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킬러
최진욱 피디가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에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지난번 드라마도 여기서 강인 씨가 액션 대역을 했잖아. 그때도 장난 아니었지? 그 드라마 시청률이 그때부터 쭉쭉 올라갔잖아."
도주희 작가가 맞장구를 쳤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차기작도 꼭 나강인 씨랑 하고 싶었어."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최 피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라. 우리 다음 작품도 나강인 씨랑 하려면 이 정도 립서비스는 해야 할 거 아냐."
최진욱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음 작품을 벌써 구상했어? 근데 난 왜 몰랐지?"
"아직 구상 안 했어."
"에이. 뭐냐."
"근데 설사 음악가나 미술가 이야기를 쓰더라도 명품 액션을 넣으려고. 공연에 화려한 퍼포먼스를 넣어도 되고, 그림을 훔치려는 도둑놈하고 싸울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나강인 씨가 다음도 우리하고 같이 일해줄까? 섭외하기 진짜 어려운 사람인 거 알잖아."
"그 어려운 걸 네가 해냈잖아? 다음에도 꼭 섭외에 성공해라."
"어?"
"내가 너 믿는 거 알지?"
"나 꼭 믿어야 하냐? 이것만 빼고 믿으면 안 될까?"
***
나강인은 난지한강공원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차 이사가 묘하게 조용하단 말이야."
-공격을 포기할 놈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지. 조금만 수상한 게 보여도 바로 이야기해."
-경계 수준을 한 단계 높일까요?
"팍팍 써라. 넉넉하게 세 단계쯤 높여."
AI 전지인이 공원의 세 지점에 노란색 경고 표시를 띄웠다.
나강인이 물었다.
"수상한 사람이 셋이나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냐? 조금 전까지는 없었잖아."
-감시 기준을 3단계 상향했습니다.
"어…. 3단계 상향이 생각보다 높나 보다?"
-많이 높습니다. 이제 조금만 이상한 점이 있어도 경고가 뜹니다.
"예를 들면?"
AI 전지인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원을 방문한 가족의 모습을 확대했다.
-저 가족이 가지고 있는 가방 중에 소총을 숨기기 딱 좋은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 위치가 주변을 정찰하기 딱 좋습니다.
"그럼 저 사람은?"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도잖아. 사과 깎고 있잖아."
-충분히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서 안 의심스러운 사람이 누가 있냐?"
-평소보다 3단계 높은 경계 상태는, 적 점령지 한복판에서 침투 작전을 수행할 때나 사용하는 수준입니다.
"여기가 그런 곳은 아니잖아. 너무 높다."
-감시 기준을 평소 수준으로 낮출까요?
"평소보다 1단계만 높이자. 평소보다는 높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게."
-알겠습니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감시 기준을 높였으니, 위기 대응 단계도 높일까요?
"높여."
-알겠습니다.
***
킬러는 하늘공원 경사면에 숨어서 공원을 감시했다. 그의 저격소총에는 나강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킬러의 조준경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멈췄다. 조준경 너머로 나강인이 보였다.
킬러가 사진을 확인했다. 같은 얼굴이 보였다.
"찾았다."
그는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지도에서 나강인이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그가 현재 있는 위치에서 나강인이 서 있는 곳까지 선을 그었다. 거리가 간단히 나왔다.
"약 400m."
한국군 보병이 훈련할 때 쓰는 사격장의 250사로보다 150m가 더 멀었다. 사람이 너무 작게 보여서 맨눈으로는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400m면 일반 보병이 K2 소총으로 쏘기엔 좀 먼 거리다. 잘 훈련된 병사가 고배율 스코프가 장착된 저격소총으로 쏘면 충분히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저격수가 쏘면 명중률은 더 높아진다.
킬러가 저격소총의 조준경을 조정했다. 그런 후에 자세를 제대로 잡고 나강인을 조준했다.
나강인은 한 자리에 서서 김유찬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준경의 십자선이 나강인의 가슴을 향했다.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킬러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그는 이 거리에서 저격하면 빗나갈 리 없다고 확신했다.
‘이번 일은 탈출에 리스크가 좀 있으니까, 한 방에 확실히 제거하고 빠져나가야겠어.’
십자선이 조금 위로 올라와 나강인의 얼굴 한복판에 정확히 걸렸다. 킬러가 손가락을 방아쇠에 살짝 얹었다.
‘머리를 쏘면 원샷원킬. 이번 의뢰는 타깃을 죽이는 건 무척 쉽군.’
킬러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부드럽게 당겼다.
공이가 탄피를 때렸다. 탄피 속에서 장약이 폭발했다. 강력한 폭발 압력이 탄두를 앞으로 밀어냈다.
강선이 파인 총신을 총탄이 회전하면서 통과했다. 총구에 장착한 소음기가 가스압을 확산시켜 총소리를 줄여주었다.
초속 700m/s.
킬러가 사용하는 개조 저격소총은 원판과는 스펙이 다르다. 탄약도 커스텀 버전을 사용했다.
총탄은 1초에 약 700m를 날아가는 속도로 총구를 빠져나왔다.
나강인과 저격수 사이의 거리는 약 400m다. 총탄이 처음 속도를 끝까지 유지하며 날아가면 나강인이 있는 곳까지 0.67초가 걸린다.
실제로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공기의 저항이 총탄의 비행 속도를 계속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래도 400m를 날아가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나강인은 드라마 ‘바보의 사랑’에서 액션의 전권을 가진 무술감독이다. 동시에 김유찬의 대역도 맡고 있다.
그는 촬영장에서 김유찬을 만나 이야기했다.
저격소총의 총탄은 소리보다 빠르다. 총소리보다 총탄이 먼저 나강인이 있는 곳까지 날아간다.
그런데 총탄보다 훨씬 더 빠른 것이 있었다. 총을 쏠 때 발생하는 섬광이 숲에서 번뜩였다.
갑자기 나강인의 시야에 빨간 경고 문구 십여 개가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몸이 옆으로 쓱 움직였다.
그건 나강인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다. 움직인 거리는 약 1m에 불과했다. 동작도 크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옆으로 걸어간 것뿐이다.
그가 옆으로 움직이자마자, 그가 서 있던 곳을 저격수의 총탄이 가르고 지나갔다. 빗나간 총탄은 그대로 날아가 한강에 꽂혔다. 물이 튀었다.
뒤늦게 작은 총성이 따라왔다.
총소리가 강변북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에 섞였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개조된 저격소총에서 소음기를 통과하며 작아진 총소리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총탄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갈 때도 소리는 난다. 그런데 총탄이 곧바로 강물에 빠졌기 때문에 그 소리가 들린 시간이 워낙 짧았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특이한 소리가 났다고만 생각했다.
AI 전지인이 그 작은 총소리를 자동차 소음에서 분리해 나강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고속음성으로 보고했다.
-적 저격 발견! 비상 대응 프로토콜에 의해 요원님의 신체를 옆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나강인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
눈앞에 뜬 십여 개의 붉은색 경고 표시 중에는 [저격 상황 발생], [비상 대응 프로토콜에 의한 회피 시도], [회피 성공]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고 표시 중에는 하늘공원 경사면을 가리키는 것도 있었다.
[총기 발사 섬광 확인]
총에 소음기를 달면 발사할 때 눈에 보이는 불꽃이 꽤 많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그 불꽃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 정도로는 경계단계를 높인 AI 전지인의 감지 시스템을 피할 수 없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적 저격수 발견!
킬러는 저격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명중을 확신했다. 가만히 서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표적이 갑자기 움직일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바람이 심한 날도 아니었다.
‘잡았군.’
그렇게 생각했다.
발사 반동으로 총이 흔들리면서 조준경이 살짝 움직였다. 거리가 꽤 멀어서 그 정도만 움직여도 목표가 조준경에서 사라진다.
조준경이 표적에서 벗어난 시간은 짧았다. 십자선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킬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강인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어?"
그가 스코프를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놀란 얼굴로 서 있는 김유찬이 보였다.
김유찬은 의뢰 대상이 아니다.
그는 나강인을 찾기 위해 조준경을 반대 방향으로 조금 움직였다.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맨눈으로 난지한강공원을 확인했다.
그가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나강인이 보였다. 저격수를 경계하면서 달려오는데도 빨랐다.
뛰어오는 방향은 정확히 킬러가 있는 쪽이었다.
"젠장!"
킬러는 위치를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발사 섬광을 봤나?’
위치를 들킨 이유는 알겠는데, 저격이 왜 빗나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다시 조준경에 눈을 대고 총구를 움직였다. 목표는 나강인이다.
그의 저격소총은 반자동이다. 재장전할 필요 없이 방아쇠만 당기면 총탄이 나간다.
나강인이 조준경의 십자선 안에 들어왔다. 킬러가 이번에는 나강인의 가슴 한복판을 노리며 말했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는데 참 열심히도 뛴다. 첫 탄에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줬으면 좋았잖아."
김유찬은 방금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강인이 그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옆으로 휙 움직였다.
그 직후에 바로 앞을 뭔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바로 앞을 날아가는 소리만 들었다.
총소리도 아주 작게 들렸다. 자동차 소음으로 오해할 만큼 작았지만, 김유찬은 총소리라는 걸 눈치챘다.
곧바로 나강인이 하늘공원 방향으로 달렸다.
김유찬이 나강인과 하늘공원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와…. 강인 씨는 이젠 날아오는 총알도 막 피하는구나."
나강인이 킬러를 향해 뛰며 말했다.
"긴급 대응 프로토콜이라니!"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보고했다.
-요원님이 위기 대응 단계를 높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는 제한적인 행동 보조 허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저격 등으로 요원님의 생명이 심각한 위험에 노출됐을 때, 제가 판단해 요원님의 신체를 조금 이동하는 것이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그 회피는 저놈이 쏠 때마다 네가 할 수 있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비상시에 한 번만 사용이 허용된 스킬입니다. 재사용을 위해서는 요원님이 스킬을 초기화하셔야 합니다.
"그럼 초기화해!"
-절차가 복잡합니다. 전투 도중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적이 쏘면 직접 피하셔야 합니다.
"젠장."
-원래는 큰 효과는 없는 기능입니다. 저니까 저격을 한 번이라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저놈은 왜 쏘기 전에 못 찾은 거야?"
-적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위장을 너무 잘했습니다. 은신한 위치도 발각이 어려운 곳입니다. 1단계만 상향된 감시 기준으로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감시 기준을 너무 높이면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적진이 아니라 일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효과도 오히려 떨어진다. 높은 단계에서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행동까지 이상 신호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단계는?"
-저격수를 포착해 최고수준으로 대응 중입니….
갑자기 경고 표시가 주르륵 떴다.
킬러가 달려오는 나강인을 새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십자선이 정확히 나강인의 심장을 노렸다.
킬러는 확신했다.
‘이번엔 잡았다.’
총구에서 발사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 AI 전지인이 경고 표시를 띄웠다. 동시에 적의 사격 방향을 예측했다.
나강인이 권총을 든 적과 싸울 때는 총탄이 날아올 궤적이 선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선이 아니라 조금 넓은 영역이 위험 범위로 표시됐다. 적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정확한 사격 방향을 계산하기 어려웠다.
대신에 총탄이 날아올 때까지 0.5초의 시간이 있었다. 0.5초면 적이 쏘는 걸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다.
나강인이 앞으로 달리다 땅을 박차며 옆으로 뛰었다. 적의 총탄이 그가 서 있던 공간을 갈랐다.
킬러는 사격하자마자 재빨리 나강인을 확인했다. 나강인은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첫발은 실수로 빗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왜 또 빗나갔지?’
발사 순간에는 총구가 흔들려 정확히 보지 못했다.
그는 다시 나강인을 조준했다. 이번에는 맨눈으로도 나강인을 보며 사격했다. 거리가 첫 저격 때보다 가까워져서 양쪽 눈으로 보면서 쏴도 빗나갈 확률은 낮았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나강인이 옆으로 피했다. 총탄이 다시 빗나갔다.
킬러는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피했어? 어떻게!"
그는 방금 눈으로 본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격수의 총탄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나강인을 정확히 조준하는 건 포기하고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나강인이 그때마다 달려오는 방향을 바꾸며 총탄을 피했다.
사격은 겨우 두 발을 더 하고 끝났다. 공원은 지대가 낮았다.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북로가 공원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도로와 공원 사이에는 하늘공원 경사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옆으로 길게 있었다.
나강인이 도로 옆 사각지대로 들어가면서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킬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젠장! 사람이 어떻게 총을 보고 피해! 저건 인간이 아니야!"
그가 맨눈으로 도로 너머를 살폈다. 나강인이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적이 보이는 적보다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