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창고
아마추어 배우, 연기 초보, 연기 무경험자. 나강인은 그 세 명을 데리고 드라마를 촬영했다. 취미로 사회인 연극을 하던 형사 한 명을 제외하면 초짜와 무경험자인데도 결과물은 훌륭했다.
최진욱 피디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전부터 하던 생각인데, 강인 씨는 무술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을 하셔도 되겠는데요?"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시나리오를 못 써서."
"저도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에게는 도주희 작가가 있잖습니까?"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오늘 저분들 촬영분은 어떠십니까?"
최진욱이 활짝 웃었다.
"강인 씨가 손가락을 튕겨서 표시한 부분들만 잘라서 제가 잘 편집하겠습니다. 지금 단역으로 누굴 데려오든 저분들이 방금 보여준 것 같은 연기는 못할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하하하. 물론 김유찬 씨가 형사 역을 맡으면 더 잘하겠죠. 하지만 그런 수준의 배우가 저런 단역을 맡겠다고 달려오진 않습니다."
"연기력이 좋은 단역 배우도 찾아보면 있겠죠."
"물론 있죠. 그런데 느낌까지 딱 맞는 배우를 찾아내서 데려올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최진욱은 나강인이 현직 형사를 출연시키자고 제안했을 때 바로 동의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오늘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
며칠 뒤에 드라마가 방송됐다.
드라마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댓글이 여러 개 붙었다.
-이야아. 저 배우들은 진짜 형사처럼 연기하네. 눈빛이 딱 형사야.
-특히 저 인상 사나운 형사 역할을 맡은 배우는 진짜 포스가 장난 아닌데요?
-같이 있는 후배 형사는 순둥순둥하다가 표정이 한 번씩 싹 변할 때가 장난 아니고요.
-사나운 포스 형사 여자친구로 나오신 분. 제 취향인 듯. 결혼해주세요!
그 형사를 아는 사람도 나타났다.
-포스 형사 연기를 한 배우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알던 형입니다. 저 형이 학교 다닐 때도 배우가 꿈이라면서 그쪽 동아리에서 살더니, 성공했네요.
그런데 그 형사를 아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순둥이 형사가 제가 아는 경찰이랑 똑같이 생겼는데요?
대학 후배라고 한 사람이 새로 댓글을 달았다.
-어어? 제가 지금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저 포스 형사 형, 배우 안 하고 경찰 됐다는데요? 진짜 형사라는데요?
-아니, 형사가 왜 형사 연기를 해요?
-아! 그래서 연기가 저렇게 리얼했구나!
-여러분! 저게 바로 잠복수사로 단련된 연기력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포스 형사의 여자친구로 나온 분에게 결혼해달라신 분? 현실에서는 저분이 진짜 부인이시라는데요? 애가 둘이랍니다.
-와아. 그러니까 오늘 저 부부는 출연료를 따블로 받은 거네요?
-집에 가면 소고기 굽겠다.
***
김창식 형사는 드라마에서는 형사의 모습을 연기하고 폭탄 킬러들을 잡을 때는 가짜 형사를 연기했다.
그의 집은 지금 팀원들이 모여 같이 드라마도 보고 술도 마시는 중이다.
팀원들이 드라마를 보며 감탄했다.
"와아…."
"창식이 연기가 진짜…."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하는데? 진짜 배우 같잖아."
정작 김창식도 TV를 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 잘했구나."
그는 사회인 연극을 할 때는 연기를 저렇게 잘하지 못했다.
김창식만 연기를 잘한 게 아니다. 그의 아내의 연기도 다른 배우 못지않았다. 같이 출연한 동료 형사의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TV에서 그들이 나오는 장면이 끝나고 다른 배우들이 나왔다.
멍하니 있던 김창식이 갑자기 팀원들을 돌아보며 자랑했다.
"봤냐? 저게 나다."
순둥이 형사 역을 맡은 사람도 자랑했다.
"다들 내 눈빛 변하는 거 봤죠? 크크크.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야. 넌 눈빛 연기는 좋은데 대사는 왜 그렇게 없어?"
"대사가 안 되더라고요. 우리 중에 대사가 되는 사람은 창식이 형밖에 없었어요."
팀장이 김창식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요?"
"너 배우가 꿈이었다며? 본격적으로 할 거야?"
김창식 형사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 무리죠. 제 실력으로 지금 영화판에 들어가 봤자 배역 따기도 힘들어요. 배우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사표부터 써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애들은 어떻게 키우라고."
"왜? 오늘 보니까 네 연기 죽이던데. 진짜 배우인 줄 알았다."
다른 팀원도 말했다.
"인터넷에 반응도 좋던데? 무슨 형사가 배우보다 더 연기를 잘하냐고 난리야."
"다들 엄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드셔. 지금 누굴 길바닥에 앉히려고 그래?"
"어? 드라마에 창식이 또 나온다."
"한 번 나오고 끝이 아니구나?"
김창식이 자랑했다.
"우리 세 명의 총 출연 시간이 10분이다. 10분이면 엄청 길게 나오는 거야."
***
팀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설거지도 끝낸 후에, 김창식이 욕실 거울 앞에 섰다.
"음…. 나 정도면 얼굴이나 몸이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그가 예전에 나온 유명한 영화 속 형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표정을 지었다. 대사도 말해보았다.
"어쩌겠냐? 이게 내 일인데."
"풋!"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창식이 욕실 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내가 비웃고 있었다.
김창식의 얼굴이 붉어졌다.
"야. 왜?"
"수준이 너무 높은 걸 따라 했잖아. 네 연기력으로 그게 되겠니?"
"어색했지?"
"엄청."
"이상하다. 바보의 사랑을 찍을 때는 잘 됐는데. 이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 드라마에 나온 김창식의 연기는 상당히 수준 높았다.
그의 아내가 설명했다.
"그때는 수십 번을 반복해서 찍고 잘 나온 것만 조각조각 나눠서 하나로 편집한 거잖아."
김창식은 오늘 드라마를 보고 자기 연기에 감탄했다. 그래서 욕심이 조금 생기긴 했다.
그런데 아내가 현실을 말해주었다.
"오늘 드라마에 나온 네 모습은 나 감독님이 표정과 손짓 하나하나까지 다 조정해주니까 가능했던 거야."
"알아. 그래도 내가 연기한 건 사실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분이 네 잠재력을 100% 다 끌어냈으니까."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사실 잠재력이 이렇게 높다?"
"그런데 평소에도 100%가 나와? 그랬으면 벌써 배우 했지. 아마 50%도 안 나올걸?"
김창식은 납득했다.
"그건… 그렇지. 사회인 연극 때가 내 평상시 연기력이니까."
납득은 했는데 미련이 남는 말투였다.
그의 아내가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왜? 배우가 하고 싶어?"
"원래 꿈이었잖아."
현실 때문에 그 꿈을 접었다. 다시 그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 뭐, 쉬는 날 단역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으응?"
그의 아내가 제안했다.
"독립영화 쪽에 아는 사람 몇 명 있다며. 쉬는 날 찍을 수 있는 거로 단역 정도는 괜찮잖아. 이제 드라마 출연 경력이 생겼으니까 단역은 가능하지 않나?"
김창식 형사가 거울을 보며 말했다.
"도전해 볼까? 하긴. 이 얼굴이면 주인공도 가능…."
"물론 조폭 역할이 딱이겠지."
***
최진욱 피디가 드라마 ‘바보의 사랑’의 CG를 맡은 업체를 만났다.
회의 도중에 최진욱이 물었다.
"지난번에 보내준 옥상 전투 CG는 진행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것도 서둘러야 하는데요."
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회의 마지막에 보여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CG 수정안으로 보내주신 스케치들 말입니다."
"아…. 어렵습니까? 기존에 작업된 분량을 최대한 활용하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 스케치, CG의 신이 그렸습니까?"
최진욱은 CG를 만들기 어렵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하, 하하. 퀄이 좀 높지요? 그래도 그 그림과 최대한 비슷하게 작업해줬으면 합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양보해야 하는 것도 있다.
"물론 기간 안에 가능한 수준으로요.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 그림 수준으로 퀄을 맞추려다가 일정이 늦어지면 망합니다. 퀄보다 중요한 게 일정입니다."
CG 업체 담당자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 늦어지다니요? 오히려 일정이 대폭 단축됐는데요."
"네?"
최진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CG의 신이 그렸냐고 물어볼 정도로 고퀄이면, 제작 기간이 늘어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 퀄이 높긴 한데 그래서 한 말이 아닙니다. 저희가 작업을 해보니까 효율이 정말…. 와."
"효율이요?"
"정말 이런 최적화 모델은 처음 봤습니다. 작업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졌어요."
최진욱은 나강인이 그 그림을 현장에서 쓱쓱 그리는 걸 옆에서 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확실합니다. 그 스케치들은 이런 CG 작업을 수없이 많이 해본, CG의 신이 설계한 겁니다."
***
최진욱이 촬영장에서 그 이야기를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신은하가 그걸 듣고 말했다.
"와. 강인 오빠. 하다 하다 이제 CG까지…."
AI 전지인이 말했다.
-3D 홀로그램을 저보다 더 잘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옥상 전투 스케치는 CG 제작 업체의 작업 기간이 대폭 단축되는 방향으로 그렸습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기간이 넉넉하면 좀 다르게 그렸을까?"
-옥상 전투의 구성은 바뀌지 않지만, CG의 수준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 드라마 CG용 스케치는 제작 기간 단축에 가중치를 두었고, 앤서니 피트에게 준 매트로폴리스 헌터 CG용 스케치는 퀄리티에 가중치를 두었습니다.
"그 영화용 CG 스케치가 더 좋아 보이긴 하더라."
-제작에 들어가는 예산과 시간이 다릅니다.
***
나강인은 최근에 한적한 길에서 매복한 용병들도 잡고 폭탄을 설치한 청부업자들도 잡았다.
두 사건으로 잡아들인 놈이 모두 여덟이다. 자백할 놈이 많아지면서 차 이사에 관한 정보도 늘어났다.
박순기가 나강인을 만나 수사 상황을 설명했다.
"나 사범님이 이틀 연속으로 습격당했을 때는, 스케줄 표에 나 사범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에는 스케줄에 이름이 없는 상태로 촬영장에 갔더니 습격도 없었습니다."
"차 이사에게 드라마 스케줄 정보를 제공하는 놈이 있을 겁니다."
"예. 그걸 추적하는 중입니다. 문제는."
"용의자가 많겠죠."
"맞습니다. 드라마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까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원하고, 기획사들은 배우의 정보를 원하죠. 경쟁사에서도 원하고요."
박순기가 태블릿PC에 명단이 적힌 문서를 띄워 보여주었다.
"습격당하신 날의 촬영 스케줄을 빼간 사람들로 용의자를 추렸습니다. 이틀 다 빼간 사람들로 대상을 줄였습니다만 그래도 많습니다. 일단 파악한 명단입니다."
나강인이 명단을 쭉 넘겨보았다. AI 전지인이 그 정보를 기억했다.
"기자와 기획사…. 정치인도 몇 명 있네요?"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사람을 섭외해서 얼굴마담으로 쓰려는 거겠죠. 그런 정치인은 항상 있습니다."
"그럴 거면 배우를 섭외하지."
"잘나가는 배우는 아쉬울 게 없는 데다가 정치판에 잘못 들어가면 인기가 뚝 떨어집니다. 그래서 섭외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배우가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
"나 사범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런 거겠죠. 아직은 기자를 통해서 간단히 알아본 정도입니다."
명단을 넘기던 나강인이 멈칫했다.
"음? 김석명의 보좌관도 있네요?"
박순기가 웃었다.
"김석명 의원이 전에 용산에서 구출되자마자 자기를 구해준 특수요원이 누군지 찾으려고 여기저기 연락을 엄청 돌렸다더군요."
"선물이라도 주려고 찾은 건 아닐 테고."
"그 특수요원을 한직으로 쳐내려고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명단에 김석명이 있는 걸 보면, 내가 누구인지 찾긴 찾았나 보네요."
박순기가 명단을 돌려받으며 말했다.
"이 명단과 두 사건의 정보를 교차 확인하면서 대상자를 좁히고 있습니다. 나 사범님의 정보를 차 이사에게 넘긴 놈은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은 조립식 자재로 지은 창고를 혼자 찾아갔다.
창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소형 냉장고와 술 몇 병, 육포나 견과, 과자 등도 있었다.
김석명이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차 이사. 우리는 더 일찍 만나서 힘을 모아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나강인을 더 일찍 찾아냈을 테고, 일이 이렇게 꼬이기 전에 처리할 시간도 충분히 있었을 테니까."
차 이사는 소파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나한테도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도 얼굴을 모르는 차 이사니까. 아. 나는 이제 알지만요. 하하하."
차 이사는 웃지 않았다.
무안해진 김석명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뭡니까?"
"의원님을 집이나 사무실에서 만날 수는 없잖습니까? 우리가 룸살롱에서 만나는 건 더 말이 안 되고요."
"여기 안전하긴 한 거지요?"
"주변에 CCTV도 없고, 월세는 현금으로 냈습니다. 계약서는 차명으로 작성했으니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아무도 모릅니다."
"오. 좋군요. 안가는 역시 좀 허름한 곳이 좋지요."
"의원님도 잘 아시는군요."
"정치를 하다 보면 안가가 필요할 때가 있어서."
김석명도 영등포에 비밀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압수수색을 피해야 하는 자료를 그곳에 보관했다.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 위스키 잔을 들며 물었다.
"차 이사.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