 알았다. 갑자기 화가 났다.
"잠깐. 그러니까 그것도 차 이사가 벌인 일이란 거지? 내가 거기 있는 걸 알면서 거길 쳐? 그런 주제에 감히 나한테 정보를 달라고?"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나한테는 그 파티에 가지 말라고 했어야지!"
-했습니다만? 대포폰을 켜봤으면 알 텐데요?
"어?"
김석명이 급히 대포폰에 들어온 문자를 확인했다. 차 이사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
[드래곤 마운틴 P X]
-용산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만?
"험험. 내가 이걸 미처 못 봐서…."
-그래서, 그놈은 누구입니까?
"나도 먼저 좀 물어봅시다. 왜 그놈 정체를 알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한국을 떠나는 데 방해가 되니까.
김석명의 표정이 밝아졌다.
‘차 이사가 한국을 떠나서 잠수 타면 나야 좋지.’
"그럼 그놈만 처리하면 한국을 뜰 겁니까?"
-바로 뜰 겁니다.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김석명은 차 이사가 어떻게 사라질 건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건 알아봤자 귀찮은 일만 생긴다고 생각했다.
"험험. 알겠습니다. 그놈의 이름은 나강인인데."
-나강인? 소속은?
"민간인 무술감독입니다."
차 이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민간인이라고?
김석명은 말하는 김에 보좌관의 추측을 사실처럼 설명했다.
"몸 쓰는 실력이 워낙 좋아서 전술 비행 슈트의 테스트 파일럿을 맡았다더군요."
대포폰에서 서늘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흐. 민간인 따위가 감히 그동안….
"어? 차 이사. 그동안이라니?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까?"
-김 의원님. 그놈에 대해서 아는 거 다 말해보시죠. 내가 한국을 개운하게 떠날 수 있게.
***
할리우드 영화 ‘매트로폴리스 헌터’ 촬영팀은 이미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강인은 그 영화의 국내 촬영에 사흘 동안 참여해 짭짤한 수입을 챙겼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날짜로 세면 사흘이지만 일한 시간은 짧았습니다. 그 많은 돈을 날로 먹으셨습니다.
"지인아. 날로 먹은 게 아니라 고객의 시간까지 절약해줬다고 해야지. 원래 기차도 KTX가 새마을이나 무궁화보다 비싸잖아."
-날로 먹은 돈으로 새 장비를 지르십시오.
"네가 지난번에 필요하다고 해서 산 분광 분석 장비 말이야. 사놓고 나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네가 쓸 줄을 몰라서."
-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내용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요원님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원님이 사용법을 이해하기 어려우면 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사자고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대답은 참 잘해. 그럼 이번 장비는 안 사는 거다?"
-그건 아닙니다. 이번엔 진짜 필요합니다.
"넌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나강인은 지금 차를 몰고 드라마 ‘바보의 사랑’ 촬영 현장으로 가는 중이다.
오늘은 경기도 양평 전원주택단지 쪽에서 촬영이 있다.
그 전원주택단지로 가려면 편도 1차선,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나강인이 그 도로를 차로 지나갔다.
뒤에서 차가 한 대 나타났다. 차종은 SUV였다.
그 차는 속도를 높이더니 중앙선을 넘어 나강인의 차를 추월하려 했다.
AI 전지인이 갑자기 홀로그램과 고속 음성으로 경고했다.
-차량 충돌 경고!
나강인도 안다. 왼쪽으로 추월하던 차가 갑자기 나강인 쪽으로 달려들었다.
도로 바깥쪽은 경사가 심했다. 여기서 도로 밖으로 밀리면 차가 뒤집힐 수도 있다.
나강인이 즉시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았다.
SUV가 나강인의 차 앞으로 휙 들어왔다. 충돌은 피했다.
그 차는 즉시 중앙선을 도로 넘어갔다.
"저놈 뭐냐."
-운전 실수일 확률은 낮습니다.
"실수는 무슨. 대놓고 공격한 거지."
-적 차량 후미를 사선으로 타격해 제압하십시오. 아군 차량의 손상은 줄이고 적 차량은 도로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랬다가 상대가 운전 실수라고 주장하면, 내가 보복운전으로 다 뒤집어쓴다."
-그러면 그냥 보내실 겁니까?
"이 상황에서 그럴 순 없지. 지인아. 우리 요즘 돈 좀 벌었잖아."
-미국에서 온 호구 덕분에 3억을 벌었습니다.
"이 차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면, 이 기회에 새로 사자."
나강인이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엔진의 RPM이 치솟았다. 차의 속도가 빨라져 상대편 차와 평행선을 그리며 달렸다.
중앙선을 넘어갔던 상대편 차가 다시 달려들었다.
나강인이 옆을 보았다. 차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 있는 놈이 운전대를 대놓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다른 두 놈은 차량 내부를 꽉 붙잡았다.
조수석에 있는 놈이 소리를 질렀다.
"밀어버려!"
상대편 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나강인의 차와 충돌했다. 나강인도 운전대를 꺾으며 받아쳤다.
상대편 차는 SUV라서 크기가 더 컸다. 적들은 나강인의 차가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갈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나강인의 차는 겉보기에만 낡은 승용차이고 알맹이는 방탄차다. 차체 철판 안쪽에는 방탄판이 붙어 있다. 당연히 차량의 프레임도 그 무게를 버틸 수 있게 보강했다. 타이어도 단단한 제품을 썼다.
반면에 적 SUV는 덩치는 더 크지만 차 자체는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충돌과 동시에 SUV의 철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철판만 구겨진 게 아니다. SUV가 아예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 도로를 벗어나더니 땅에 처박혔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적 차량 제압 완료. 우리 차량의 손상은 경미합니다.
나강인의 차는 멀쩡했다. 조금 찌그러진 곳이 있지만, 그 정도는 제작 거점에서 고칠 수 있다.
"이 기회에 차를 바꾸려고 했는데 계속 타야겠네."
이 차는 상대 과실이 100%라 해도 자동차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이 차에 방탄판처럼 추가한 장비 중에 정식으로 허가받고 부착한 건 하나도 없다. 사고가 나서 보험사를 부르면 보상이 아니라 과태료나 벌금을 걱정해야 한다.
문제가 생겼다. SUV가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갔다고 해서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갑자기 좁은 도로의 저 앞쪽에서 승합차가 튀어나왔다. 그 승합차가 도로 한복판에 급정지해서 길을 틀어막았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적 지원병력입니다! 적 차량이 도로를 차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