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405화 (401/411)

405. 저주

김유찬은 톱스타다.

원래도 톱스타였는데 천만 영화의 주연을 연속으로 맡으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그는 지금 광고주들이 가장 원하는 배우다.

또한 예능 피디들이 가장 섭외하고 싶어 하는 배우이며, 영화감독과 드라마 피디들이 안 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본을 보내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공격헬기가 벌컨포를 쏘는데도 정면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외국에서도 유명해졌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네.’

김유찬이 기자회견을 준비하면 국내는 물론이고 외신까지 달려올 판이다.

이정호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유찬은 적당히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부탁했다.

"시간을 좀 주시죠.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경고도 했다.

"이 일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비밀이 누설되면 다 끝장입니다. 우리가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김유찬도 부탁했다.

"우리 누나가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빨리 좀 부탁합니다."

"내일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병원은 남들 눈이 있으니까 다른 장소에서 뵙지요."

***

김유찬은 조용한 곳에서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는 지금 뭔가 집중할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 직행했다.

최진욱 피디는 김유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유찬 씨? 미국에 며칠 있을 거라더니?"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습니다."

최진욱은 김유찬이 맛이 좀 갔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이야아. 잘됐네요. 미국에 간 일은 다 해결됐고요?"

"아니요."

"어…. 그러면…."

"죄송합니다. 조만간 또 휴가를…."

최진욱이 서둘렀다.

"당장 촬영 시작합시다.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네!"

김유찬도 오늘은 일만 하고 싶었다. 그래야 잡생각이 덜 든다.

"제가 바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오늘 이 촬영도 원래 유찬 씨 없는 부분만 먼저 찍고, 나중에 유찬 씨 오면 다시 찍으려고 했거든요. 지금 바로 들어가면 돼요."

김유찬이 촬영 현장에 복귀했다.

원래 촬영 스케줄에 김유찬이 나오는 부분만 추가된 것이라 일정 자체가 바뀌진 않았다. 배우들도 전체 촬영시간이 줄어드는 걸 반겼다.

문제는 다른 데서 생겼다.

바보의 사랑의 주인공은 바보가 아니다. 바보처럼 웃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평소에는 그렇게 웃으며 지내다가, 가면만 쓰면 기계처럼 빈틈없고 강력한 히어로가 된다.

김유찬은 그 두 개의 전혀 다른 모습을 굉장히 잘 연기했다. 싸울 때는 카리스마를 쏟아내다가 평소에는 바보처럼 웃는 모습에 여성 팬들이 열광했다.

그런데 오늘은 웃음 연기에 문제가 생겼다. 김유찬이 제대로 웃지 못했다.

최진욱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 유찬 씨. 웃는 게 그게 아닌데…. 평소처럼 해요. 평소처럼.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보여준 그 바보 웃음이 필요한데…."

김유찬의 다른 연기는 문제가 없었다. 웃는 것만 못했다.

배우들이 수군거렸다.

"연기는 역시 김유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하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닌데?

"우리 드라마 그동안 고생 많이 해서 이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여러 번의 NG가 난 후에, 최진욱은 결국 다른 배우들의 연기부터 찍기로 했다.

최진욱이 혼잣말을 했다.

"유찬 씨가 와서 시간 좀 벌었나 했더니, 결국 도로아미타불이구나."

김유찬은 촬영장 구석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강인이 김유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김유찬이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말할 수 없다. 누나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김유찬이 입을 열었다.

"우리 누나가 공부를 진짜 잘했어요. 연지가 전교 1등이잖아요? 우리 누나도 전교 1등이었어요."

"알아요. 전에 술 마시면서 자랑했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건 김유찬의 팬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때 우리 누나는 고등학생이었거든요. 난 초등학생이었고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방법이 있나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누나가 학교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해서 날 키웠어요."

그건 팬들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전교 1등이었어도 수업 안 듣고 책을 안 보면 성적은 안 나와요.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만 겨우 했어요. 나 때문에."

김유찬이 고개를 들었다.

"몇 년 뒤에는 내가 고등학생이 됐어요. 나 진짜 잘생겼잖아요. 고등학생이 잘생긴 얼굴로 돈을 벌려면 뭘 해야겠어요? 난 그래서 배우가 됐어요."

김유찬은 처음 출연한 청소년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친구 역할로 출연했다. 그때는 연기력이 보잘것없어서 대사도 거의 없었지만, 잘생긴 얼굴로 분위기만 잡는 단역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때 받은 돈으로 후르츠칵테일 통조림을 슈퍼에서 제일 큰 거로 사서 누나랑 실컷 먹었어요."

김유찬은 처음에는 연기는 못 하지만 얼굴이 주인공보다 잘생긴 단역으로 알려졌다.

곧바로 출연한 두 번째 드라마에서는 연기도 제법 하는 조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 번째로 들어간 드라마에서는 고등학생인데도 성인 연기자 못지않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네 번째로 출연한 건 영화였다. 그때부터는 김유찬의 연기력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잘생겼잖아요. 그래서 연기도 못 하는 고등학생이 출연료도 받고, CF로 돈도 벌었어요.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니까 우리 누나가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공부해서, 의대를 갔어요. 그래서 난 내 얼굴이 잘생긴 게 좋아요."

김유찬이 자랑했다.

"우리 누나는 진짜 똑똑해요. 의대를 다닐 때부터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대단해요.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의대에서도 천재 소리를 들었어요."

나강인이 말했다.

"천재 맞네요."

"지금은 미국에 있어요. 미국에서도 진짜 대단했어요. 그런데…."

김유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누나가 많이 아파요. 난 가족은 우리 누나밖에 없어요."

"음…."

김유찬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강인 씨니까 말한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다른 사람한테 우리 누나 이야기를 하면, 나도 강인 씨가 드래곤 윙의 주인이라는 거 떠들고 다닐 거니까."

***

김유찬이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바보처럼 웃어야 하는 장면만 다음에 다시 촬영하기로 했다. 웃지 않는 장면은 지금도 찍을 수 있다.

나강인이 오늘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그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정호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좀 봤으면 합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여기는 안 됩니다. 그 술집으로 오시죠. 다른 분들도 올 겁니다."

그 술집은 비밀수술에 관해 의논할 때 모였던 곳이다.

"밤에 뵙지요."

***

술집에 몇 사람이 모였다. 나강인, 이정호,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 이정호의 처남인 손성현이 만났다. 손미연과 김중석은 병원에 남았다.

알레이나 민의 아버지인 로버트 민은 미국에 있어서 모이지 못했다.

이정호가 오늘 김유찬이 찾아와 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권동진이 탄식했다.

"김유찬은 저도 참 좋아하는 배우인데…. 김유찬의 누나가 우리 딸이 걸렸던 것과 같은 병이라니. 이 과장님은 알고 있었습니까?"

이정호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 환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관계까지는 몰랐습니다. 환자가 미국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김유찬은 우리가 수술할 능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정확히는 모를 겁니다. 다만, 로버트의 이야기로는 알레이나가 건강해진 이유를 제이콥이 계속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아. 닥터 제이콥 밀러…."

"그 환자가 제이콥의 환자니까요. 그래서 김유찬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저를 찾아온 거겠지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요?"

이정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김유찬 씨는 우리가 비밀수술을 했다는 건 모릅니다. 치료법이 뭔지를 모르고, 우리 중에는 저만 노출됐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제가 다 안고 가야지요."

"최악이요?"

이정호가 나강인을 슬쩍 보았다.

"오늘 회의에서 비밀수술을 안 하기로 결정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강인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유찬 씨의 누나가 천재라던데요."

"예. 제이콥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노벨 의학상을 탈 인재라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본 중증 환자는 세 명입니다. 수연이와 연지. 알레이나. 이제 유찬 씨의 누나도 있군요. 그런데 넷 다 천재군요."

이정호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연지가 공부를 잘하지만 천재인지는…."

"연지는 아직 포텐이 터지지 않아서 좀 애매하긴 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아니라고 한 건 아닌데…."

권동진도 말했다.

"우리 수연이도 한국대 박사 과정이긴 한데 천재라고 할 정도는…."

AI 전지인이 말했다.

-권수연은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최초 개발자입니다. 2082년 기준으로도 대단한 업적입니다.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2082년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다.

"수연이는 천재 맞습니다."

권수연은 단호하게 천재라고 선언하는 걸 보고 이정호가 조금 툴툴댔다.

"우리 연지도 대학만 가면…."

"연지는 땡땡이도 잘 치고 요즘은 배우 활동까지 겸업하는데도 전교 1등이죠. 미래가 기대됩니다."

"역시 그렇죠? 아. 그런데 알레이나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알레이나는 과학이 아니라 음악과 연기의 재능이 굉장하죠.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겁니다."

"아. 하긴."

"그런데 이제 유찬 씨의 누나까지 천재군요. 역시 키메라, 아니, 케이타이거 증후군은…."

나강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인류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천재를 죽이는 저주가 아닐까 합니다."

"저주 같은 병이긴 하죠."

그 병이 저주 같다는 말은 이정호가 예전부터 했다. 일반적인 질병과 너무 동떨어진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인 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치료 자체가 불가능했던, 진짜 저주 같은 병이었으니까요."

"경증 환자들은 어떻습니까?"

"생각해보니까 치료 가능한 경증 환자 중에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꽤 있습니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있습니다. 경증 환자들은 그 재능이 아직 개화하지 않았거나, 본인의 재능을 모르는 거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그는 술집 밖으로 나왔다. 조용한 곳이라 아무도 없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비밀수술이 반복될수록 들통날 위험도 커집니다. 이번 환자는 그 위험이 특히 더 큽니다. 만약 요원님이 체포되면 임무 수행이 어려워집니다. 상대가 적이라면 제가 전투지원을….

"유찬 씨 이야기잖아."

-그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김유찬은 아군입니다.

나강인이 밤하늘을 보았다. 보름달이 떠 있었다.

"지인아. 이게 우리의 진짜 임무일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구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예정인 차 이사를 제거하는 것과, 지구의 미래를 구할 능력이 있지만 저주에 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거. 이 두 개가 우리 임무일 거야."

나강인이 처음 정신을 차린 교차로 방향을 보았다.

"우리가 왜 하필 그 동네, 그 교차로에 나타났을까? 거기가 그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장소여서야."

-그 교차로가 전략적 요충지군요.

"그리고 설사 이게 우리 임무가 아니라 해도, 사람을 살리면 좋잖아."

-요원님이 결정하십시오.

"알잖아. 어떻게 할지."

-그건 그렇습니다.

나강인이 술집으로 돌아갔다.

"이정호 과장님.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 환자가 몇 명이나 더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중증은 한 명만 생존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또 중증 환자가 생길 테고, 사망하면 줄어들겠지요."

나강인이 제안했다.

"앞으로 중증 환자는 우리가 살리죠."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혈액이나 약품을 구하려면…."

"로버트 씨가 한국에 차린 회사 덕분에 수술에 필요한 양을 확보하는 건 가능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로버트와 이야기해봐야겠지만요."

나강인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는 현재 유일한 중증 환자인 유찬 씨의 누나를 살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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