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해주
이튿날 이정호가 예약한 식당 별실에 김유찬이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리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공간인 별실에서 이정호가 물었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미행이 없는지 신경 쓰면서 왔습니다."
"만약 오늘 이 만남이 파파라치에게 찍혀서 기사로 나간다면, 제 딸의 오빠 역할인 김유찬 씨에게 제가 밥을 사는 자리였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정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김유찬 씨가 너무 유명해서 이런 것까지 조심해야 하는군요."
김유찬은 조금 억울했다.
"알레이나도 유명한데…."
"알레이나에게는 예전에는 파파라치나 기자가 붙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기삿거리가 될만한 활동을 안 했으니까요."
"아. 우리나라에 와서 한동안 그렇게 지냈었지요."
"그런데 김유찬 씨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핫한 연예인이잖습니까?"
김유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실 일은 아니지요.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아셔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답을 해주세요."
김유찬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누나를 살릴 수 있나요?"
이정호가 김유찬을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그 병은 수술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김유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치료법이 있었군요!"
"쉿."
여기는 식당의 별실이라 독립된 공간이다. 하지만 너무 크게 목소리를 내면 다른 방에 조금은 들린다.
김유찬이 얼른 자기 입을 막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정호가 목소리를 낮추고 상황을 설명했다.
"수술은 당연히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같이 하는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특히 닥터 노네임은 대체 불가능한 능력자입니다."
김유찬이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닥터 노네임이란 분이 수술법을 찾아낸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분 덕분에 수술로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닥터 노네임을 만나 뵙고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당연히 만나시면 안 됩니다. 누구인지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닥터 노네임이 하자고 했고, 동료들이 모두 찬성했습니다."
"아!"
김유찬이 다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김유찬 씨. 왜 우리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지 짐작은 하시지요?"
김유찬이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혹시 불법적인 약을 써야 해서…."
"수술 자체가 불법입니다."
"네?"
"이 비밀수술이 발각되면 저는 체포될 겁니다."
김유찬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호, 혹시 장기…."
이정호가 발끈했다.
"아니, 우리를 지금 뭐로 보고!"
"죄, 죄송합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진짜입니다."
김유찬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이 좀 밝아졌다.
"무슨 방법을 쓰든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체포되는 건 김유찬 씨가 아니라 비밀수술을 한 우리입니다만? 어떻게 책임을 지신다는 건지?"
"예? 어…. 그…. 죄송합니다."
이정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수술이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케이스가 워낙 적어서요."
김유찬은 긴장했다. 이건 그의 누나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수술 성공률이 얼마나…."
"지금까지 세 명을 수술해서."
김유찬은 알레이나와 이연지는 성공했다는 걸 안다.
"그럼 66퍼…."
"세 번 다 성공했습니다."
김유찬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100퍼센트!"
"겨우 세 번뿐이라 통계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100퍼센트잖습니까!"
김유찬이 흥분해서 말했다.
"선생님. 우리 누나도 빨리 좀 수술해 주세요.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우리 누나는 빠르면 일주일 안에도 위험해질 수 있단 말입니다."
"먼저 환자를 한국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예?"
"우리가 미국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데려오려면 문제가 많지요. 특히 제이콥…."
"닥터 마틴에게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이정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왜 제이콥에게 이 수술을 비밀로 했을 것 같습니까?"
"예? 그, 글쎄요?"
"제이콥이 알게 되면, 문제가 생겼을 때 같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운이 좋아 처벌은 피하더라도 피해가 클 겁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제이콥을 위해서 나은데…."
"그, 그렇지만…. 제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제 동료가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아. 혹시 닥터 로버트 민…."
"아는 게 많으시군요."
"그야 이 병의 발견자이자 권위자이신 세 분이니까…."
"로버트가 제이콥을 만나 상황을 설명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야 하는데…."
"이야기가 잘 끝나면 김유찬 씨는 제이콥에게 연락해서 모든 걸 우리에게 맡긴다고 동의만 하세요. 물론 환자분의 동의도 받으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진행할 테니까."
김유찬이 다시 일어나서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 수술비는 어디로 보낼까요? 수술비로 얼마가 필요하든 말씀만 하시면 제가 즉시…."
이정호가 손을 들었다.
"수술이 불법인데 돈까지 받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진짜 교도소로 끌려갑니다. 돈이라도 안 받아야 나중에 할 말이 있지요."
"아…."
이정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김유찬 씨는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김유찬 씨가 드라마 촬영에서 빠진 일이 기사로 났던데, 그런 거 안 좋습니다."
"지금 당장 촬영장에 복귀하겠습니다."
***
김유찬은 촬영 현장에 돌아왔다.
최진욱이 물었다.
"집안일은 잘 해결됐나 봐요?"
김유찬은 살짝 긴장했다.
"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찬 씨 얼굴이 확 폈으니까요.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네."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흐흐흐."
"어? 지금 그 표정 좋아요. 진짜 바보처럼 웃네?"
"흐흐흐흐."
김유찬이 여자 주인공 남현주와 카메라 앞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웃으며 연기했다.
"흐흐흐. 커피 맛있다."
남현주가 구박했다.
"그렇게 웃으니까 바보 같아."
"나 바보 아니다."
남현주가 자기도 모르게 애드립을 쳤다.
"진짜 바보 같아."
촬영장 한쪽에서 신은하가 김유찬의 연기를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웃는 연기가 전보다 더 바보 같아졌는데? 도대체 저 오빠는 미국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등학생 이연지가 옆에서 속삭였다.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거 아닐까요?"
"그러면 죽잖아."
"유찬 오빠는 장갑차 잡는 철갑탄을 맞고도 안 죽었는데요?"
"그건 안 맞았어."
"옥상에서 튄 파편을 많이 맞았지만 상처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건 드플이 막아준 거야."
"넹? 드플이 뭔데요?"
"드래곤 플레이트. 옷 속에 껴입는 보호복인데, 뭐든 다 막아. 장갑차도 잡는 철갑탄만 빼고."
"아. 그날 유찬 오빠의 찢어진 옷 속에 보인 그거요?"
"알아?"
"그럼요. 저도 주문했어요."
신은하가 이연지를 돌아보았다.
"응? 주문이라니? 그거 개인한테는 안 파는 건데?"
이연지가 스마트폰으로 쇼핑몰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기 이거요."
신은하가 사진을 확인했다. 쇼핑몰에서 은색 섬유를 적당히 사용해 만든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에이. 짝퉁이네."
"당연히 알죠. 진퉁은 유찬 오빠만 입을 수 있으니까요."
신은하가 옷을 슬쩍 들춰 안쪽을 보여주었다.
"내 안에 진퉁 있다?"
"앗!"
이연지가 얼른 손으로 드래곤 플레이트를 만져보았다. 금속을 만지는 느낌이 났다.
"진짜다! 이거 얼마에요? 얼마면 돼요?"
"네 용돈으로 되겠니? 그리고 이거 개인한테는 안 팔아."
"톱스타한테만 팔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인맥이 있어야…."
생각해보니 이연지도 나강인과 친하다.
"아니야. 넌 성장기라서 안돼. 이거 맞춤이라서 넌 지금 받아도 금방 못 입게 돼. 포기해."
"하긴. 저도 여기가 더 크긴 하겠죠? 대학 가면 언니들처럼 막 쭉쭉빵빵…."
"그게 저절로 되는 건 아닌데, 어쨌든 포기해. 이건 나만 입을 거야."
드라마 스태프 중에는 병원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최진욱은 촬영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휴식시간도 충분히 주면서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런데 김유찬이 복귀해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덕분에 촬영시간이 생각보다 단축됐다.
최진욱은 여유가 생긴 김에 촬영 재개 며칠 만에 스태프들을 하루 쉬게 했다.
상처가 덜 나은 사람들은 병원에 갔다. 그냥 푹 쉬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태프가 쉬면 배우들도 쉰다.
배우 중 몇 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꼬였던 스케줄을 해결했다. 새 스케줄을 서둘러 잡는 사람도 있었다.
주연 배우인 김유찬에게 스케줄 요청이 쏟아졌다. 방송 출연 요청은 물론이고 그날 당장 CF를 찍자는 제안도 있었다.
매니저가 김유찬의 집으로 찾아와서 설명했다.
"그 회사에서 너 오늘 하루 쉰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당장 CF 찍자더라. 오늘 다 찍을 거래. 이 사람들이 아주 번갯불에 콩 구워 먹으려고 들어."
김유찬이 물었다.
"뭐가 그리 급하대?"
"그 회사만 급한 거 아니야. 거기서 네가 쉬는 날인 걸 먼저 눈치채고 바로 제안한 거지. 이미 세팅 다 해놓고 너 쉬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더라. 얼른 가자."
김유찬은 일어나지 않았다.
"형. 이 CF 촬영시간, 오늘 밤으로 바꿀 수 있어?"
"어? 오늘 오후에 바로 찍을 수 있는데 왜 밤까지 기다리게? 낮에 어디 가?"
"아니. 그냥…."
매니저가 김유찬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갑자기 미국도 갔다 오고, 요 며칠은 되게 밝더니 오늘은 또 되게 심각해 보여. 무슨 일 있지?"
"그냥."
"혹시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냐?"
"미안."
"너 죽는 거 아니지?"
"아니야."
매니저가 손을 들었다.
"난 뭐, 너만 안 죽으면 돼. 알았어. 낮에는 네 스케줄이 안 되니까 밤에 찍자고 할게."
"형. 이 일로 욕먹으면 나를 팔아."
"원래 누가 나 욕하면 난 너 팔아. 그동안 너 많이 팔았어. 나 간다."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집을 나가기 전에 김유찬을 보며 말했다.
"얼굴 좀 펴라. 안 펴도 잘생겼지만."
김유찬이 피식 웃었다.
"고마워."
오늘 밤에 김민정이 비밀수술을 받는다. 하지만 김유찬은 그곳에 갈 수 없다. 그는 너무 유명해서, 병원에 들어가는 사진 한 장만 찍혀도 일은 심각해진다.
그래서 김유찬은 일부러 CF 스케줄을 밤으로 잡았다.
파파라치나 기자가 뭔가 냄새를 맡았을 경우를 대비해서, 비밀수술이 아니라 김유찬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때로 잡았다.
한밤중에 CF 촬영이 시작됐다.
그런데 김유찬은 촬영 중간에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매니저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김유찬의 정신이 딴 곳에 가 있는 데다가 긴장까지 하는 바람에 촬영은 잘 풀리지 않았다. CF 감독이 원하는 그림도 나오지 않았다.
김유찬은 특히 바보처럼 웃는 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게 이 CF의 핵심이라 대충 하고 넘길 수도 없었다.
결국 감독도 지치고 스태프도 지쳤다. 같이 출연하는 여자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CF 감독이 말했다.
"잠깐 쉬었다가 합시다."
***
비밀수술이 끝났다.
이정호가 스톱워치를 확인했다. 스톱워치는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취를 맡은 손성현이 모니터를 확인하며 말했다.
"바이탈은 안정적입니다."
이정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이번에는 돌발상황이 너무 많았어요."
손성현이 말했다.
"보통 병은 이럴 수가 없습니다. 특히 수술 시간 한계가 정확히 한 시간인 게 말이 안 됩니다. 이건 진짜 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불러야 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이게 저주라면, 우리가 풀면 되죠."
***
김유찬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꺼놨던 스마트폰을 도로 켰다. 그는 스마트폰이 켜진 후에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문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이정호 과장이 보낸 문자였다.
그가 급히 문자를 확인했다.
[100]
그건 수술이 완벽하게 성공하면 보내주기로 한 문자였다.
김유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위로 쭉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사람들이 김유찬을 쳐다보았다.
CF 감독이 외쳤다.
"그래! 그 액션으로 합시다! 느낌 제대로 살아있네! 어서 들어와요!"
김유찬은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감독이 요구하는 모든 상황을 감독이 상상한 것보다 더 멋있고, 더 따뜻하고, 더 신나게 보여주었다.
상대역을 맡은 여자 배우도 김유찬의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연기를 펼쳤다.
그녀가 김유찬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었구나. 내 연기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내 주고 있어. 역시 김유찬.’
지지부진하던 CF 촬영은 김유찬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 딱 한 시간 만에 완전히 끝났다.
CF 감독이 감탄했다.
"오늘 진짜 최고의 연기를 봤습니다. 역시 김유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