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호박 마차의 마부
차 이사가 자르자고 말한 꼬리는 김석명의 보좌관이다.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 머리를 굴렸다.
‘내가 잡히면 나만 망해. 차 이사는 안 망해. 이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나도 잘린 꼬리 신세가 될 수 있어.’
결론은 간단히 나왔다. 김석명이 반대했다.
"지금 내 보좌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 일이 우리 짓이라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경찰이 수사하다 보면 결국 의원님의 보좌관을 발견할 겁니다.
"난 용산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 후부터 그 특수요원이 누구인지 대놓고 찾았습니다. 경찰이 물어보면 같이 사진을 찍어서 떨어진 지지율을 회복하려 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정치인은 원래 그런 쇼를 잘합니다."
-그래도 꼬리의 입단속은 해야 합니다.
"말을 잘 알아듣는 친구입니다. 내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니까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의원님만 믿겠습니다.
김석명이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차 이사는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나강인을 잡아야지요. 시간을 끌면 상황이 불리해집니다. 빨리 끝낼수록 좋습니다.
김석명이 슬쩍 떠보았다.
"혹시 오늘 당장?"
-그건 아닙니다. 전문가를 새로 섭외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김석명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은 차 이사가 부릴 수 있는 청부업자가 없다는 거네?’
"일단 만납시다."
차 이사의 목소리가 떨떠름해졌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만?
김석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 곧 한국을 뜰 거라며! 어차피 뜰 거면 예전처럼 조심할 필요도 없잖아! 그럼 좀 만날 수도 있어야지!"
-굳이 만나야 할 이유는?
"한 배를 타야 할 거 아냐! 하나가 죽으면 다 죽는 그런 배를 타야 나도 차 이사를 믿고 일을 진행하지!"
-음….
"차 이사의 빽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다들 거리를 두려고 할 텐데? 그러니까, 내 힘과 정보가 필요하면 오늘 당장 만나자고!"
-그럽시다.
김석명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그거지!"
차 이사가 조건을 걸었다.
-대신에 의원님도 더 적극적으로 내 계획을 지원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대포폰의 통화 기능으로 대화하는 게 아니다. 도청 방지 기능이 들어있고 무선 데이터를 소모해 소리를 전달하는 사제 앱으로 대화 중이다. 이 개조 대포폰은 며칠 전에 오토바이 퀵서비스로 받았다.
김석명이 장담했다.
"내 이름을 걸고 지원을 약속하지요."
***
나강인은 현장을 합수부 형사와 다른 경찰들에게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박순기가 그의 승용차로 나강인을 데려다주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바보의 사랑 촬영장으로 갑시다."
"예?"
"오늘 야외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알죠. 저놈들이 그걸 알아내서 매복한 건데."
그가 운전하며 물었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전투를 치른 날까지 굳이 촬영 스케줄을 소화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 드라마가 강행군 중이라서요."
"그건 알지만…."
나강인이 톡을 보내며 말했다.
"순기 씨는 내가 매복한 놈들과 싸우고 나서 바로 촬영장에 갈 줄은 몰랐을 겁니다."
"당연하죠. 전투를 치르자마자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차 이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 그건 그렇겠네요. 차 이사도 예상하지 못하겠죠."
"만약 촬영장 스태프 중에 내 정보를 차 이사에게 넘긴 사람이 있으면, 날 보면 표정관리가 안 될 겁니다."
"그것도 그렇…. 아! 그것까지 조사하러 가시는 겁니까?"
"촬영장에 나를 팔아먹은 놈이 있다면 잡아야죠."
"그런 사람이 없으면…."
"없으면 다행이고요. 그러면 액션 촬영을 마치고 나서 오늘 잡은 놈들을 조사 중인 경찰서로 갑시다. 내가 가서 진술할 것도 있을 테고, 차 이사를 잡으려면 나도 정보가 필요하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나강인이 사건 현장을 떠날 수 있는 건 박순기가 같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중에라도 경찰서에 가야 한다.
박순기가 운전하면서 뒤쪽을 힐끗거렸다.
"나 사범님 차에서 제 차 트렁크에 옮겨놓은 것들 말입니다. 그중에 드래곤 윙도 있던데요."
드래곤 윙은 접혀 있을 때는 특이한 디자인의 가방처럼 보인다. 박순기는 용산 사건 때 옥상에서 접힌 형태와 날개를 편 형태를 다 봤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평소에 차에 보관합니다. 그러다가 용산 사건 때 썼죠."
"알죠. 그런데 오늘 본 건 저번 것하고 조금 다르던데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하하하. 제가 경찰이거든요."
"저번에 만든 건 방패로 썼더니 내구도가 많이 떨어져서 새로 만들었습니다. 연료 공급 모듈을 수정해서 모양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박순기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역시 나 사범님은 드래곤 윙을 쉽게 만들 수 있으시군요! 그럼 저도 남는 거 하나만!"
"그건 테스트를 통과한 후에 이야기하시죠?"
"이대로 연습하면 금방 날갯짓을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소형 제트엔진을 쓰니까 날갯짓은 아니고 가변익 같은 건데 말이죠."
"아! 드래곤 윙 외에도 가방을 몇 개 더 제 트렁크에 넣으셨던데요. 하드케이스도 있고, 커다란 크로스백도 있고요."
"하드케이스에는 신형 제트엔진이 들어있고요."
"오오! 신형 엔진! 드래곤 윙이 업그레이드됐군요!"
"크로스백에는 원래 차에 부착한 장비 중에서, 걸리면 딱지 뗄 거 같은 부품 몇 개만 떼어서 넣어놨습니다. 잠깐만 가지고 있어 줘요."
"아아. 걸리면 안 되는 장비…. 무기만 아니면 되죠. 하하하."
"어…. 총이나 폭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기는 아니…."
"총폭탄은 아니라니까요?"
"네?"
***
나강인은 박순기의 차를 얻어타고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최진욱 피디부터 만났다.
"오늘 액션 촬영 스케줄을 당길 수 있겠습니까?"
스케줄 조정 우선권은 나강인이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핵심 조건 중 하나다. 게다가 오늘은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어차피 한 시간 정도만 당기면 되니까 가능하죠."
배우들은 모두 현장에 있었다. 그러니 오늘 촬영 순서를 조금 바꾼다고 일정이 틀어지지는 않는다.
나강인은 곧바로 대본에 맞춰 현장을 구성하고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를 배치했다. 배우들에게 동선도 알려주었다.
신은하가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순기 씨. 촬영장에 다 오시네요?"
박순기가 신은하의 옆에서 대답했다.
"하하. 그러게요. 이렇게 요즘 인기 드라마를 찍는 모습을 구경하니까 참 좋습니다. 배우들이 참 많네요."
"근데 지금 근무 시간 아니에요?"
"비번인데요?"
"요즘은 비번이 권총을 가지고 다녀요? 여기가 뭐 미국인 줄 아세요? 어디서 약을 파세요? 경찰이 약을 팔면 돼요? 안 돼요?"
박순기가 재킷을 여며 옆구리 쪽에 있는 권총을 확실히 숨겼다.
"반납했어야 했는데 바빠서…."
"권총 때문에 강인 오빠를 따라온 거죠? 민간인한테 권총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박순기의 표정이 굳었다. 나강인은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 찾으려고 오늘 촬영 스케줄을 진행한다고 했다.
‘설마 신은하 씨가?’
그가 당황한 걸 숨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은하가 스마트폰에 뜬 기사를 보여주었다.
"총격전 기사 떴어요. 근데 위치가 우리 동네에서 여기로 오려면 지나가야 하는 그 길 중간이네요? 강인 오빠는 자기 차 놔두고 순기 씨 차를 타고 왔네요? 순기 씨는 권총까지 가지고 있네요?"
"그것만 보고 추측한 겁니까?"
신은하가 콧대를 세웠다.
"내가 강인 오빠랑 총싸움을 한두 번 해본 줄 알아요? 이제 이쯤은 척하면 척이죠."
"아…. 납득했습니다."
"근데 이상하다? 방금 왜 순기 씨 눈빛이 날 의심한 것처럼 보이지?"
박순기가 얼른 스마트폰 기사를 들여다보며 툴툴댔다.
"이 사건을 함부로 기사를 내보낸 곳이 있군요. 아직 수사 중인 사건이라 이러면 곤란한데 말이죠."
"강인 오빠는 딱 봐도 안 다친 것 같고, 순기 씨도 멀쩡하고. 다른 다친 사람은요?"
박순기는 둘러대는 걸 포기했다.
"우리 쪽이나 민간인 중에는 다친 사람이 없습니다. 나 사범님은 아무도 안 죽였고요."
"강인 오빠는 막 죽이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 경찰에 계신 분들은 이상하게 그쪽으로 의심하시더라."
"하, 하하. 몇 명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가 워낙 많았으니까요. 그동안 아무도 안 죽은 게 신기한 거죠."
"이번엔 누구를 구하다가 싸운 거예요? 누가 길에서 납치라도 됐어요?"
예전에 이보라가 그렇게 납치됐었다. 그때는 나강인이 신은하와 김유찬을 데리고 가서 그녀를 구출했다.
"어….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를 구하다 그런 건 맞죠?"
"어…."
신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강인 오빠가 놈들의 목표였어요?"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직접 물어보시죠."
***
나강인은 액션 촬영을 마치고 박순기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신은하는 스케줄이 남아 있어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신은하의 촬영 스케줄은 그날 저녁때까지 있었다. 그녀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내 작업장.
나강인은 이미 경찰서에 들러 진술하고 정보도 좀 얻은 후에 이곳으로 왔다.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간다."
그녀는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갔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도 익숙하게 누르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오늘 전투는 강인 오빠가 놈들의 타깃이었지?"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었냐? 순기 씨냐?"
AI 전지인이 불평했다.
-박순기가 이렇게 입이 싼 줄은 몰랐습니다. 총권도를 수련할 때 더 굴려야겠습니다.
신은하가 대답했다.
"못 들었어.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더라. 그래서 눈치챘지."
"똑똑해졌네."
"나 원래 똑똑했거든?"
"그럼 당분간은 나랑 친한 척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겠구나."
"왜? 나도 위험해질까 봐?"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나 지금 드래곤 플레이트를 입고 있어. 오빠가 준 호신 장치도 항상 가지고 다녀."
"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강인이 선반에 보관하던 작은 가방을 가져왔다.
"이것도 가지고 다녀."
"이게 뭔데?"
"새 호신용품 몇 가지."
그녀가 냉큼 가방을 받았다.
"알았어. 잘 쓸게. 근데 이런 가방밖에 없어?"
"그 가방이 왜?"
"디자인이 구려."
AI 전지인이 발끈했다.
-신은하가 이렇게 보는 눈이 없습니다. 자연로보틱스가 제공하는 2082년 예비군용 가방 디자인을 무시하다니요.
그 가방의 디자인은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건 야전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고 효율에만 신경 쓴 가방이다.
젊은 여자가 들고 다니기 좋은 디자인은 아니었다.
나강인이 신은하의 가방을 보았다.
"그 가방 비싼 거냐?"
그녀가 원래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들어 보였다.
"촬영장에 가지고 다니는 거라서, 쪼끔?"
"많이 안 비싸면 그거 개조하자."
"으응? 개조라니? 설마 뭘 덧붙이는 거야?"
"가죽을 좀 자르고 붙이긴 해야지."
그녀가 얼른 가방을 허리 뒤로 숨겼다.
"안돼!"
"겉보기엔 표가 별로 안 나게 고쳐줄게. 주로 안쪽을 개조할 거야."
"별로 안 나는 게 어느 정도야?"
"봉합선은 좀 늘어나겠지? 자른 후에 다시 붙여야 하니까."
"그럼 안되거든? 내가 다른 싼 가방 가져올 테니까 그거로 해!"
"내가 요즘 좀 바빠. 그리고 네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가방으로 해야 의미가 있지. 가방 내놔."
"이거 내가 아끼는 가방이란 말이야!"
***
가방은 결국 그 자리에서 개조됐다.
나강인이 제작 거점의 장비로 가죽을 자르고 내부 구조도 변경한 후에 다시 꿰맸다. 야전 응급 수술 스킬을 가진 AI 전지인이 그 작업을 보조했다.
처음에는 툴툴대던 신은하가 결과물을 보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꽤… 괜찮네?"
가방의 디자인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표면에 봉합선이 여러 개 추가됐다.
그 봉합선이 만들어낸 무늬가 원래 가방 디자인과 꽤 잘 어울렸다.
"마음에 드나 보다?"
"스페셜 커스텀 에디션 느낌이라서 괜찮은데? 이태리 장인이 한땀 한땀 고친 느낌이야."
AI 전지인이 자랑했다.
-제 디자인 감각이 이렇게 좋습니다.
신은하가 가방을 들어보며 물었다.
"이 가방 방탄도 되나?"
"그냥 가죽 가방인데 되겠냐? 방탄판까지 추가하면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 안 돼."
"혹시나 했지."
그녀가 가방을 메고 거울을 보면서 물었다.
"이 가방 남들한테 자랑해도 되지?"
"둘이 닮아가는구나. 자랑을 좋아하는 쪽으로."
"누구랑 닮아간다는 거야? 설마 보라는 아니지?"
-저도 궁금합니다.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가방 내부는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나도 그 정도는 알지."
"우린 공식적으로는 그냥 아는 사이 정도잖아. 그러니까 나를 노린 놈이 너를 노리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혼자 다니지 마라."
"촬영이 있을 때는 우리 로드랑 다니고, 없을 때는 영석이 데리고 다닐게."
"동생은 네 말 안 듣는다더니?"
"용돈 주면 말 들어. 걔가 신데렐라의 마차 마부라서 열두 시가 지나면 다시 말을 안 듣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