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차 이사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 위스키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 이사가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로 물었다.
"그걸 마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김석명은 멈칫했다.
"이 양주는 마시라고 가져다 놓은 것 아닙니까?"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일이 복잡해집니다만?"
"지금 대낮인데?"
"가끔은 낮에도 음주 단속을 합니다."
"차 이사가 법을 지키자고 하는 소리는 아닐 테고."
"설마 그래서겠습니까?"
김석명이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나 김석명입니다. 삼선 국회의원이란 말입니다. 운 나쁘게 걸려도 전화 한 통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의원님이야말로 아직 상황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지금은 말입니다. 작은 구멍 하나가 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시기입니다."
김석명이 술잔을 든 채로 차 이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가르치는 겁니까?"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김석명이 차 이사를 보며 생각했다.
‘일의 주도권을 쥐려고 나를 하수 취급하는 거군.’
김석명이 피식 웃더니 위스키를 단숨에 마셨다.
"크으."
차 이사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김석명이 말했다.
"나 삼선 의원입니다. 내가 합법적인 일만 해서 세 번이나 당선됐을 것 같습니까? 흔적 없이 움직이는 방법을 모를까요?"
그가 탁자 위에 술잔을 탁 내려놓고 위스키를 새로 따랐다.
"여기는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물론 택시비는 현금으로 냈지요. 차 이사만 이 창고를 빌릴 때 조심한 게 아닙니다. 나도 이런 거 익숙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러니까 난 술을 마셔도 되는데, 차 이사는 아닌가 봅니다? 날 가르칠 수준은 아닌 거 같군요."
차 이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올 때는 택시를 타셨다 치고, 갈 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택시를 타야지요."
"여기는 외진 곳이라 택시가 오지 않습니다만?"
김석명은 멈칫했다.
"어?"
"콜택시를 불러 기록을 남겨선 안 되는 건 아실 테고."
"아니, 그게…."
"30분쯤 걸어가면 되긴 합니다."
김석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택시가 다니는 곳까지 차 이사가 좀 태워 주면…."
"우리는 남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 젠장! 걸어가면 될 거 아닙니까!"
"30분이나 걸으면 목격자를 만날 위험이 있습니다. 저쪽 산을 한 시간 정도 넘어가면 목격자 없이 택시가 다니는 곳에 도착합니다."
김석명은 길도 제대로 없는 산을 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뭔가 방법이 뭔가 있습니까?"
"뒷좌석에 누워 있으시면 태워드릴 수 있습니다만."
김석명이 차 이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면 너무 없어 보이는데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일부러 술을 가져다 놨나?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의심은 갔지만 증거가 없다.
"끄응."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 차 이사를 비난해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무장 청부업자를 여섯이나 동원해서 나강인을 습격했던 건, 너무 요란하게 실패해서 뉴스에 크게 났던데."
얼마 전에 외국에서 들어온 용병 여섯 명이 차량 두 대를 동원해 한적한 길에 매복했다가 나강인을 습격했다.
그 여섯 중 셋은 승합차에 탄 채로 나강인의 차에 들이받혀 기절했다. 둘은 총을 맞았다. 하나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로 생포됐다.
김석명이 따져 물었다.
"2차 작전에서는 나강인을 확실히 날려버리겠다더니, 그것도 실패했다는 겁니까?"
김석명은 얼마 전부터 차 이사를 만나기를 원했다. 차 이사는 그러겠다고만 하고 정작 만나는 건 미뤘다.
그런데 두 번째 습격까지 실패했다. 그 문제를 김석명이 강하게 따지는 바람에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오늘 자리가 마련됐다.
차 이사가 말했다.
"나강인을 폭탄으로 확실히 날려버리려 했습니다만, 일이 틀어졌습니다."
김석명은 차 이사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랐다. 두 번째 습격은 뉴스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김석명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폭탄이요? 아니, 차 이사는 폭탄을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뒷감당하기 어렵게."
차 이사는 용산 15층 건물 사건에서는 폭탄마 오르카를 끌어들였다.
"이번에는 건물이 아니라 나강인이 탄 차 한 대만 터트리려던 겁니다."
"그래도…."
"어차피 실패해서 안 터졌습니다."
"그럼 뒤탈은 없겠습니까?"
"그 사건은 뉴스에 나지 않아 정보가 없습니다. 의원님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주셔야겠습니다."
김석명이 손을 흔들었다.
"어허. 차 이사. 그러다 내가 걸리면 차 이사도 위험해진다니까? 우리 이제 이렇게 얼굴까지 보는 사이인데, 내가 잡히면 차 이사도 같이 망해요."
그게 김석명이 차 이사를 만나려고 한 이유다. 차 이사가 누군지 알아야 잡혔을 때 같이 망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차 이사가 배신하기 어렵다.
‘내가 오늘 돌아가서 차 이사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잘 숨겨두면, 내가 죽거나 잡히면 차 이사도 잡히지.’
차 이사가 물었다.
"의원님. 우리가 만나는 대신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러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이번 일도 정보 제공을 적극적으로 하셔야지요."
"문제가 안 생기게 조심하자는 겁니다. 지금 그 사건을 알아보러 다니면 의심받아요."
차 이사가 김석명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경찰은 두 사건을 조사해서 수사망을 좁혀오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십시오."
"커흠. 나도 압니다."
김석명은 차 이사가 여러 기관에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일부러 연락을 끊었었다.
이번 일에서도 발을 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발을 뺄 단계는 한참 지났다.
김석명이 물었다.
"차 이사.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나강인을 제거하려다가 우리만 위험해지고 있잖습니까?"
김석명이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어차피 택시가 오는 곳까지 차 이사의 차를 얻어탈 생각이라 그냥 마셨다.
"차 이사. 그냥 외국으로 떠요. 중국으로 밀항한 후에 적당한 나라로 옮겨가라고요. 그동안 돈 많이 벌었을 테니까, 남태평양 휴양지나 유럽 경치 좋은 곳에서 이삼 년 정도 놀고먹어요. 그러면 조용해지겠지."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아니, 왜요? 나강인은 건드릴수록 손해라니까? 나도 그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차 이사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난 당하고는 못 사는 사람입니다."
"어? 아니, 일하다 보면 한 번쯤 당할 수도 있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놈에게 용산에서 처음 당한 게 아니더군요. 예전에 틀어진 일들이, 다시 생각해보니 다 그놈 짓이겠더군요."
"저런. 나강인에게 당한 게 많나 봅니다. 그래도 조용해질 때까지 일단 외국으로…."
"나강인을 죽인 후에 한국을 뜰 겁니다."
김석명은 답답했다.
그도 처음에는 나강인이 죽거나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 이사가 나강인을 공격할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이제는 김석명까지 수렁에 빠졌다. 그가 짜증을 냈다.
"거 사람 참 답답하네! 그러다 우리가 죽는다니까!"
차 이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시간이 됐군요."
"시간?"
"이번엔 확실한 걸 준비했습니다. 나강인은 이제 곧 죽습니다."
김석명은 당황했다.
"어? 그런 중요한 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거요?"
"이번 일의 정보는 의원님이 제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해주는 겁니다."
김석명은 무슨 정보를 제공했는지 떠올렸다.
‘나강인의 촬영 스케줄 정보?’
그가 시계를 보았다. 나강인의 촬영 스케줄은 지금이었다.
"그 정보는 한두 번 넘겨준 게 아닌데, 왜 하필 나랑 만날 때 그 일을…."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겁니다."
김석명이 벌떡 일어났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난 여기를 나가야겠어!"
차 이사가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그러면서 옷이 슬쩍 젖혀졌다. 권총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앉으시죠. 의원님."
"어? 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감히 국회의원을 협박해?"
"협박한 적 없습니다만?"
김석명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오늘 여기서 차 이사와 단둘이 만나 얼굴을 확인한 건, 아직은 차 이사가 그를 제거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내 도움이 필요하니까 나에게 손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만약 지금 나강인이 죽으면 김석명의 가치가 뚝 떨어진다.
‘내가 필요 없어지면, 차 이사가 자기 얼굴을 본 나를 제거할 수 있어. 이 새끼! 그러려고 이 시간에 만나자고 했구나!’
차 이사가 조금 전에 음주운전 이야기를 한 것도 떠올랐다. 김석명은 술을 마시면서 이곳에 온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그것도 의심이 갔다.
‘일부러 내가 자주 즐기는 술을 가져다 놨구나! 내가 여기 온 걸 다른 사람이 아는지 알아보려고 떠본 거였어!’
그가 이곳에 온 건 아무도 모른다고 이미 말했다.
김석명이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나강인은 적어도 오늘은 죽지 않아야 해. 젠장. 지금 죽으면 나까지 위험해.’
김석명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 확실한 겁니까?"
차 이사가 씩 웃었다. 웃음이 서늘했다.
"물론입니다. 어렵게 섭외한 최고의 킬러가 곧 나강인을 죽일 겁니다."
"지난번에도 킬러를 썼지만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세계 최고의 킬러니까요."
차 이사가 시계를 확인했다.
"어쩌면 이미 나강인을 죽였을 수도 있겠군요."
김석명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
하늘공원은 한강 옆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폐쇄하면서 그 자리에 흙을 덮어 만든 공원이다. 그 공원은 높은 봉우리 위쪽에 있는 평지의 넓이가 몇만 평에 달할 정도로 컸다.
봉우리의 경사면은 가팔랐다. 평범하게 걸어서 올라가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그 경사면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바로 앞에는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북로가 있다. 그 도로를 넘어가면 난지한강공원이 나온다. 그 공원은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공원과는 반대로 폭우가 내려 한강 수위가 많이 올라가면 일부가 잠기는 날이 있을 정도로 지대가 낮았다.
난지한강공원 너머에는 한강이 흘렀다.
강변북로 쪽 경사면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킬러가 가방을 열고 저격소총을 조립했다.
그가 사용하는 저격소총은 러시아에서 개발한 드라구노프의 민수용 버전이다.
그 저격소총은 생산된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개조된 것이다. 그 총은 세 조각으로 분리할 수 있어서 적당한 크기의 가방에 넣기 좋았다.
개머리판은 완충장치가 들어간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했다.
약실 주변도 총소리를 줄여주는 형태로 개조되어 있었다.
킬러는 총구에 소음기를 끼우고 마지막으로 조준경을 달았다. 그런 후에 난지한강공원으로 총을 겨누고 조준경에 눈을 댔다.
고배율 조준경 너머로 난지한강공원의 드라마 촬영장이 보였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킬러가 작게 불평했다.
"남들이 모르게 조용히 제거해야 탈출이 쉬운데 말이야. 저런 곳을 쏘면 현장이 시끄러워질 텐데."
그의 평소 스타일이라면 좀 더 안전한 저격 장소를 찾겠지만, 이번 의뢰는 이곳에서 쏠 수밖에 없었다. 타깃이 나타나는 시간과 장소에 관한 정보가 오늘 촬영에 관한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때라면 이런 위험한 의뢰는 받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만은 예외로 받아들였다. 위험한데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가 조준경에서 눈을 뗀 후에 아래를 보았다. 강변북로에서 옆으로 빠지는 샛길에 주차된 차가 몇 대 있었다. 그중에는 그가 세워둔 차도 있었다.
그가 사진을 한 장 꺼내 저격총 옆에 꽂았다. 사진 속에 나강인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탈출 계획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 조용히 읊었다.
"타깃을 찾아서 쏘고, 한국 경찰이 오기 전에 이곳을 이탈. 경찰이 현장을 조사하는 사이에 인천공항으로 직행."
여기서 인천공항까지는 자동차도로가 쭉 연결되어 있다. 이 시간대에는 막힐 일도 없다.
이미 비행기 표도 준비해놨다.
"탈출 루트는 확보했으니."
그가 나강인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딱 한 발이면 충분하겠군."
***
드라마 ‘바보의 사랑’은 오늘은 난지한강공원에서 촬영 중이다. 최진욱 피디는 제작 시간을 줄이려고 촬영지를 거리가 가깝고 잘 아는 이곳으로 정했다.
도주희 작가가 물었다.
"나강인 씨는?"
최진욱 피디가 대답했다.
"방금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어. 아. 저기 있다."
최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강인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