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89화 (389/411)

389. 레디

나강인이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에 포토샵은 물론이고 영상 처리와 CG 작업용 소프트웨어도 몇 종류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이 PC 한 대에 설치된 프로그램이 꽤 많네요?"

"다양한 상황에 두루 대응하기 위해 따로 세팅한 장비입니다. 평소엔 일반 작업용으로 쓰다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기면 그쪽으로 돌려서 깍두기처럼 쓰고 있죠."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여기 설치된 프로그램 중에 쓸 줄 아는 거 있냐?"

-있습니다. 제작 거점의 장비 설계용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동일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3D 이미지 제작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그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드래곤 윙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CG 모델을 만들자."

-설계도의 어느 단계까지 디테일하게 구현할까요?

"눈에 잘 보이는 부분은 살리고, 아닌 건 다 생략해."

-외형 위주로 작업하겠습니다.

"외형이 좀 심플하게 변해도 되니까, 드라마용 작업 시간 단축을 목표로 최적화해."

-중요 구조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폴리곤 숫자를 줄이겠습니다. 설정이 끝났습니다. 손의 임시 제어권을 주십시오.

"가져가."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모니터 속에 선이 쓱쓱 그어졌다.

드라마 ‘바보의 사랑’의 CG를 맡은 팀은 나강인이 기본적인 형태만 잡아줄 줄 알았다.

"와. 속도 좀 봐."

"손이 보이지도 않아."

그런데 모니터 속에 선이 아니라 면이 빠르게 쌓였다. 그 면이 모여 입체로 변하더니 굴곡이 생겼다.

"뭘 만드는 거지?"

"어? 저거 혹시 날개…."

"날개의 한쪽 끝? 왜 끝부분부터…."

모니터 속에서 날개의 끝부분이 먼저 만들어졌다. 그 날개 끝부분에 새로운 폴리곤이 계속 달라붙었다.

날개가 점점 길어졌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왜 한쪽 끝부터 시작해서 쭉 만들지? 저러면 더 어려울 텐데?"

"근데 작업 속도가 진짜 빠르다."

"날개가 꺾이는 부분의 연결 구조도 묘사를 하는데?"

팀장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지금 누가 날개가 부서지는 동영상을 거꾸로 돌리고 있냐?"

나강인이 한참 작업한 후에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모니터 속에 드래곤 윙의 한쪽 날개가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와…. 날개 하나가 금방 뚝딱 나왔다."

"아니, 이렇게 빨리 만든 날개 CG인데 왜 디테일이 좋지?"

"날개가 꺾이는 부분은 진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나강인이 모니터 속 날개에 부품을 추가로 붙였다. 인공 근육도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엔진을 달았다.

드래곤 윙의 엔진은 오메가테크에서 개발했기 때문에 AI 전지인은 설계도가 없다. 그건 그냥 외형만 대충 비슷하게 만들었다.

팀원들이 놀란 눈으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최진욱 피디가 CG 제작 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강인 씨가 금방 그리는데도 결과물이 참 멋있네요. 그렇죠?"

사장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그, 그렇죠."

"그런데 사장님. 왜 표정이 그러십니까? 뭔가 잘못됐습니까?"

"우리는 기초 모델링만 부탁한 건데…."

"그렇죠. 저도 그렇게 부탁하고 모셔왔습니다."

"날개가 완성됐는데요?"

"그러니까 기초 모델링으로 날개를…."

"아니요. 디테일한 부분까지 표현된 날개가 완성됐습니다."

"네?"

"저기서 표면에 텍스처만 입히면 드라마에 그대로 쓸 수 있단 말입니다."

"네?"

컴퓨터 작업이 실물 작업보다 좋은 점은 복사와 붙여넣기가 된다는 것이다.

AI 전지인이 한쪽 날개를 복사해 방향만 바꾸고 반대쪽에 붙여넣었다. 이제 양쪽 날개가 다 생겼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날개 생성이 끝났습니다.

"이거 움직이는 거지?"

-물론입니다.

AI 전지인이 날개를 구성하는 블록들의 위치를 바꿔보았다. 펼쳐져 있던 날개가 반쯤 접힌 형태로 변했다.

-방향을 틀거나 접을 수 있도록 날개 각 부분의 연결 구조도 구현했습니다.

"잘 나왔네."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AI 전지인이 이제 날개를 사람의 몸에 고정하는 부분을 작업했다.

안쪽 부분은 몸에 가려져서 어차피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은 모두 생략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간단한 구조로 만들었더니 작업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물었다.

-색도 칠할까요?

"하는 김에 칠해."

AI 전지인이 3D 이미지에 색을 입혔다. 날개에 금속 광택이 반짝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실제로는 저렇게 반짝이진 않잖아."

-하는 김에 광을 좀 내봤습니다.

"잘했다."

AI 전지인이 손의 제어권을 돌려주며 말했다.

-실제 설계도를 바탕으로 드래곤 윙의 드라마 CG 작업용 최적화 모델링을 마쳤습니다. 제가 했지만 참 잘 나왔습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쓸 수 있겠지요?"

모니터를 보는 팀원 중에는 흥분한 사람도 있고 혼란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와…."

"대박."

팀장이 시계를 보았다.

"이 작업이 왜…. 한 시간 만에 되죠? 이건 불가능한데?"

"폴리곤을 최소한으로 써서 만들었거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은…. 디테일은 또 왜 이렇게 좋습니까? 어떻게 드래곤 윙의 사진을 참고하지도 않고 이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잘 만드십니까?"

나강인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드래곤 윙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외우고 있습니다."

-제 초기 메모리에 설계도가 있습니다.

팀장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불가능한데…."

"되는 거 보셨잖습니까?"

"봤죠. 봤는데요."

팀장은 이미 마포 사건과 한강 공중전 사건의 영상을 보고 드래곤 윙을 분석했다. 어떤 형태로 모델링을 해야 할지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팀원들과 분석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날개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팀장이 마우스로 모니터 속 날개를 확대해보았다. 확대했는데도 보기가 좋았다.

"세상에. 폴리곤을 이것밖에 안 썼는데도 이런 디테일을 내려면 기획 단계부터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걸 어떻게 겨우 한 시간 만에…."

옆에서 팀원이 말했다.

"제가 하면 일주일 치 업무량일 겁니다."

"작업 시간이 문제가 아니지. 이 디테일을 봐. 확대해도 자연스럽고, 날개를 움직여도 구멍 나는 곳이나 겹치는 곳이 없어."

"이러면 CG 작업할 때는 이걸 그냥 이리저리 방향만 바꿔서 붙이면 되겠는데요?"

"방향 바꿀 때 디테일한 부분의 움직임까지 다 적용해도 돼."

"와…. 진짜 다 만들었네요."

최진욱은 CG를 드라마에 적용할 줄은 알아도 만들 줄은 모른다. 그가 팀장에게 물었다.

"그렇게 잘 나온 겁니까? 이거 저희 드라마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한 건데…."

"다른 장면에도 쓰셔도 되겠는데요? 이렇게 만들어주면 배우의 몸에 CG로 합성하기가 정말 쉽거든요."

"그래요? 우리 도 작가가 좋아하겠네요."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CG 제작사 사장이 갑자기 나강인에게 말했다.

"감독님! 우리 회사로 오시죠!"

나강인이 거절했다.

"제가 바빠서."

"이사 자리를 보장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사장 자리를…."

"진심이십니까?"

"어…. 아니요. 그건 안 되죠."

아무 말이나 뱉던 사장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긴. 이런 실력이 있으시면 직접 회사를 만드셔도 되죠. 아! 그럼 우리 회사와 감독님이 만드는 회사가 협업하면 되겠군요!"

"이 CG는 드라마 때문에 잠깐 도와드린 겁니다. 본업이 아닙니다."

사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 좋은 능력을 가진 분이 이쪽이 본업이 아니라니요? 도대체 왜…."

***

그들은 작업을 마치고 CG 제작 회사를 나왔다.

나강인의 오늘 촬영 스케줄은 이미 끝났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헤어져 촬영장에는 최진욱 피디만 돌아왔다.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간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주희가 최진욱에게 물었다.

"최 피디. 밥은 먹고 다니냐?"

"밥 먹을 시간이 없었어."

도주희가 햄버거 세트를 내밀었다.

"옜다. 오다가 주웠다."

"땡큐."

최진욱이 햄버거를 먹으면서 CG 업체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강인 씨가 그림을 잘 그리고 CG 모델링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실제 전문가들하고 같이 일해보니까 말이야."

도주희 작가가 물었다.

"전문가보다는 못해?"

"전문가가 못해."

"응?"

"그 회사 사람들이 강인 씨를 CG의 신으로 대하더라."

"그 정도였어?"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어. 강인 씨가 하얀 옷을 입고 갔으면 CG 제작팀은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걸?"

"에이. 설마."

"분위기는 진짜 그랬다니까? 그 자리에서 날개 모델링을 쓱쓱 하는데,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어. 게다가 디테일이 워낙 좋아서, 우리 드라마에 CG 작업할 때 시간을 엄청 단축할 수 있다더라."

도주희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더 많은 CG?"

"그래. 드래곤 윙은 마지막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넣어도 된다더라."

"그러면 당장 시나리오 수정 들어가야지!"

"자연스럽게 수정할 수 있어?"

"당연하지. 진짜 넣고 싶었는데 제작비랑 제작 기간 때문에 못 넣은 거 많아."

최진욱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중에 하나는 월드컵대교를 배경으로 넣을까?"

도주희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거지! 역시 최 피디!"

최진욱이 그녀의 손을 마주쳤다.

"나밖에 없지?"

"그건 아니고."

***

김유찬이 대본과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신은하가 물었다.

"뭐 해요?"

"내일 촬영할 옥상 전투 동선 확인."

"옥상 액션은 강인 오빠가 대신 연기할 텐데 동선을 왜 봐요?"

"액션은 강인 씨가 하지만 대사는 내가 치잖아.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아야 대사를 실감 나게 칠 수 있어."

"그 동선은 강인 오빠가 액션 촬영을 할 때 결정하잖아요."

"그동안은 그렇게 했지. 그런데 내일은 달라."

"왜요?"

"섭외한 전투 헬기가 내일 낮에 오는 거 알지?"

"당연하죠. 최 피디님이 얼마나 자랑했는데요."

"그 헬기가 우리 스케줄에 맞춰서 오는 게 아니야. 그 헬기의 스케줄에 우리가 맞추어야 해."

"어…."

"우리도 내일 다른 촬영 스케줄이 있잖아. 최 피디님이 스케줄 표를 맞춰 봤더니, 나는 헬기가 오기 전에 먼저 찍어야 한 대."

"아아. 이번에는 액션보다 먼저 대사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

"그렇지."

"근데 강인 오빠는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동선을 짜잖아요. 어떻게 지금 동선을 체크해요?"

"내가 강인 씨한테 미리 동선을 짜서 알려달라고 했거든. 다른 배우들한테는 동선을 비공개로 하는 조건으로. 그래야 실감이 나니까."

"그런다고 해줘요?"

김유찬이 씩 웃었다.

"우리 친하잖아. 흐흐."

"쳇. 내일 실제 촬영에서 강인 오빠가 동선 확 바꿔버리면 어쩌려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냐."

김유찬이 대본을 흔들었다.

"내일 촬영이 우리 드라마에서 진짜 중요한 장면이잖아. 내가 내일 배우가 빛난다는 말이 뭔지 보여줄게. 기대해라. 흐흐흐."

***

이튿날.

촬영 현장은 바쁘게 움직였다.

촬영이 진행되는 상가 건물은 경기도 한적한 땅에 있었다. 그 건물에는 지역 대형 슈퍼마켓이 입점해 있었다.

최진욱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이 상가는 오늘이 정기 휴일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오늘 다 못 찍으면 우리는 망한다는 거죠. 우리 드라마 최종화까지 여기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좀 나오는데, 그걸 오늘 다 찍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촬영 일정은 꽉 짜여 있었다.

"특히 오늘 찍는 옥상 전투는 진짜 멋있게 나올 겁니다. 요즘 우리 드라마 시청률 좋잖아요? 이걸로 시청률 더 높여봅시다!"

질문이 나왔다.

"피디님. 군대에서 지원해준 코브라 헬기는 언제 오나요?"

최진욱이 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간쯤 뒤에 올 겁니다. 그 전에 우리가 찍을 것들을 먼저 찍읍시다. 코브라 헬기는 잠깐 와서 잠깐 찍고 바로 갈 거니까 촬영 준비 철저히 하고요."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은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도 출연한다.

그녀는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오면 시청자의 반응이 워낙 좋았다.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는 그녀에게 더 잦은 출연을 부탁했다.

그녀는 예전과 달리 활동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 비밀수술을 들키지 않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이 드라마에 자주 출연했다.

알레이나가 다른 배우들의 촬영을 구경하며 나강인에게 말했다.

"앤서니가 차기작은 너랑 꼭 같이 만들고 싶대."

앤서니 피트는 할리우드 영화감독이다. 나강인은 ‘메트로폴리스 헌터’ 한국 촬영 때 만났다.

"바빠서 할리우드에 못 간다고 전해라."

"앤서니가 액션은 한국에 와서 찍을 수도 있다던데? 그럼 도와줄 거야?"

"그 촬영팀이 내 스케줄에 맞출 수 있으면 생각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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