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김유찬
드라마 바보의 사랑 촬영 현장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였다.
2주간의 결방 선언으로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드라마의 제작 일정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최진욱이 물었다.
"자. 여러분 그동안 푹 쉬셨습니까?"
잘 쉰 사람도 있지만, 며칠로는 부족한 사람도 많았다.
젊은 스태프가 팔을 들어 보였다.
"저 아직 붕대 감고 있는데요."
최진욱이 옷을 위로 걷었다.
"난 허리에 감고 있다. 그리고 난 어제 딱 하루 쉬었어."
아직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상처를 보여주려던 사람이 그 대화를 듣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촬영팀 중에는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평소보다 적었다. 현장에 나온 사람들도 완치된 건 아니라서 전처럼 무리하게 강행군할 수는 없었다.
배우들은 촬영팀보다 상황이 나았다. 당시 옥상에 있던 배우는 김유찬과 적 역할을 맡은 몇 명뿐이었다.
다른 배우들은 그때 지상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쳤다고 해봐야 조금 긁히거나 튀어나온 파편에 맞아 멍든 정도였다. 급히 도망치다가 넘어져 다친 배우가 그나마 많이 다친 경우였다.
그런데 배우 쪽에서는 제일 중요한 사람이 빠졌다. 오늘은 김유찬이 없다.
최진욱이 말했다.
"다른 팀에서 오신 분들도 당분간만 부탁 좀 드립니다."
부족한 촬영팀 스태프는 보도국에서 빌려왔다. 베테랑이 아니라 신입이 보조 인력으로 왔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늘은 액션 촬영도 예정되어 있다.
이 드라마의 액션은 김유찬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액션에 김유찬이 등장하는 건 아니다.
신은하, 남현주, 오세나가 싸우는 장면도 제법 있었다. 세 사람은 적과도 싸우고 자기들끼리도 싸웠다.
특히 김유찬의 동생 역할로 출연한 고등학생 이연지는 벽을 차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싸웠다.
오늘 촬영 스케줄에는 신은하와 이연지의 액션이 있었다.
나강인은 다른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그곳에 도착했다.
그가 촬영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유찬 씨가 없네?"
나강인은 코브라 헬기 습격 사건 이후로 김유찬을 보지 못했다. 사건 직후에는 차 이사를 잡고 김석명도 잡느라 바빠서 누굴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연지가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유찬 오빠는 미국 갔어요."
"미국?"
"네. 그래서 촬영은 며칠 뒤에나 합류한대요."
"무슨 일로 갔는데?"
"몰라요. 유찬 오빠한테 급한 일이 있겠죠."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잠깐. 연지야? 이거 지금 뭐지?"
"넹?"
"왜 유찬 씨는 오빠이고 나는 아저씨인데?"
이연지가 멈칫했다.
"에…. 우리가 드라마에서 오빠 동생 관계니까?"
"해명이 부족한데? 너도 얼굴파냐?"
"앗! 연습하러 가야겠다!"
이연지가 도망쳤다.
신은하가 다가오며 물었다.
"쟤 왜 저래?"
"연지가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특별대우를 하네?"
"유찬 오빠?"
"어."
신은하가 나강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유찬 오빠가 강인 오빠한테도 아무 말 안 하고 갔어?"
"어. 무슨 일이 있나?"
"글쎄? 설마 이 상황에 미국으로 놀러 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냐."
"그냥 해본 소리야. 유찬 오빠가 얼굴만 잘생기긴 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니까."
***
김유찬은 미국에 있었다. 그는 누나인 김민정과 병원 앞을 산책했다.
김민정이 물었다.
"그 나쁜 놈은 왜 헬기까지 몰고 와서 너한테 그런 거래? 어떻게 그런 무서운 무기를 사람한테 쏘니? 나중에 그 이야기 듣고 나 진짜 놀랐잖아."
그녀는 그 소식을 실시간으로 들은 건 아니다. 그녀에게 그 사건을 알려준 사람은 김유찬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부터 먼저 알려주었다. 그래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 영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곁눈질로 왔어."
김유찬은 범인의 진짜 목표가 나강인이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건 드라마 촬영팀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사람 잘못 보고 그랬겠지. 일부러 나를 노리고 그런 건 아니야."
"진짜야?"
"당연하지. 그러니까 드래곤 윙이 나타났을 때 헬기가 바로 방향을 바꿨지."
김민정이 걱정했다.
"너 무슨 위험한 일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김유찬이 위험한 일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해적단이 유람선을 습격했을 때는 총알이 날아다녔고, 보라를 납치한 놈들을 잡을 때는 내가 제일 먼저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고, 청평에서 싸울 때는 화살이….’
생각해보니 올해에는 위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
"에이. 누나. 나 배우야. 배우. 내가 무슨 비밀요원이야? 위험한 일을 왜 하겠어?"
"그런 애가 영상에서는 왜 그랬어? 난 너도 히어로인 줄 알았어."
"누나도 알잖아. 히어로가 내 로망인 거."
"알지. 그런 건 취미로만 해. 네가 직접 싸우지는 마. 위험해."
"알았다니까. 오래간만에 보면서 왜 또 잔소리야?"
김민정이 웃었다.
"네 영상이 미국에서도 유명해서 사람들이 나한테 연락 많이 했어. 너 소개해달라는 여자도 많아."
"나 소개해달라는 여자는 원래 많아. 내가 너무너무 잘생겨서 그래."
"내 동생이 잘생기긴 했지."
"나 얼굴값 하니까 포기하라고 해."
"너 그런 소리 하면 남들이 재수 없다고 안 해?"
"해."
김유찬이 밀고 있던 휠체어의 방향을 병실 건물 쪽으로 돌렸다.
"들어가자. 바람 많이 쐬면 안 좋잖아."
"괜찮아. 내 병은 무리만 안 하면 돼. 바람은 좀 맞아도 괜찮아."
"그래도…."
그런데 너 드라마 촬영 도중에 이렇게 와도 돼?"
"그 사건 때문에 촬영은 당분간 휴업 상태야. 지금도 휴가 기간이야. 괜찮아."
"그렇구나."
그는 김민정과 산책한 후에 병실로 돌아왔다.
김민정은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서 돌아다녔는데도 체력이 바닥나 금방 잠에 빠졌다.
김유찬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병실을 나왔다.
그는 김민정을 담당하는 의사를 만났다.
닥터 제이콥 마틴이 김민정의 상태를 설명했다.
김유찬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상태가 전화로 알려드렸을 때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다시 발작이 일어나면…. 어렵습니다."
김유찬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나한테 시간이 얼마나, 얼마나 남았습니까?"
"길어야 한 달…. 빠르면 열흘…."
김유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젠장. 이건 아닙니다. 닥터 마틴. 이건 아니라고요. 우리 누나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나를 키웠는데. 이제 다 좋아졌는데, 이제 행복해졌는데…."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김유찬이 제이콥을 쳐다보며 물었다.
"방법이 진짜 없습니까? 예? 진짜 없냐고요. 닥터 제이콥은 이 저주받은 병의 권위자잖아요. 돈이든 뭐든 말만 해봐요. 나 돈도 많고 유명해요. 아는 사람도 많아요."
제이콥 마틴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음…. 그게 말입니다."
김유찬은 배우라서 남의 표정을 잘 본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뭔가 있군요? 있지요? 그렇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남에게 하면 안 됩니다."
"누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지요?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알레이나 민을 아시죠?"
김유찬은 왜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압니다만?"
"알레이나가 한동안 아무 일도 안 하다가 최근에 활동을 재개했더군요. 며칠 전에 한국에서 벌어진 공중전 뉴스를 보다가 알았습니다."
"그것도 압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드라마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알레이나는 단역이지만 인사는 나눈 사이입니다. 그런데 알레이나는 왜…."
"알레이나는, 민정과 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아. 경증인가요? 그것조차도 부럽네요."
김유찬은 이 병의 경증과 중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안다. 경증 환자는 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대답이 그의 예상과 달랐다.
"중증입니다."
"예? 그럴 리가요. 그러면 영화 촬영이나 공연 같은 활동은 위험할 텐데…."
"그래서 알레이나는 지난 몇 달간 활동을 중지하고 외부와의 연락도 끊은 채로 지냈지요. 사실 알레이나의 상태는…. 이건 진짜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김유찬이 침을 꼴깍 삼켰다.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알레이나의 상태는 길어도 일 년을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활동을 재개하면 당장 죽을 수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 드라마에…."
"처음에는 저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제이콥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알레이나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거나 공연을 했다면 이해하겠습니다. 화려하게 불태우다 무대 위에서 죽으려나 보다 생각했겠죠."
"지금 우리 드라마에 출연 중입니다만?"
"맞습니다. 갑자기 한국 드라마에 출연하더니, 한국 방송에 종종 나왔더군요. 마지막을 불태우는 장소로 보기엔, 한국은 원래 활동하던 곳에서 너무 먼 장소잖습니까?"
김유찬은 알레이나가 그동안 보여준 모습을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걱정 없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조심하지도 않았다. 뛰어다니기도 했다.
"혹시…."
"혹시 그 병이 치료된 게 아닐까 싶어서, 그 병을 같이 연구하던 로버트 민에게 물어봤습니다. 로버트가 알레이나의 아버지입니다. 그 친구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를 수가 없지요."
김유찬이 희망을 품고 물었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드디어 치료법을 찾은 건가요?"
"그걸 말을 안 해줍니다."
"예?"
제이콥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몇 번을 물어봤는데, 미안하다면서 끊더군요. 이젠 제 전화를 피합니다."
김유찬은 긍정적인 미래만 보고 싶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군요! 그러니까, 뭔진 몰라도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치료법이나, 생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요!"
"알레이나가 계속 한국에 있는 걸 보면, 한국에서 뭔가 방법을 찾은 것 같긴 합니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숨겨야만 하는 이유요?"
제이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법 약물을 썼다든지, 아니면 불법 장기…. 으음. 그건 너무 나갔군요. 그럴 사람들은 아닌데. 아니, 그래도 자기 딸의 일이니까 혹시 장기를…."
김유찬이 벌떡 일어났다.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하고 싶습니다!"
"제가 연락해봤자 피하기만 하니 저는 이유를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김유찬 씨가 한국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레이나에게 말입니까?"
"아니요. 로버트가 숨기는 일을 알레이나가 대답해줄 리 없습니다."
"그럼 한국에 가서 뭘…."
"만약 알레이나의 상태를 호전시킬 방법을 찾았다면, 이정호의 딸에게도 같은 방법을 시도했을 겁니다. 그 친구도 이 병을 같이 연구했으니까요."
"한국에도 중증 환자가 있습니까?"
"원래는 그 환자의 데이터를 외부인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데…."
제이콥은 그렇게 말하면서 환자의 정보가 들어있는 파일을 열었다.
"김유찬 씨에게는 보여주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만 치료법을 숨기나 싶어서 빈정이 좀 상했거든요."
"아…."
"물론 그게 다는 아닙니다. 불법적인 수단을 쓴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고,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이콥이 병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도 민정을 꼭 살리고 싶거든요. 제가 도움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김유찬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제이콥이 모니터를 김유찬이 볼 수 있게 돌렸다.
"이 환자의 정보는 외부인에게는 비밀이니까, 난 보여준 적이 없는 겁니다. 보고 외우시죠."
김유찬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뜬 문서를 노려보았다.
"이름은 이연지. 나이는…."
김유찬은 당황했다.
"어? 이연지?"
"왜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애랑 이름이 같아서요. 걔도 고등학생인데…."
그 자료에 사진이나 주소 같은 개인정보는 없었다. 대신에 키나 체중은 있었다.
"연지랑 비슷한 키에, 체중도…."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사진이 없어서 같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연지는 흔한 이름이다. 비슷한 키에 이연지라는 이름을 가진 고등학생이 한국에 한 명뿐일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이연지와 알레이나 민이 우리 누나와 같은 병에 걸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증상은 좀 다르지만, 셋 다 케이타이거 증후군 중증입니다."
"알레이나 민처럼 이연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지 확인하면 되는 겁니까?"
제이콥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연지는 증상이 좀 다릅니다. 발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건강해 보여서 겉으로는 구분이 안 될 겁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확인하죠?"
"간단합니다. 그 병을 치료하지 못했으면 이연지는 지금쯤은…."
"지금쯤은?"
"높은 확률로 사망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연지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살아있다면요?"
"중증 환자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괜찮아졌다면, 뭔가 방법을 찾은 거겠지요."
김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