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킬러 II
킬러가 나강인을 찾으려고 자동차전용도로와 공원 사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사각지대로 사라진 나강인을 쏠 방법이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다.
‘철수할까?’
저격에 실패했다. 게다가 타깃이 살아서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럴 때는 빨리 현재 위치를 이탈해야 한다. 그게 정석이다.
그를 노리고 달려오던 나강인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두려웠다.
나강인이 총탄을 피하면서 달려올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이 더 두려웠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킬러는 전쟁터에 던져진 신병이 아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생존 확률이 높은 방법이 뭔지부터 궁리했다.
‘사각지대에 숨어서 내 저격을 피하는 게 목적이라면 저 끝에서 이쪽으로 달려오지도 않았겠지. 공원 중간에 있는 다른 구조물 뒤에 숨으면 되니까.’
그런데 나강인은 정확히 킬러의 위치를 확인하고 똑바로 달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타깃을 노렸지만, 이제는 타깃도 나를 노린다. 나를 잡으러 온 놈이, 내가 철수하는 걸 구경만 할 리는 없다.’
킬러는 나강인에게 어떤 무기가 있는지 모른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설마 권총은 없겠지. 칼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함부로 경사면을 내려가지는 못했다. 이미 상대는 상식을 초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경사면을 내려갔다가 상대에게 기습당하면 살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나강인이 살아있으면 탈출하기 어려워진다.
‘타깃이 내 차의 번호를 경찰에 알리면, 인천공항으로는 못 간다.’
원래 계획은 나강인을 저격한 후에 차를 타고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가서 국외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강인이 살아있으면 그 루트는 못 쓴다.
시간은 킬러의 편이 아니다. 나강인과 대치하고 있다가 한국 경찰이나 군대가 몰려오면, 킬러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
‘저격은 쉽고 탈출만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처음 방아쇠를 당긴 후부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 의뢰에 돈을 많이 주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구나.’
괜히 이 의뢰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킬러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다.
‘놈을 먼저 잡아야 해.’
그러려면 사선을 확보해야 한다. 도로 아래 경사면에 숨어있는 사람을 쏘려면 여기서는 안 된다.
‘놈이 가만히 있을까? 아니야. 그럴 거면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겠지.’
그가 강변북로를 보았다. 10차선 도로에 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다.
‘차가 저렇게 빠르게 달리는 도로를 사람이 건너는 건 위험해. 나라면 도로 아래쪽을 따라 이동해서 오른쪽의 지하통로를 이용해 이쪽으로 넘어올 거야.’
킬러가 경사면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총구를 지하통로 쪽으로 돌렸다.
"와라!"
***
나강인이 도로와 공원 사이에 있었다. 도로의 높이가 그의 키보다 더 높았다.
"지인아. 도로를 가로지르자."
-도로 위를 차가 시속 80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차가 너무 많습니다.
"잘 피해야지."
-요원님만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요원님이 갑자기 도로를 가로지르면 대형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경사면에 붙어서 포복으로 올라간 후에 손거울을 살짝 올렸다.
"사고 안 나는 코스를 찾아. 넌 할 수 있어. 내가 믿는 거 알지?"
-요즘은 잘 안 믿으십니다만?
"따지지 말고."
-도로의 차량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11초 후에 뛰십시오.
차가 고속으로 많이 다니는 도로라고 해도, 지나가는 차가 없는 때가 잠깐씩은 있다.
이 위치에서 10차선인 강변북로를 가로지르려면 거의 50m는 달려야 한다. 단거리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뛴다고 해도 5초가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보고했다.
-도로를 3초 이내에 돌파해야 교통사고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그렇게는 못 뛰어."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속도지만, 나강인은 평범하지 않았다.
-지구연합군의 군용 신체 강화 시술을 받은 요원님의 몸을 믿으십시오.
11초 후에 나강인이 바닥을 박차고 강변북로 위로 올라갔다. 그는 발끝이 자동차전용도로에 닿자마자 반대편으로 달렸다.
3초로 세팅된 시간 게이지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일반인의 몇 배나 되는 근력이 그의 몸을 화살처럼 앞으로 날렸다.
나강인이 넓은 도로를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던 사람은 깜짝 놀랐다. 저 앞쪽에서 뭔가가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지는 않았다.
"뭐, 뭐가 지나간 거야? 사람이야?"
조수석에 탄 여자친구가 말했다.
"설마. 치타겠지."
"사람 같았는데?"
"사람이 저렇게 빨리 달리는 게 말이 돼?"
"강변북로를 치타가 뛰어다니는 건 말이 되고?"
"결정해. 사람이야? 치타야?"
"사람을 고르면?"
"난 집에 가겠지?"
운전하는 남자친구가 즉시 말을 바꾸었다.
"방금 그건 치타였다. 내가 동물의 왕국에서 똑같이 생긴 치타를 봤어. 확실해."
킬러는 오른쪽 지하통로로 총구를 돌려놓았지만 그렇다고 나강인이 사라진 방향을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나강인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걸 발견하고 총구를 돌렸다. 총구를 급히 돌리느라 자세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강인이 너무 빨랐다.
"미친! 사람의 속도가 아니잖아!"
나강인은 순식간에 도로를 건너뛰어 경사면을 올라왔다.
거리가 가까워서 조준경은 오히려 방해되었다. 킬러는 맨눈으로 나강인을 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나강인도 이제 맨눈으로 킬러의 총구는 물론이고 어깨와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정확히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적의 움직임을 분석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적의 사격 순간과 방향을 예측했다.
킬러의 저격소총이 가까운 거리에서 불을 뿜었다.
나강인이 적의 발사 순간에 옆으로 이동했다.
경사면에는 일부러 심어 놓은 나무가 많았다. 총탄이 애꿎은 나무만 뚫었다. 파편이 튀었다.
나강인은 킬러를 똑바로 보며 경사면을 뛰어 올라갔다. 킬러가 다급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이제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 거리에서는 총신이 긴 저격소총은 효율이 떨어진다. 게다가 소총은 권총보다 사격 방향을 예측하기 쉽다.
킬러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애꿎은 나무 파편만 튀었다. 나강인에게 맞는 건 한 발도 없었다.
킬러는 개조 저격소총에 10발짜리 탄창을 사용했다. 나강인이 한강공원에서 달려올 때 이미 다섯 발을 소모했다. 남은 다섯 발도 순식간에 소모되고 탄창이 텅 비었다.
킬러는 즉시 저격소총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권총을 뽑았다. 반자동권총의 탄창에는 9mm 총탄이 17발이나 들어있었다.
킬러는 권총을 뽑으며 후회했다.
‘무기를 미리 바꿨어야 했어. 근거리 전투에서는 권총 속사가 훨씬 유리한데!’
저격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뽑는 사이에 나강인이 회피 동작 없이 똑바로 달려왔다. 이제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나강인의 손이 경사면 바닥을 훑었다.
킬러가 방아쇠를 당겼다.
나강인이 옆으로 피하며 방금 주운 자갈을 킬러를 향해 날렸다.
총탄이 빗나갔다.
자갈이 고속으로 날아가 킬러의 이마 한복판을 때렸다.
"컥!"
킬러가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견제를 위해 날린 작은 자갈 한 방에 제압당하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전투력을 잃었다.
나강인이 위로 올라가면서 다시 바닥을 훑었다. 경사면에는 자갈이 많았다.
킬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강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나강인이 다시 자갈을 던졌다. 손끝에서 자갈이 총알처럼 날아갔다. 이번에는 견제가 아니라 제압을 목적으로 강하게 던졌다.
그 자갈이 적의 오른손을 정확히 때렸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와 옆으로 날아갔다.
킬러가 비틀거리며 왼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늦었다. 이미 나강인은 킬러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킬러가 단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칼날이 다 날아오기도 전에 나강인의 적의 팔을 잡아 콱 꺾었다.
"끄악!"
이미 킬러의 오른손은 자갈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졌다. 왼손은 방금 꺾었다.
그는 킬러의 다리를 걷어찼다. 킬러가 경사면에서 앞으로 엎어졌다.
"켁!"
그는 적의 두 손을 등 뒤로 당겨서 하나로 모았다. 그런 후에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손목을 묶었다.
나강인이 그러면서 말했다.
"차 이사가 이젠 저격수까지 보내네?"
AI 전지인이 자랑했다.
-저격수의 사격 순간을 제가 잘 감지해서 잡은 겁니다.
"오늘은 진짜 잘했다."
나강인이 킬러의 손을 단단히 묶으며 물었다.
"야. 차 이사가 나를 저격하라든?"
킬러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 차 이사가 누구…."
"다들 처음에는 모르는 척하더라.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와. 한국에서 사람을 저격했으니까 넌 이제 못 빠져나가. 교도소에서 아주 오래 살아야 한다고. 차 이사의 정보를 순순히 불어서 형량이라도 좀 감형받지?"
"진짜 모른다. 차 이사가 누구냐?"
"이 새끼가 모르는 척…."
나강인이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너 진짜 차 이사가 누구인지 모르…."
갑자기 홀로그램 경고 표시가 눈앞에 주르륵 떴다. 조금 전에 한강공원에서 킬러에게 저격당했을 때 떴던 것과 같은 경고였다.
발사 지점도 표시됐다. 거리는 약 600m. 2021년에 완공한 월드컵대교의 교각 사이였다.
공원에서 이 킬러에게 처음 저격당할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처럼 적의 저격 섬광을 AI 전지인이 발견하고 홀로그램으로 긴급 경고를 띄웠다.
하지만 조금 전 상황과는 하나가 달랐다.
비상 대응 프로토콜에 의한 회피 스킬은 이미 사용했다. 그 스킬은 정식 절차를 밟아 초기화하지 않으면 재사용할 수 없다.
조금 전에 한강공원에서는 나강인의 몸을 AI 전지인이 옆으로 조금 움직여 적의 저격을 피했다. 하지만 지금 AI 전지인은 경고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경고했다.
-저격!
고속음성은 일반 대화와는 다르다. 마치 테이프를 빨리 돌린 것처럼 순식간에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그램을 이용한 경고나 고속음성에 의한 경고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월드컵대교에서 발사된 적의 총탄이 이미 한강공원 위를 날아 나강인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긴급 회피 스킬은 이미 공원에서 사용했다. 나강인이 직접 피해야 하는데, 방금 잡은 킬러를 묶느라 적의 사격을 발견하는 게 조금 늦었다.
자세도 나빴다.
즉시 움직이면 심장은 피할 수 있지만 팔에 총탄을 맞을 수 있었다. AI 전지인은 지금 피하면 팔에 맞을 확률이 17%라고 계산했다.
나강인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적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때렸다. 정확히 심장 위치에 총알이 박혔다.
옷 속에 겹쳐 입은 드래곤 플레이트가 총탄의 충격 에너지를 넓게 퍼트렸다. 피탄 부위 주변의 부품들은 충격을 분산하고 흡수하면서 조금씩 손상됐다. 손상된 부분에서 불꽃이 튀었다.
충격이 드레곤 플레이트 전체로 퍼졌다. 모든 부품이 바르르 떨었다. 내구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내구도는 떨어졌지만 처음 한 발은 완벽하게 방어했다. 충격도 거의 없었다.
AI 렌즈에 적의 위치가 표시됐다. 월드컵대교 교각 중 하나에 붉은색 홀로그램 경고 표시가 떴다.
나강인은 적의 저격에 직격당했다. 드래곤 플레이트가 없었으면 크게 다칠뻔했다. 적은 첫 번째 저격수보다 먼 곳에서 쐈는데도 이번이 더 위험했다.
그래서 깨달았다.
‘내가 잡은 놈은 미끼였어.’
두 번째 저격수는 그가 첫 번째 놈을 묶는 틈을 노려 저격했다.
‘저놈은 내가 이놈을 잡으려고 움직이지 않을 때를 노리고 쐈어. 내 실력을 어느 정도는 아는 놈이야.’
왜 첫 번째 저격수가 차 이사를 모른다고 하는지도 깨달았다.
‘이놈은 아무것도 몰라. 차 이사가 고용한 건 이놈이 아니라 다리 교각의 저놈이야.’
나강인이 킬러에게 말했다.
"너 미끼였구나?"
붙잡힌 킬러도 상황을 눈치챘다. 그는 이번 의뢰를 혼자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왔다.
누군가 이 상황을 다 보고 있다가 이제야 쐈다는 뜻이다.
킬러가 욕을 내뱉었다.
"씨발. 내가 이용당할 줄이야."
교각에서 빛이 작게 반짝였다. 경고 표시가 새로 떴다.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경고했다.
-적 저격수 사격!
월드컵대교에서 저격수의 총탄이 이곳까지 날아오려면 1초쯤 걸린다.
AI 전지인이 예상 피격 지점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표시했다. 발사 직후에는 계산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날아오는 동안 정확한 착탄 예상 지점을 찾아냈다.
나강인이 옆으로 가볍게 뛰었다. 총탄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뒤쪽 땅에 박혔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볼트액션 저격소총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반자동보다 명중률이 더 높지만, 단발 재장전 방식이라 재사격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적이 다시 사격했다.
AI 전지인이 착탄 지점을 계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강인이 아니라 바로 아래에 엎어져 있는 킬러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나강인이 킬러를 걷어찼다. 킬러의 몸이 경사면을 조금 굴렀다.
저격수의 총탄은 킬러의 가슴을 노렸지만 빗나갔다. 그렇다고 완전히 빗나가지는 않아서 킬러의 다리를 꿰뚫었다.
"으아악!"
킬러가 악을 썼다.
"저 새끼가 나를 쐈어!"
"저놈이 나를 맞출 자신이 없으니까 너라도 죽이려나 보다. 꼬리를 자르려는 거지."
"개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