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연기
나강인이 오늘 산 중고 SUV의 운전석에 앉았다.
"일부러 이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촬영장에서 시간을 보낸 보람이 있다. 저놈들이 미끼를 제대로 물었어."
미끼로 쓸 차를 임시 주차장에 세워놨더니 누군가가 차량 하부에 폭탄을 붙였다. 그 폭탄은 지금 뇌관이 해체된 상태로 조수석에 놓여 있다.
촬영장에 올 때는 미행하는 차량이 없었다. 차체에 위치추적장치가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차에 폭탄이 붙었다. 적은 그가 오늘 이 시간에 이 촬영장에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요원님의 촬영 스케줄을 조사한 놈이 있습니다.
"같은 방법을 또 썼다는 건, 차 이사가 내 정보를 얻을 수단이 그것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야."
-적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나강인이 운전석에서 스마트폰에 뜬 정보를 확인했다. 센서가 근거리 통신망을 이용해 직접 전송한 복잡한 데이터가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 엔진룸이나 트렁크, 차의 문 등을 열거나 차체에 뭔가 부착하면 감지 센서에 걸린다.
차체에 뭔가가 달라붙기만 해도 그가 설치해둔 자기장 센서나 전기 저항 센서, 또는 충격감지 센서 등의 수치가 변한다.
"다른 폭탄은 없지?"
-차량 하부에서 발견해 해체한 폭탄 외에는 없습니다.
하체에 붙인 폭탄은 감지 센서가 확실히 잡아냈다. 나강인은 그걸 촬영장에 있을 때부터 알았다.
만약 통신에 문제가 생겨 경고 메시지를 받지 못하면, 그것 자체도 경고 신호가 된다.
-모든 센서의 데이터를 확인했습니다. 차량에 추가로 부착된 외부 물체는 없습니다.
나강인이 시동을 걸었다. 오래된 차라서 시동이 덜덜거리다가 걸렸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자. 저놈들을 끌어내야지."
***
간이 주차장 구석에 세워둔 차에서 나강인을 감시하던 청부업자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획 담당의 눈빛이 번뜩였다.
"타깃이 출발했다!"
폭탄 전문가인 현장 담당이 몸을 숙였다.
"충격에 대비해! 폭발한다! 3! 2! 1!"
청부업자들이 차 안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임시 주차장 반대편 끝에 차를 세워뒀다. 거리는 충분히 떨어져 있고 폭탄도 운전석만 노리는 소형이지만, 폭발할 때 파편이 날아올 수는 있다.
두 사람은 폭발에 대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기다려도 폭발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획 담당이 물었다.
"왜 안 터지는데?"
폭탄을 설치한 청부업자가 몸을 숙인 채로 대답했다.
"오차가 조금 있을 수는 있지만, 주차장을 벗어나기 전에는 터진다."
기획 담당이 고개를 슬쩍 들어보았다.
"주차장을… 벗어났는데?"
나강인의 차가 임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럴 리가…."
"안 터지는데?"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기획 담당이 화를 벌컥 냈다.
"폭탄 제대로 설치한 거 맞아?"
"설치는 제대로 했는데…."
"그런데 왜 안 터져!"
폭탄 전문가인 현장 담당이 변명했다.
"부품에 불량품이 있는 것 같다."
"네가 직접 만든 폭탄이라며!"
"폭탄은 내가 만들었지만, 기폭장치의 부품을 하나하나 다 내가 만든 건 아니다. 세부 부품에 불량이 섞여 있으면 저럴 수도 있다."
"그래서 네 탓이 아니라는 거냐?"
"부품을 만든 회사 탓이다! 그 부품을 만든 공장에 불을 질러버릴 테다!"
두 사람은 잠깐 말싸움을 했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는다.
폭탄 전문가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일을 끝내야 잔금을 받으니까."
"일을 두 번 하게 생겼군."
"그러니까 처음부터 폭탄을 제대로 만들었어야지!"
기획 담당이 화를 내며 차를 출발시켰다. 나강인이 떠났으니 그들이 이 주차장에 더 있을 이유는 없다.
나강인은 차를 타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 길로 쭉 가다 보면 한적한 곳에 3층 건물 전체가 카페로 사용되는 곳이 나온다. 그 카페의 꽤 넓은 야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적 차량은 아직은 우리를 볼 수 없습니다.
나강인이 차를 몰고 그 카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박순기의 차를 찾았습니다.
나강인이 차를 길에서는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세워두고 내렸다. 그런 후에 박순기의 차에 옮겨 탔다.
박순기가 물었다.
"나 사범님. 와달라고 하셔서 달려왔습니다만, 무슨 일이신데…."
나강인이 검은색 비닐봉지를 넘겨주었다.
"이런 게 내 차에 붙어 있어서요."
박순기가 비닐봉지를 열어보며 물었다.
"이게 뭔데…."
"대인 살상용 폭탄입니다. 여기 이건 당기면 터지는 기폭선이고요."
박순기가 화들짝 놀랐다.
"포, 폭탄이요?"
그는 두 손으로 비닐봉지를 조심해서 든 채로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터지면 우리 둘 다 죽겠지요?"
"이미 뇌관을 해체했습니다. 안 터집니다."
"아…. 나 사범님은 폭탄 해체 전문가시죠. 휴우."
놀란 가슴을 진정한 박순기가 비닐봉지를 다시 열어 폭탄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 폭탄이 차에 대놓고 붙어 있었다고요?"
"촬영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놨더니 차 밑에 붙여놨더군요."
"예? 차 위가 아니라 밑에요? 그럼 안 보였을 텐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차에 감지 센서를 달아놔서."
박순기가 중고 SUV를 보았다.
"저 차는 오늘 샀을 텐데요?"
"대충 필요한 거 몇 개만 달았습니다."
박순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저 차도 방탄인 건 아니죠? 어제 가져간 차는 증거를 확인하던 사람들이 기겁했다던데요. 겉보기만 승용차지 알맹이는 장갑차라서요."
"이번에는 운전석 주변에만 간단하게 방탄판 몇 장을 붙였습니다."
"그 작업이 왜 그렇게 금방 되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아. 그렇죠."
박순기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틀 연속으로 일어난 사건에, 감히 한국에서 폭탄까지 쓴 걸 보면…."
"이미 저지른 짓이 워낙 많아서 폭탄 하나쯤 더 터트려도 차이가 없는 놈 짓입니다."
"역시 차 이사군요. 혹시 그놈이 직접 이 폭탄을…."
"설마요. 사람을 썼겠죠."
"그건 좀 아쉽네요."
나강인이 박순기의 차에서 도로를 보며 말했다.
"폭탄을 설치한 놈들을 미행하려고 순기 씨를 불렀습니다. 민간인인 내가 미행해서 잡으면 나중에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요."
"잘하셨습니다. 제가 당장 경찰력을 동원해서 그놈들을 추적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순기 씨만 부른 겁니다."
박순기가 활짝 웃었다.
"아! 제가 제일 믿을만한 사람이군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 그놈들은 어디 있습니까?"
나강인이 카페 앞쪽 도로를 가리켰다.
"지금 저 도로를 지나가는 저 차입니다."
"오케이! 미행 시작하겠습니다."
박순기가 차의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나강인이 조수석에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순기 씨가 범죄 상황을 인지하고 미행하는 겁니다. 나는 옆에서 조언만 좀 하는 거고요."
"흐흐.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윗분들도 다 아시지만 눈감아주실 겁니다."
***
박순기가 적 차량을 미행했다. 간격은 충분히 두었다. 가끔은 앞 차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런 미행이 가능한 건 나강인이 옆에서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박순기가 운전하면서 감탄했다.
"나 사범님은 미행도 진짜 기가 막히게 하십니다. 저 차가 시야 밖으로 나가도 안 놓치시네요?"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이 일대 지도를 모두 확인해 적 차량의 주행 경로를 예상했습니다.
"여기는 도로가 복잡하지 않아서 바짝 붙을 필요가 없거든요."
"이 미행 기술을 저희 쪽에 강의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이건 강의 몇 번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요."
"아…."
나강인과 박순기의 미행은 조용하고 완벽했다.
청부업자 두 놈은 차를 몰고 한참을 이동해 한적한 곳에 있는 단독주택에 차를 세웠다.
서로의 거리는 아직 꽤 떨어져 있었다. 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박순기가 말했다.
"저놈들이 차를 세웠습니다."
"그냥 지나가요."
박순기가 차를 세우지 않고 그대로 그 앞을 지나갔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적의 얼굴을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청부업자들의 얼굴이 포함된 전신사진이 홀로그램 3D 이미지로 떴다. 두 사람 다 동양계였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다른 정보는?"
-이게 다입니다.
"얼굴을 확실히 확인했다며?"
-확실히 처음 봅니다.
"야."
옆에서 박순기가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그곳을 완전히 벗어났다.
나강인이 말했다.
"저 건물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박순기가 길가에 차를 세운 후에 스마트폰에 지도 앱을 띄워 주소부터 확인했다. 그런 후에 전화를 걸면서 말했다.
"우리 팀 사람에게 저 집의 정보를 따라고 하겠습니다.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집이 차 이사와 관계된 곳이면 좋겠군요."
"그러면 베스트죠."
박순기가 전화로 팀원에게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문자로 간단한 정보가 들어왔다.
박순기가 문자를 확인했다.
"어?"
"왜 그럽니까?"
"저곳은 차 이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 명의인데요?"
"당연히 차명이겠죠."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이쪽 지역 담당자에게 물어봤다는데, 빈집이 아니라 주민이 실제로 사는 집이라는데요?"
나강인의 표정이 변했다.
"당장 그 집으로 돌아갑시다."
박순기가 즉시 가속페달을 밟으며 차를 돌렸다.
"집주인이 위험한 상태일 수 있군요. 빨리 가겠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어떤 지원이든 말만 하십시오."
***
청부업자 두 명은 외진 곳에 있는 단독주택을 임시 아지트로 삼았다. 그곳에 살던 노부부는 두 손이 묶인 상태로 갇혀 있었다.
현장 담당이 거실에서 노부부가 있는 안방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저것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타깃을 깔끔하게 제거했으면 그게 맞지. 그런데 아니잖아. 외부에서 연락이 왔을 때 대응하려면 살려둬야 해."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한국을 빠져나갈 텐데, 하루 이틀 정도는 일찍 처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거야…."
"내 말대로 해. 작전 설계는 내가 전문가니까."
그들은 일을 분업해서 처리한다.
한 명은 의뢰를 받는 것부터 정보 수집과 침투 및 도주 계획까지 두루 맡는다. 다른 한 명은 총이나 폭탄을 이용하는 살인 전문가다.
둘의 시너지는 꽤 좋아서, 팀을 짜서 활동한 이후로는 심각한 위기는 겪지 않았다.
살인 전문가인 현장 담당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이 안 좋아. 그냥 처리해 버리고 신경 안 쓰면 좋겠는데…."
갑자기 현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킬러는 깜짝 놀라 권총을 잡았다.
"뭐지?"
그들은 숨을 죽였다. 밖에 있는 사람이 문까지 두드렸다.
"어르신! 면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면사무소?"
"김현철 어르신! 아까 왔을 때는 차가 없던데 지금은 차가 세워져 있는 거 다 봤어요. 집에 오신 거잖아요. 동의서 때문에 그러는데 싸인만 해주시면 돼요!"
기획 담당이 현장 담당에게 자랑했다.
"봤지? 집주인을 살려두니까 이렇게 쓸모가 있잖아. 괜히 죽였으면 저 면사무소 직원도 처리해야 하고, 그러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끄응. 알았으니까 네가 해결해."
청부업자들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기획 담당이 집주인 부부 중에서 남자에게 권총을 겨누며 한국어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싸인을 해서 돌려보내.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신호를 보내려고 하면, 다 죽는 거야. 너희 둘은 물론이고 밖에 저놈까지 싹 다 쏴버릴 거라고."
기획 담당이 경고한 후에 손에 채운 수갑을 풀어주었다.
현장 담당은 안방에 남았다. 기획 담당은 거실로 나와 오른쪽 구석에 숨었다.
집주인은 권총으로 협박당하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었다.
"무슨 싸인을 하라고…."
나강인이 집안으로 쓱 들어가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요. 여기 이 서류에…."
나강인이 말하다 말고 갑자기 볼펜 크기의 가늘고 긴 단검을 오른쪽으로 휙 던졌다.
기획 담당 킬러는 거실 오른쪽 구석에 숨어있었다. 권총은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 총을 쥔 쪽 손목을 소형 단검이 관통했다. 순식간에 손이 마비됐다.
나강인은 소형 단검만 던진 게 아니다. 같이 던진 돌멩이는 적의 목젖을 정확히 때렸다.
"컥!"
목을 얻어맞은 기획 담당은 비명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나강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총이다! 살려주세요! 간첩 신고 안 할 테니까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가 그렇게 외치며 적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기획 담당은 목을 얻어맞아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소리를 낼 수 있긴 있었다.
"함…정…."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강인이 겁먹은 척하며 질러대는 소리에 묻혔다.
기획 담당은 오른손목이 단검에 꿰뚫리는 바람에 권총을 쏠 수 없었다. 그가 뒤늦게 그 권총을 왼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나강인이 적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권총을 탁 잡아챘다. 입으로는 여전히 대사를 읊었다.
"살려주세요! 집에 가면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가 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제 점수는요. 3점입니다. 대사에 감정을 더 담아보십시오.
"영혼을 담아 대사를 쳤다. 이게 내 최선이야. 넌 전투지원에 집중해."
-안방에 무장한 적이 있습니다. 인질도 같은 방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