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금선탈각 II
박순기가 감탄했다.
"이야아. 잘하시는 게 많은 건 알았지만, 이러다 탐정도 하실…."
"할 리가요."
"근데 듣고 보니까 진짜 앞뒤가 딱딱 맞는데요? 외국으로 당장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 왜 국내에 남아서 계속 사건을 저지르나 했더니."
나강인이 이유를 설명했다.
"나를 죽인 후에 차 사장님에게 다 덮어씌우면 모든 게 해결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죠. 범인이 자살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죠. 다른 수사는 하겠지만, 그 수사 대상은 죽어버린 범인이 아니라 주변 놈들일 테니까요."
"차 이사는 그 계획이 성공하면, 다음에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백 이사이나 마 부장이라고 이름을 바꿔 활동하려고 했을 겁니다."
"어? 잠깐만요. 그러면 얼굴은요?"
"얼굴이야 성형수술로 고치면 되니까. 지금 저 얼굴이 이미 고친 것일 수도 있고요."
차 이사가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나강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강인. 역시 너는 죽어야 해. 네가 살아있으면 다음에도 또 문제가 될 것 같았거든."
나강인이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신분을 바꿔서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면 내가 또 막겠지. 그러니까 신분을 버리기 직전인 지금이 나를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그럼 차동석 사장님이 다 뒤집어쓰고 갈 테니까."
나강인은 말을 하면서 아주 조금씩 전진했다. 이제 지하실을 절반쯤 이동했다. 차 이사와 그만큼 가까워졌다.
차 이사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박순기가 유일한 출구인 계단을 막은 채로 말했다.
"차 이사. 포기하고 항복해라. 너는 이제 끝났어. 네가 꾸민 계획은 이미 다 들통났다. 우리가 다 안단 말이다."
차 이사가 낮게 웃었다.
"흐흐흐. 정말로 다 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지. 설사 놓친 게 있어도 우리 요원님이 알아내시겠지."
"그래. 나강인이 살아있으면 그렇게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왜 나강인을 지하실로 끌어들였을까?"
그 말을 듣자마자 박순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재빨리 지하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설마 함정?"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고 하지."
"이 지하실에는 다른 탈출구가 없을 텐데?"
"너희를 죽인 후에 그 계단으로 걸어서 나가면 돼."
나강인이 차 이사 쪽으로 조금 더 움직였다.
차 이사가 왼손을 들었다. 버튼이 달린 무선 기폭장치가 있었다.
"거기까지. 그쯤에서 멈춰라. 거기서 더 다가오면 다 죽는다."
박순기는 기폭장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헉! 포, 폭탄!"
차 이사가 나강인을 보며 실실 웃었다.
"나강인. 조종사가 살아있는 걸 보고 눈치챘다고 했지? 저놈에게조차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네 말은,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죽으면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는 소리구나."
나강인이 히죽 웃었다.
"왜? 그래서 폭탄이라도 터트리게?"
차 이사가 다시 일그러지는 얼굴을 억지로 폈다.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되나? 여기서 폭탄이 터지면 너희 셋은 죽는다. 사망자 중에는 차 이사도 있겠지. 차동석 말이야. 그럼 모든 건 계획대로…."
"퍽이나 그러겠다."
차 이사의 표정이 굳었다.
"나강인. 왜 이렇게 여유가 있지?"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이곳에서 찾아낸 부비트랩은 세 개입니다.
어떤 타입의 부비트랩인지도 분석이 끝났다.
나강인이 말했다.
"너는 계획을 꼼꼼히 세우는 놈이잖아. 그럼 여기서 폭탄이 터지게 할 리 없지. 차 사장님의 얼굴이 멀쩡해야 대역으로 쓸 수 있으니까."
"상황이 나쁘면 터트릴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앞을 막지 말고 벽에 붙어 있어라."
"지랄하고 있네. 여기서 폭탄이 터지면 너도 폭발에 휘말려 같이 죽잖아. 넌 그럴 놈이 아니지."
나강인이 파악한 차 이사는 절대로 같이 죽을 놈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할 놈이다.
"차 이사. 그러니까 네가 여기에 설치한 부비트랩은 폭탄이 아니라 화살이나 볼트, 아니면 쇠구슬을 쏘는 타입이라는 소리인데."
AI 전지인의 분석도 같았다. 그런 장치를 세 개 찾아냈다. 각각의 부비트랩의 살상영역이 홀로그램으로 표시됐다.
-요원님은 현재 살상영역에 서 계십니다. 벽에 다가가면 더 위험합니다.
나강인이 차 이사의 왼손을 보며 씩 웃었다.
"기폭장치가 무선이네? 그거 안 터져."
"무슨…."
"지금 이 지하실은 전파 교란 상태거든."
차 이사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뭐?"
"벽으로 비키라고 했지? 왜? 내가 폭탄이 무서워서 저쪽 벽에 붙었으면 좋겠어? 총알도 피하니까 화살도 피할까 봐, 아예 벽에 붙게 한 후에 쏘려고?"
나강인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살상영역 한복판이다. 그런데 여기보다 더 위험한 장소는 부비트랩의 바로 앞이다.
"뒤통수에 대고 쏘면 방패로 막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니까 딱 좋겠지? 확실히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차 이사가 이를 갈았다.
"네놈. 이미 알고 있었나?"
"부비트랩을 숨겨두는 솜씨가 어찌나 어설픈지 그냥 보이더라."
"이 새끼가!"
차 이사가 무선기폭장치의 버튼을 꽉 눌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 이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거냐!"
나강인이 휴대폰 크기의 금속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너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뭔데!"
"뭐겠냐?"
차 이사의 왼손에는 무선기폭장치가 있다. 그런데 그게 먹통이 됐다.
"설마 전파교란장치?"
"당연하잖아?"
"하지만 겨우 그 크기로…."
"집 한 채 정도 공간을 교란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집에서는 이제 무선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차 이사의 눈이 번뜩였다.
"어디서 구했지?"
"왜? 이 기술도 팔아먹고 싶냐?"
"휴대용 초소형 전파교란장치. 크기는 작지만 모든 대역을 교란할 수 있다? 아무리 적용 범위가 좁다 해도 수요는 있겠지. 특수부대의 침투용 장비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으니까 그 기술은 돈이 되겠어."
"너 따위한테 팔려고 만든 거 아니다."
"설마…. 네가 만들었나?"
"당연하지. 이런 거 파는 데가 어디 있다고."
AI 전지인이 말했다.
-개조는 제가 했습니다.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는 전쟁터에 굴러다니는 오래된 폐품에서 부품을 뜯어내고 조합해 교란장치를 만드는 제작법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2082년 기준으로는 오래된 폐품이, 지금 시대에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나강인은 그나마 비슷한 장비를 몇 개 사서 부품을 조합하고 개조했다.
그 작업이 한 번에 성공한 건 아니다. 몇 번이나 실패했다. 장비 구매에 쓴 예산도 그때마다 날려 먹었다.
그러다 제대로 작동하는 물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처음 만든 교란장치는 휴대용으로 쓰기엔 크기가 컸다.
그건 차에 설치했다.
지금 나강인이 보여준 건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 만든 휴대용 전대역 전파교란장치다.
차 이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나강인이 드래곤 윙의 파일럿이라는 걸 안다.
그는 드래곤 윙은 국방과학연구소나 방산기업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나강인은 테스트 파일럿인 줄 알았다.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도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데 드래곤 윙을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차 이사는 드래곤 플레이트도 생각났다. 그건 철인기공에서 생산한다. 차 이사는 쫓기기 전에 그 기술도 빼내려고 준비했었다.
그는 그 드래곤 플레이트를 배우인 신은하와 김유찬이 가지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나강인은 그들과 일하는 무술감독이다.
차 이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드래곤 윙과 플레이트도 네가…."
"왜? 신기하냐?"
차 이사가 소리를 질렀다.
"너 도대체 뭐냐! 정체가 뭐냐고!"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지구연합 전략특수군 요원입니다.
"그거 하나만 알잖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 그 중요한 임무가 어쩌면 차 이사를 막는 거겠지."
나강인이 차 이사에게 말했다.
"포기해. 시간을 끌어봤자 어차피 잡혀. 이곳은 경찰과 군대가 포위하면 넌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거야."
차 이사가 기폭장치를 몇 번 더 눌렀다. 효과가 없었다. 그가 기폭장치를 나강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제기랄!"
나강인이 날아가는 기폭장치를 손으로 탁 잡았다.
"넌 사람이든 물건이든 필요 없다 싶으면 아무 데나 버리는구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요원님도 아까 권총을 공중에서 버리셨습니다만?
"하긴. 이건 이제 필요 없긴 하지."
나강인이 기폭장치를 뒤로 휙 던졌다. 박순기가 얼른 그걸 받았다.
차 이사가 차동석의 뒤통수에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경찰이 온다고? 그러면 오기 전에 여길 나가야겠어. 당장 비켜!"
"비키겠냐?"
"안 비키면 차동석을 죽여버리겠다! 난 어차피 잡히면 끝장이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차동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기, 가, 강인 씨. 나 좀 살려주면 안 될까?"
나강인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차 사장님을 죽게 놔둘 순 없으니까, 어쩔 수가 없네."
차 이사가 차동석을 겨눈 채로 천천히 전진했다.
박순기가 먼저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나강인이 그 뒤를 따라 뒷걸음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방패가 있어서 좁은 계단에 있어도 권총탄을 막을 수 있다.
나강인이 거실로 나갔다. 박순기가 먼저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사범님.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더 물러납시다. 차동석 사장님이 나올 공간이 있어야 하니까."
두 사람은 뒤로 좀 더 물러났다.
차 이사가 차동석을 앞세우고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는 나강인과 박순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 이사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저 방으로 들어가! 내가 여기서 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마! 쫓아오면 차동석은 죽는다!"
나강인이 말했다.
"야. 그런데 말이야."
"또 뭐냐!"
나강인이 휴대폰 크기의 전파 교란장치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야. 내가 만들긴 했는데 문제가 있어. 휴대용이라서 크기가 작잖아? 그래서 적용 범위만 좁은 게 아니라, 유지 시간도 되게 짧다?"
"뭐?"
"전파 교란 끝났다고."
차 이사의 눈이 박순기가 가지고 있는 기폭장치를 향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어차피 지하실에서 나왔는데!"
"그리고 말이야. 부비트랩은 너만 만들 줄 아는 게 아니야. 그거 원래 내 전문이야."
그가 차 이사에게 말을 시킨 건, 권총을 쥔 손이 부비트랩이 조준하고 있는 위치로 갈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상대를 흥분시키고 대화하다 보면 손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차 이사의 시선은 지금 박순기가 들고 있는 기폭장치를 향하고 있었다. 옆쪽에 뭐가 있는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AI 전지인이 재빨리 말했다.
-쏘십쇼!
나강인이 바닥에 놔둔 리모컨의 버튼을 발로 슬쩍 밟았다.
지하실 출구 옆쪽에 숨겨둔 장난감 금속 대포의 포신에는 포탄 대신에 쇠구슬이 들어있었다.
포신 내부에 넣어둔 화약이 폭발했다.
권총탄에서 빼낸 화약은 워낙 소량이라 장난감 금속 대포가 폭발하진 않았다. 대신에 총신에 들어있던 쇠구슬이 빠른 속도로 발사됐다.
쇠구슬이 날아가는 속도는 평범한 인간이 손가락을 당기는 속도보다 빨랐다.
차 이사의 오른손이 그 쇠구슬에 맞아 옆으로 휙 젖혀졌다.
"끄악!"
차 이사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탄은 벽으로 날아가 꽂혔다.
나강인이 그 틈에 앞으로 휙 다가가 차동석을 뒤로 잡아당겼다. 차동석이 뒤쪽 소파로 날아갔다.
"으악!"
박순기가 즉시 차동석의 앞으로 이동해 방패를 세웠다.
나강인이 차 이사를 보며 씩 웃었다.
"이제 인질이 없네?"
차 이사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나강인이 차동석을 빼낼 때 옆으로 피하며 사격 자세를 잡았다.
차 이사가 나강인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뒤쪽에는 박순기와 차동석이 있다. 박순기의 방패는 두 사람의 몸을 다 가리지는 못한다.
나강인은 피하지 않고 방패로 권총탄을 막았다.
드래곤 플레이트 기술로 만든 방어구는 첫 탄은 완벽히 막지만 두 번째 공격부터는 충격 감소 효과가 떨어진다. 그렇게 몇 번 막으면 방어력이 사라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나강인이 총탄을 막으며 차 이사를 향해 성큼 걸었다.
이 단독주택의 거실은 넓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농구장만 한 건 아니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나강인이 방패를 휙 들었다. 방패의 끝이 차 이사의 손을 노렸다.
차 이사가 급히 손을 위로 들어 그 공격을 피했다. 뒤늦게 발사된 총탄이 천장에 꽂혔다.
차 이사는 오른손으로 사격하며 왼손으로는 단검을 뽑았다. 그가 바짝 접근한 나강인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위로 치켜든 권총을 다시 내려 나강인을 조준하려 했다.
나강인이 단검은 몸을 쓱 기울여 피하면서 차 이사의 오른손을 툭 쳤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옆으로 날아갔다.
차 이사가 오른손의 고통을 참으며 나강인을 향해 단검을 다시 내질렀다.
나강인이 차 이사의 단검을 중간에 탁 잡아챘다. 단검이 순식간에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강인이 칼을 빼앗자마자 차 이사를 걷어찼다. 차 이사가 벽에 처박혔다.
"크악!"
나강인이 단검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차 이사를 내려다보았다.
"왜 너를 막아야 할까?"
"쿨럭.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그동안 팔아먹은 기술 중에 지구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게 있냐?"
"난 핵무기 기술은 팔지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저지를 예정인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