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연기 II
3분 전에, 박순기는 외진 곳에 있는 단독주택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조용히 차를 세웠다.
나강인은 차에서 무기로 쓸 것을 찾았다. 글로브박스에서 볼펜과 칼의 중간쯤 되는 형태의 물건이 나왔다.
"이건 뭡니까?"
"종이봉투를 자르는 데 쓰는 칼인데, 기념품으로 받았습니다. 칼날이 뭉툭해서 과일도 못 깎는 거라 쓸모가 없어서 거기 던져놨네요."
박순기의 권총을 가져갈 수는 없다. 뒷수습을 생각하면 진짜 칼보다 이런 게 차라리 낫다.
"이것 좀 빌리겠습니다."
나강인이 그것 하나만 챙겨서 차에서 내렸다. 박순기도 따라 내렸다.
"제가 밖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적이 숨어있는 단독주택으로 걸어갔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무기가 더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길에서 작은 돌을 하나 주웠다.
그는 현관 앞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AI 전지인이 현관문 안쪽에서 나는 말소리를 증폭했다. 청부업자들의 위치도 홀로그램으로 표시했다.
-두 명이 거실에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면사무소 직원인 척하며 문을 두드렸다. 킬러들은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AI 전지인이 안방에서 수갑을 푸는 소리와 걸을 때 생기는 소음을 분석했다.
-방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걸음걸이와 체중이 다릅니다. 한 명이 바뀌었습니다.
"집주인이겠지."
AI 전지인이 안방이 있는 두 명을 따로 표시했다. 위치가 정확히 계산되지 않아서 사람 모양을 노란색 윤곽선으로 그렸다.
반면에 거실 오른쪽 구석에 숨은 사람과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윤곽선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표시했다.
"현관 앞에 있는 사람이 집주인이겠지."
-걸음걸이와 대화를 분석한 결과로는 99% 확실합니다.
"그래도 얼굴은 확인하자."
집주인이 문을 열었다. 나강인이 안으로 들어가며 집주인의 얼굴을 보았다. 예상대로 청부업자가 아니었다.
그는 면사무소 직원인 것처럼 연기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볼펜 크기의 단검과 밖에서 주운 돌을 던졌다.
전투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기획 담당 청부업자는 권총을 쥔 손이 꿰뚫리고 목을 얻어맞아 순식간에 제압됐다.
나강인은 적의 권총을 잡아챈 후에 안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마치 그가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안방으로 들어갈 테니까 제발 쏘지만 마세요!"
AI 전지인이 안방의 소음을 분석해 적의 위치를 찾아냈다. 마치 벽을 투시하는 것처럼 적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적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나강인이 권총 총구를 오른쪽으로 향하며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인질을 확인하고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현장 담당 청부업자는 암살 임무를 도맡았다. 그는 기획 킬러보다 감각이 좋았다. 나강인이 안방에 들어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걸음걸이가 너무 당당해!’
그는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닫자마자 권총으로 인질을 위협하려고 했다. 상대가 한국 경찰이라면 꽤 잘 통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나강인이 들어오자마자 그가 있는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직 킬러가 인질을 향해 권총을 겨누기 전이었다.
‘인질을 신경 쓰는 놈이 아니다!’
청부업자는 인질이나 의뢰보다 자기 목숨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인질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옆으로 뛰었다.
거의 동시에 나강인의 총에서 발사된 총탄이 벽에 박혔다.
청부업자가 반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강인이 방아쇠를 다시 당기는 속도가 더 빨랐다.
청부업자는 무리한 반격이 아니라 회피를 택했다. 그대로 옆으로 더 움직였다. 두 번째 총탄이 다시 허공을 가르고 벽에 박혔다.
청부업자는 방구석으로 몰렸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인질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이 단독주택은 거실은 꽤 넓지만 안방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안방이 이 집의 방 중에서는 제일 넓었다.
이제 청부업자의 총구는 인질이 아니라 완전히 나강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면 적의 유탄이 인질을 향해 날아갈 위험이 거의 없어진다.
나강인은 안방에 들어올 때 적 제압보다 인질의 안전을 우선해 사격했다. 적이 총에 맞아주면 더 좋았겠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했다.
나강인이 두 번이나 쏘는 동안 청부업자도 쏠 기회를 한 번은 잡았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정확히 나강인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전투지원 AI 전지인이 적이 언제 어디로 쏠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나강인이 몸을 슬쩍 비틀었다. 적이 발사한 총탄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푹 박혔다.
적이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은 방아쇠를 딱 한 번 당기면서 끝났다.
적이 나강인을 쏘는 순간에는 총을 쥔 오른손의 움직임이 정확한 사격을 위해 느려졌다.
나강인이 적의 총탄을 피하며 세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발사한 권총탄이 적의 오른손을 정확히 꿰뚫었다.
"끄아악!"
권총이 적의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킬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방안을 재빨리 훑으며 대응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뒤늦게 나강인의 계획을 깨달았다.
‘일부러 날 인질과 떼어놨어!’
그는 인질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나강인을 쏘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나강인의 최우선 목표는 인질 보호였다.
청부업자는 그걸 깨닫자마자 왼손을 인질을 향해 휘둘렀다. 왼손에는 어느새 투척용 단검을 쥐고 있었다.
‘목에 반쯤 박아넣고 협박하면….’
인질을 향해 휘두르던 왼손이 공중에서 덜컥 걸렸다. 칼날이 인질을 향하긴 했는데 몸에 닿으려면 멀었다.
나강인이 청부업자보다 더 빨리 움직여 칼을 쥔 왼손을 중간에 붙잡았다.
청부업자가 팔을 당기며 발을 내질렀다. 신발 끝에서 칼날이 툭 튀어나왔다.
나강인이 발을 들어 적의 발목을 걷어찼다. 칼날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적의 발목이 먼저 부러졌다.
"으아악!"
적은 아직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나강인은 적이 칼을 쥐고 있는 왼손도 분질러버렸다.
"아악!"
"이 새끼가 왜 이렇게 비명을 많이 지르냐? 하는 짓은 고문을 해도 버틸 것처럼 독한데."
-아프긴 할 겁니다.
나강인이 적의 팔을 꺾으며 인질로 잡혀 있던 70대 여성에게 말했다.
"경찰에서 구출하러 왔습니다. 이놈들은 저희가 처리할 테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우리 아저씨는…."
"당연히 안전하시죠. 경찰과 같이 있습니다."
70대 여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대한민국 경찰 만세!"
나강인은 경찰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 일은 공식적으로는 경찰이 인질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청부업자를 거실로 끌고 나왔다.
"아. 바닥에 이놈들 피가 묻는군요."
70대 여성이 얼른 말했다.
"닦으면 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거실에 아주 피칠갑을 해도 돼요."
"네. 그래도 마당이 청소하기 쉬우시겠죠."
박순기는 이미 거실에 들어와 있었다.
나강인이 권총 두 자루를 박순기에게 내밀었다.
"증거물입니다."
"증거물 봉투를 안 가져왔…. 저기, 사모님! 지퍼백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없으면 위생백도 됩니다!"
박순기가 총을 챙기는 동안 나강인이 킬러 두 놈을 마당으로 끌어냈다.
집주인 부부는 집안에 남아 있었다.
나강인이 두 놈에게 물었다.
"야. 누가 시켰냐?"
청부업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나강인이 다시 물었다.
"차 이사라고 왜 말을 못해? 후환이 두렵냐?"
그제야 기획 담당이 입을 열었다.
"우리 한쿡말 못 해요."
"못 하기는. 협박은 엄청 잘하던데."
그들은 이미 집주인 부부를 한국말로 협박했다.
기획 담당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저희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은 나강인이 차량에 설치된 폭탄을 발견해 해체했다는 걸 몰랐다. 주차장에서는 해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폭탄이 불량이라 안 터졌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일단 좀도둑이라고 둘러댔다.
나강인이 물었다.
"요즘 도둑은 총을 들고 다니냐?"
기획 담당이 말을 돌리려고 삐딱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다치게 한 사람은 없잖습니까?"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이것들이 우리가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개기나? 왜? 아주 고소도 하겠다?"
기획 담당 청부업자는 이미 거기까지 생각했다.
‘한국 경찰은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지. 체포된 후니까 더 때리지도 않을 거고.’
"고소도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지랄하네."
잠시 후에 경찰 순찰차가 달려왔다.
그 차는 집 앞에 정차했다. 정복 경찰 두 명이 경찰차에서 내렸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을…. 얼마나 팬 겁니까? 당신 뭐야?"
증거물을 챙긴 박순기가 마당으로 나와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수고하십니다. 저희가 체포한 범인들인데, 협조 부탁드립니다."
경찰이 신분증을 보고 표정을 풀었다.
"아. 그러시구나. 우리 차에 태우세요. 경찰서로 바로 데려가게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고맙지요."
청부업자 두 놈 중에 그나마 상태가 나은 기획 담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죽거렸다.
"경찰서에 가면 과잉 진압으로 너희 둘 다 고소할 거다."
박순기는 코웃음 쳤다.
"이것들이 저 차 타면 끝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우리가 나중에 인계받아서 샅샅이 털어줄…."
나강인이 박순기의 팔을 잡았다.
"저놈들을 저 차에 태우기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예?"
"우리 둘 다 신고를 안 했는데 순찰차가 너무 빨리 왔어요."
정복 경찰이 설명했다.
"지나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조금 전에는 신고를 받고 왔다더니?"
"총소리가 들렸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는 뜻입니다."
박순기가 휴대폰을 꺼내며 웃었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금방 확인되니까 잠시만요. 두 분, 죄송한데 소속이 어디시죠? 제가 확인전화 한 통화만 하겠습니다."
정복 경찰 두 명이 서로를 힐끗 보았다. 갑자기 둘 다 허리에 찬 권총을 잡았다.
나강인이 즉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가 한 명을 먼저 쳤다. 경찰이 뒤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경찰이 권총을 뽑으려 했는데, 총이 권총집에 걸려서 빠지지 않았다.
"어?"
나강인이 그 경찰도 가볍게 날려버렸다.
두 명 다 뒤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박순기가 얼른 달려가 권총부터 빼앗았다.
나강인이 뒤로 돌아섰다. 청부업자 두 명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나강인이 청부업자들에게 물었다.
"저놈들은 누굴까?"
당황한 기획 담당의 말투가 바뀌었다.
"모, 몰라! 혹시 경찰이… 아니란 거냐?"
"당연히 아니지. 진짜 경찰인지 확인하려고 하자마자 총을 뽑으려고 들었잖아."
"그럼 누구…."
"너희를 구하러 온 놈들이겠냐? 당연히 아니지. 너희는 저놈들이 누구인지도 몰랐잖아. 그럼 뭐겠어?"
나강인이 청부업자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차 이사가 꼬리를 자르려고 한 거야. 잘라야 하는 꼬리는 바로 너희 둘이고."
기획 담당의 얼굴이 구겨졌다.
"우리가 의뢰를 실패해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너희가 없어져야 증거가 사라져. 차 이사는 저 가짜 경찰들에게는 너희를 죽이라는 지시만 했겠지. 저놈들은 너희가 나를 노린 청부업자라는 걸 몰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너희만 죽어주면 꼬리가 딱 잘리는 거지."
청부업자들은 조금 전만 해도 여유 있는 척했다. 그런데 지금은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나강인이 그런 청부업자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손을 떼면 너희는 죽어. 차 이사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너희를 죽일 거다."
현장 담당 청부업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한국 교도소에 있으면…."
"날 죽이라고 지시한 놈이고, 너희를 죽이려고 가짜 경찰을 보낸 놈이야. 가짜 교도관이나 가짜 면회객, 가짜 죄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죽이겠지. 그러니까."
나강인이 두 놈의 앞에 섰다.
"차 이사가 살면 너희가 죽어.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다. 교도소 밥이라도 먹으면서 오래오래 살고 싶으면 차 이사를 잡을 수 있게 협조해라."
청부업자들은 결국 입을 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기획 담당이었다.
"이번 일은 차 이사가 시킨 게 맞다. 우리는 의뢰를 받고 어젯밤에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권총은 어디서 났어?"
현장 담당이 대답했다.
"생선 수입 트럭에 숨겨서 들여왔다. 그런 걸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업자가 있다."
"그 업자 연락처는?"
기획 담당이 머뭇거렸다.
"차 이사가 알려준 번호로 연락해서 물건을 받기는 했는데, 어차피 다 대포폰이라서…."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결한다. 차 이사도 그 대포폰으로 연락하냐?"
"우리가 먼저 걸 수는 없고, 차 이사가 우리에게 연락하겠다고 했다."
"차 이사는 지금 어디 있지?"
"그건 모른다. 차 이사가 얼마나 철저한 놈인데 위치를 노출하겠나?"
"차 이사를 잡아야 너희가 산다니까?"
기획 담당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모른다. 한국에서는 지하철 사물함에 들어있던 대포폰으로 연락을 받았단 말이다."
"내가 오늘 그 주차장에 차를 댈 거라는 거, 차 이사에게 들었지?"
"물론이다. 외국에 있던 우리가 네 위치를 알아볼 수는 없으니까."
"나에 대한 정보는 따로 받았고?"
"대포폰과 함께 네 사진을 받았다. 오늘 그 촬영장에 언제 오는지 적힌 문서도 같이 받았다."
"스케줄 정보구나. 그거 가지고 있냐?"
"다 읽어본 후에 태우라고 해서…."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그 자료를 태웠으면, 너희는 차 이사에게 죽으면 되겠네."
"내용을 외우고 있다! 무슨 내용인지 알려줄 테니까 차 이사 그 새끼를 반드시 잡아!"
"야."
"아는 거 다 적어준다고!"
"모르는 것도 적어라."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