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 성동격서
청바지를 입고 등산화를 신은 남자가 숲에서 빠져나오다 두 사람을 발견했다.
"여기 왜 사람이…."
박순기가 남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손에 쥐고 있던 토끼를 떨어뜨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헉! 간첩!"
"간첩 아니고 경…."
박순기의 눈에 방금 떨어뜨린 토끼가 보였다. 차 이사가 이런 상황에서 토끼 사냥이나 하고 있을 리 없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박순기가 즉시 말투를 바꾸었다.
"경찰입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 경찰. 휴우. 어? 헉!"
남자가 토끼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먼 산을 보았다. 그러면서 머뭇거렸다.
"저기, 난 그냥…. 토끼가 그냥 죽어 있어서…."
AI 전지인이 말했다.
-토끼의 사체에 덫을 사용해 포획한 흔적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밀렵이군요."
남자가 변명했다.
"저기, 그게…. 토끼는 잡아도 불법이 아니지 않나요?"
"덫을 쓰는 건 불법이죠. 이번엔 거기 걸린 게 토끼였지만, 다른 짐승도 걸리면 잡았을 테니까."
"그, 그게…. 죄송합니다."
박순기가 권총을 집어넣고 토끼를 가리켰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제가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요. 이번에 딱 한 번만…."
나강인이 홀로그램 지도를 보며 물었다.
"이 근처를 잘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여기는 제가 빠삭합니다."
"그러시겠죠. 덫을 놓으러 다니셨을 테니까."
"예. 제가 짐승 다니는 길목도 기가 막….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나강인이 남자가 나온 산을 가리켰다.
"이 산을 잘 아십니까?"
"아니요. 저는 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나강인이 토끼를 가리켰다.
"그거 이번 한 번은 눈감아드릴 수 있는데."
남자의 말이 당장 바뀌었다.
"제가 이 근처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버섯, 버섯 따러 다니거든요!"
자연산 버섯은 전문가도 독버섯을 식용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송이버섯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버섯은 양식만 먹어야 한다.
그런 걸 굳이 따지진 않았다. 어차피 버섯 이야기는 믿지도 않았다.
남자는 나강인이 박순기처럼 경찰일 거라고 착각해서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경찰도 아니고 단속 권한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가 더 중요하다.
"이 산속에 외지인이 사용하는 건물이 있습니까? 간이주택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요? 에이. 이쪽에는 없습니다."
"확실합니까?"
"그럼요. 길 건너편이라면 모를까."
나강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길 건너편이요?"
남자가 포장도로 맞은편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샛길로 쭉 들어가면 산속에 전원주택이 하나 있는데요. 예전에 외지인이 별장으로 썼습니다. 그러다 이삼 년쯤 비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덫…이 아니라 버섯을 따러 가다 보니까 차가 한 대 서 있더라고요."
"그 집에 누가 있는지는 봤습니까?"
"아니요. 멀리서 본 거라서요. 그리고 그 집은 항상 커튼이 쳐져 있어서 원래 안쪽이 안 보입니다."
남자의 신분은 박순기가 확인했다. 이 근처 마을 주민이었다.
두 사람은 포장도로 쪽으로 돌아 나왔다.
나강인이 말했다.
"도로를 따라 달리다 샛길에서 우회전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앙선을 넘어가서 반대쪽 샛길로 들어갔군요. 그런다고 우리가 못 찾을 줄 아나."
"시간을 약간은 벌 수 있죠. 지금은 우리 둘만 왔으니까 차 이사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수색대가 본격적으로 왔으면 그 약간의 시간을 이용해 산으로 도망칠 수 있으니까요."
"아…."
조금 걸어가자 새로운 샛길이 나왔다.
나강인은 박순기를 뒤에 남겨두고 혼자 샛길로 가서 바닥을 확인했다. 이쪽에도 최근에 생긴 바퀴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나강인이 주변을 조사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CCTV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강인이 박순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입구에는 CCTV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길에 그런 게 있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까 봐 설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박순기가 샛길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럼 가시죠."
나강인이 말렸다.
"아니, 거기 말고 이쪽으로. 거긴 안쪽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예? 이번에는 왜 길을 놔두고 굳이 길도 없는 숲으로…."
"이번엔 진짜 같아서요."
***
차 이사가 인터넷으로 나강인에 관한 자료를 검색했다.
"손발이 다 잘려나가니까 이런 정보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군."
그가 예전에 쓰던 정보 수집 라인들은 함부로 쓸 수 없다.
여러 기관이 그를 쫓고 있다. 그중에 예전 라인을 찾아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곳이 있을 수 있다.
노출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라인도 있긴 있다. 그런데 그놈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궁지에 몰린 차 이사를 제거하려 할 수도 있다.
그는 그런 의심 때문에 기존의 정보 수집 라인은 하나만 빼고 연락을 끊었다. 이제는 간단한 정보도 직접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야 한다.
그가 지금 찾는 건 나강인과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였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나강인의 사진은커녕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명한 인간이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정보가 없지?"
영화계에 대단한 무술감독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무술감독의 개인정보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가족이나 애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강인 본인에 관한 자료조차 못 찾았는데 가족이나 애인에 관한 정보가 있을 리 없다.
"연예인들이 무술감독을 언급하긴 했는데 말이야."
그것만으로는 그 연예인이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신은하의 사진을 띄웠다. 그건 신은하가 청평 사건 때 싸우다가 찍힌 사진이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래곤 플레이트가 살짝 보였다.
"민간인이 드래곤 플레이트라니. 과분한 장비이지. 그나마 이 여자가 수상한데…."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늘 보니까 김유찬도 드래곤 플레이트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김유찬은 철갑탄에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옥상이 폭격당할 때 튄 파편에 옷이 찢어졌다. 그 찢어진 옷 아래에 드래곤 플레이트가 보였다.
차 이사는 인터넷으로는 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다.
"어쩔 수 없지. 김석명을 한 번 더 이용하는 수밖에."
그는 다른 정보 수집 라인은 다 손을 뗐지만,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은 남겨뒀다.
김석명은 이미 차 이사의 얼굴을 봤다. 그래서 손절하지 않았다.
"삼선 국회의원의 인맥이면 왜 나강인이나 그 배우들이 드래곤 플레이트를 입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겠지."
김석명은 자주 쓸 수 있는 패가 아니다. 정보를 알아올 때마다 김석명이 노출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기왕 김석명을 이용하는 거, 아예 나강인이 누구와 친하고 약점이 뭔지도 알아내라고 해야겠어."
그는 아지트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서려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지하실의 CCTV를 확인했다.
이 별장에는 창문이 없는 지하실이 있다.
"여긴 이상 없고."
그가 별장 외부를 감시하는 CCTV도 확인했다.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일이 자꾸 꼬여서 그런가. 내가 좀 예민해졌단 말이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석명 따위나 믿어야 한다니. 제기랄."
그는 김석명과 연락할 때는 대포폰을 쓴다. 그런데 대포폰이라 해도 발신자 위치는 나온다.
추적을 피하려면 통화는 그와 상관없는 장소에서 해야 한다.
"오늘 같은 날은 평소보다 멀리 가서 통화하자."
이 아지트의 위치를 확실히 숨기려면, 서울 시내 복잡한 곳으로 가거나 아예 강원도로 넘어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차를 타야 한다. 차 이사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
"저 승합차로는 다른 거점까지만 이동하고, 거기 있는 차로 갈아타…."
차 이사가 멈칫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뭐지?’
곤충들이 내는 소리가 변했다.
그가 주변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이런 소리 변화는 짐승이 지나가기만 해도 생길 수는 있다.
그런데 짐승이 지나가면 풀이라도 흔들려야 한다.
이상한 점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차 이사의 표정이 싹 변했다.
"젠장!"
***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적이 눈치챘습니다!
나강인은 풀숲 사이를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이동하면서 전원주택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이 근처에 설치된 CCTV를 모두 찾아내 사각지대로만 이동하며 조사했다. 먼저 전원주택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나서, 벽에 다가가 내부의 소리를 수집할 계획이었다.
그러다 차 이사가 밖으로 나오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차 이사에게 들켰다.
나강인이 수풀 밖으로 튀어나갔다.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며!"
-감이 이상하게 좋은 놈입니다!
차 이사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나강인이 달렸지만, 문앞에 서 있던 차 이사가 한발 빨랐다.
철판으로 만든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강인이 점프했다. 그의 몸이 몇 미터를 날아갔다. 그가 공중에서 두 다리를 내질렀다.
강철처럼 단단한 다리가 철문을 힘껏 걷어찼다.
철판으로 만든 문이 한 방에 안쪽으로 우그러들었다.
하지만 문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평범한 현관문이 아니었다.
***
차 이사는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권총부터 찾았다. 원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통화만 하고 돌아올 계획이라서, 발각되면 위험한 권총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가 철판이 우그러드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철문이 안쪽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저게 휘다니! 진짜 괴물이냐!"
차 이사가 잠가놓은 서랍을 서둘러 열고 권총을 꺼냈다.
갑자기 현관에 설치된 전자식 도어락이 박살 났다.
차 이사가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겨 탄약을 약실에 장전했다.
차 이사가 권총으로 현관을 정조준했다.
상대가 나강인이라는 건 수풀에서 뛰어나오는 속도를 보고 눈치챘다.
"자칼이나 낙귀를 잡은 한국 정부 특수요원은 총알도 피한다는 소문이 있었지."
그 요원이 나강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코브라 헬기의 사격을 나강인이 어떻게 피하는지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물 같은 회피 능력이 있어도, 사람이라면 총탄은 박히겠지. 현관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절대로 못 피해. 들어와라."
현관 철문이 바깥쪽으로 벌컥 열렸다. 차 이사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풀숲에 박혔다.
현관 바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차 이사는 이 건물의 모든 창문에 커튼을 치고 침입방지용 철망도 달아놨다. 갑자기 거실 창문의 유리가 박살 났다. 밖에서 안으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그쪽이냐!"
차 이사가 옆쪽으로 권총을 돌렸다.
***
AI 전지인이 차 이사가 권총 총구를 옆으로 돌리는 모습을 반투명한 홀로그램으로 보여주었다.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보고했다.
-양동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나강인은 현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창문 쪽에 있는 건 박순기다.
차 이사의 총구가 옆쪽을 향하는 순간 나강인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차 이사는 양동 작전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강인 혼자가 아니었어?’
차 이사가 다급히 나강인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나강인은 AI 전지인의 전투지원을 받으면 근거리에서 쏘는 권총 사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피한다.
그가 옆으로 슬쩍 움직여 총탄을 피했다.
차 이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소문이…."
"어. 진짜야. 공중에서 벌컨포도 피하는 거 봤잖아. 권총은 더 쉽지."
차 이사의 눈이 번뜩였다.
‘다시 쏘면 어느 쪽으로 피할까? 왼쪽? 오른쪽? 확률은 반반이야!’
차 이사가 일부러 나강인이 피할 방향을 예상해 왼쪽으로 총구를 틀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옆으로 빗나가 벽에 박혔다.
나강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물었다.
"너 뭐 하냐?"
차 이사의 눈이 커졌다.
"예측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 어디로 쏘는지 보고 피하는 거였단 말이냐!"
"어. 신기하지?"
나강인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으며 차 이사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 이사가 급히 오른손을 옆으로 젖혀 그 공격을 피했다.
권총은 지켰는데 앞쪽이 활짝 열렸다.
나강인이 차 이사의 배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컥!"
차 이사가 뒤로 날아갔다.
나강인이 작정하고 걷어차면 맞은 사람은 기절하거나 잠깐은 무력화된다.
그런데 방금 발에 걸리는 감각이 사람의 몸과 조금 달랐다. 뭔가에 막힌 느낌이었다.
‘드래곤 플레이트?’
차 이사가 거실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하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크윽!"
나강인이 물었다.
"너 드래곤 플레이트는 어디서 구했냐?"
차 이사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실실 웃었다.
"흐흐.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는 줄 아나?"
"지금 보고 있잖아. 네가 오늘 내 손에 잡히는 건 돈으로 못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