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97화 (404/411)

397. 금선탈각

차 이사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제안했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면 천억을 주지. 천억이면 평생 사치를 부리며 살아도 돈이 남는다."

차 이사는 나강인이 매수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천억 원을 제안한 게 아니다. 그 금액을 듣고 잠깐이라도 갈등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나강인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많이 벗어났다.

"지구가 망하면 그 돈을 어디에 쓰겠냐?"

"그게 무슨 소리냐? 지구가 왜 망한다는 거냐?"

"나도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너를 잡으러 왔잖아. 네가 천억이 아니라 천조를 제시해도 넌 오늘 내 손에 잡힌다."

"내가 핵무기를 거래한 것도 아닌데 왜!"

"네가 나중에 팔아먹을 것 중에 지구를 위기에 빠뜨릴 뭔가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를 않네."

"닥쳐라!"

나강인이 걷어찼는데도 차 이사가 기절하지 않은 건 드래곤 플레이트 덕분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차 이사의 드래곤 플레이트를 확보해 충격 흡수 구조의 패턴을 설계도와 비교하면, 그걸 차 이사에게 넘긴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드래곤 플레이트는 구매자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다. 그래서 모델마다 다른 설계도가 존재한다.

그 설계도를 재사용하면 양산형을 만들 수 있다. 철인기공이나 오메가테크는 양산형도 판매한다.

양산형을 쓰려면 원형의 사용자와 체형이 유사해야 한다. 그래서 모델별 양산형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너한테 드래곤 플레이트를 팔아먹은 놈은 누구냐?"

"그걸 말해주면 날 풀어줄 거냐?"

"자꾸 되지도 않는 걸 요구하는데 말이야. 네가 말 안 해도 그걸 돈 몇 푼에 너한테 넘긴 놈은 찾을 수 있어. 그 모델 구매자는 몇 명 없을 테니까."

"제기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차 이사가 손으로 벽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런데 말이야. 나강인."

차 이사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니야. 넌 끝났어."

"아니라고!"

차 이사가 갑자기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의 뒤에 있던 벽이 덜컹 열리며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보고했다.

-적이 탈출을 시도합니다!

나강인이 차 이사를 향해 뛰었다.

차 이사가 한발 먼저 몸을 뒤로 날렸다. 그의 몸이 계단으로 구르듯이 사라졌다.

나강인이 추격하려 했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계단의 폭이 너무 좁습니다! 계단 중간을 통과할 때 적이 사격하면 총탄을 피할 공간이 부족합니다.

나강인은 적의 권총 사격 정도는 피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일단 피할 공간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지구연합의 군용 신체 강화 기술에 방탄 기능은 없습니다. 요원님의 피부나 근육은 총알을 못 막습니다.

"알아."

나강인이 계단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패가 있어야겠어."

***

차 이사는 계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면서 받은 충격으로 등과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는 지하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계단 위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와라! 내려오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

차 이사가 그 상태로 기다렸다.

나강인은 내려오지 않았다.

"제기랄. 또 내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는군."

차 이사가 권총으로 계단을 겨눈 채로 몸을 일으켰다.

"괴물 같은 새끼. 현관문은 뭐로 찌그러뜨린 거야?"

철판으로 만든 현관문은 나강인의 공중 두발차기에 맞아 안쪽으로 움푹 찌그러졌다. 차 이사는 문밖에서 일어난 일은 보지 못했다.

"공성추라도 가져왔나?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가 지하실 내부를 확인했다.

이 지하실에는 창문이 없다. 거실에서처럼 측면에서 공격당할 위험은 없다.

그런데 이곳은 대피 공간이지 탈출 루트가 아니다.

"제기랄.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 지하실은 외부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 방금 들어온 계단뿐이다.

게다가 시간은 차 이사의 편이 아니다.

"시간을 끌면 무장경찰이 몰려오겠지."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와 군 특임대, 대테러 특수부대 등이 주변을 포위하면 탈출할 방법이 없어진다.

차 이사가 권총을 손으로 꽉 잡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

AI 전지인이 거실에서 조언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적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계단을 지키고 있으면 지원병력이 도착할 겁니다.

박순기가 집안에 들어와 물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나강인이 방금 일어난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박순기는 차 이사가 지하실로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AI 전지인과 같은 의견을 냈다.

"나 사범님. 그럼 출구만 틀어막고 있으면 되는 거잖습니까? 뒷일은 우리 경찰에게 맡기시죠."

"그러려면 이 지하실에 다른 탈출구가 없어야 하는데…."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지하에서 사람의 소음을 포착했습니다.

AI 전지인이 소리를 분석해 차 이사의 위치를 찾아냈다. 놈은 여전히 지하실에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비상구는 없어 보이니까, 여길 막으면 차 이사는 잡을 수 있겠지요."

"독 안에 든 쥐군요."

"그런데 지하실에 쥐새끼만 있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예?"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새로운 인기척을 확인했습니다. 지하에 사람이 더 있습니다.

AI 전지인이 새로 파악한 사람의 위치도 표시했다.

"역시 지하실로 내려가야겠습니다."

박순기가 반대했다.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지하실에서 갑자기 차 이사가 소리를 질렀다.

"나강인! 내려와라!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있다네요."

"당연히 함정입니다!"

"방패가 필요한데."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

***

차 이사가 계단을 권총으로 겨누었다.

나강인이 계단을 점프로 내려왔다.

차 이사가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나강인의 허벅지를 노렸다.

몸이 공중에 떠 있을 때는 적의 사격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강인은 방패를 가져왔다.

나강인이 왼팔을 아래로 내려 총탄을 막았다. 총탄은 방패에 막혀 그 자리에 툭 떨어졌다.

나강인의 왼손에는 드래곤 윙의 날개를 분리해 만든 방패가 있었다.

차 이사는 나강인을 향해 딱 한 발만 발사했다. 그 사격이 방패에 막히는 걸 보고 추가 사격은 하지 않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내려오자마자 총질이냐?"

"인사 삼아 쏜 것뿐이다."

차 이사는 지하실 제일 안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차 이사는 다른 사람을 권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차 이사가 말했다.

"나한테는 인질이 있다. 지금 당장 날 내보내지 않으면 인질을 죽이겠다."

나강인이 인질을 보며 말했다.

"차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통 안 보이시던데, 여기 계셨네요."

피시방 사장 차동석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강인 씨가 여기 왜…."

"구하러 왔습니다.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거실에서 굳이 시간 끌지 않고 차 이사를 잡았을 텐데요."

그가 방금 거실에서 차 이사와 대화를 나눈 이유는, 차동석의 위치에 관한 단서를 차 이사가 실수로라도 흘리길 바라서였다.

차 이사는 당황했다.

"어? 뭐야? 둘이 왜 아는 사이야!"

"그러게 말이다. 왜 아는 사이일까? 내가 차 사장님을 만나게 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라고 보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는 사람은 2082년 지구연합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나강인은 기억을 잃었다. AI 전지인도 데이터를 잃었다.

차 이사가 권총을 차동석에게 바짝 들이댔다.

"아는 사이면 더 내 말을 들어야지! 당장 날 내보내지 않으면 차동석을 죽여버리겠어!"

나강인이 물었다.

"그러면 아깝지 않겠냐?"

"네가 안타까워해야지 내가 왜!"

"넌 차 사장님으로 위장하려고 공을 많이 들였잖아."

"뭐, 뭐라고?"

"처음에는 네가 차 사장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박순기가 드래곤 윙의 다른 쪽 날개로 몸을 가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말했다.

"우리 쪽에는 그렇게 의심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차 이사가 피시방 사장으로 신분을 위장하면서 지낸 줄 알았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차 이사가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한 겁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 차동석 씨가 차 이사가 아니라는 건, 언제부터 확신하신 겁니까?"

"코브라 헬기 조종사를 살려뒀을 때부터죠."

"예?"

나강인이 차 이사에게 말했다.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로 유명한 네가 목격자를 살려둬? 너는 그럴 놈이 아니지. 그런데도 조종사를 기절만 시키고 숲에 숨겨놨어. 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게 뭘까?"

차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강인. 전투만 잘하는 게 아니었나?"

나강인이 차 이사 쪽으로 조금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참 좋아. 이 좋은 머리로 생각했지. 왜 살려뒀을까?"

그것만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다.

"왜 굳이 공격헬기를 탈취해서 드라마 촬영팀을 습격했을까? 그렇게 크게 일을 벌이면 공개수사가 시작되고 네 몽타주가 뉴스를 도배하겠지.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보자마자 신고할 텐데, 왜 굳이 그런 무리수를 뒀을까?"

차 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강인이 계속 말했다.

"우리나라는 범인의 시체가 발견되면 수사는 대충 마무리돼. 죽은 사람을 재판에 넘길 수는 없으니까."

나강인이 차 이사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오늘 드라마 촬영팀을 공격헬기로 습격한 네가, 사건이 끝난 후에 조종사의 옆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면 너를 찾는 수사도 끝나겠지."

박순기가 뒤에서 물었다.

"차 이사가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까?"

"차동석 사장님을 승합차 운전석에서 죽이겠죠. 자살로 위장해서."

"예?"

"경찰이 조수석에 기절해 있던 조종사를 발견해서 깨우면, 조종사는 차 사장님의 시체를 보고 헬기 탈취범이라고 증언해줄 겁니다. 둘이 워낙 닮았으니까, 오늘 차 이사를 처음 본 조종사는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겠지요."

"아…. 진짜 둘이 닮긴 했네요. 저 둘은 형제인 건가요? 와아. 형제의 머리에 총을…."

"아니요. 차 이사와 차 사장님의 관계는 조사해봤자 나오는 게 전혀 없을 겁니다. 완전한 타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닮았을까요?"

나강인이 차 이사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며 말했다.

"차 이사가 일부러 자기와 닮은 사람을 찾은 겁니다. 이런 용도로 써먹으려고요."

차 이사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구겨졌다.

나강인이 계속 설명했다.

"차 이사는 차 씨가 아닐 겁니다. 차 사장님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차 이사라는 별명을 썼습니다. 별명조차도, 언젠가 궁지에 몰렸을 때 차 사장님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기 위해 차 이사라고 지었죠."

"와…. 차 이사가 활동한 기간이 있는데, 그럼 오래전부터…."

"차동석 사장님의 예전 사업이 망한 것도 차 이사 때문일 겁니다. 차 사장님이 너무 잘나가면 알리바이를 짜 맞추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손을 썼겠죠."

차동석의 얼굴이 벌게졌다.

"왜, 왜 나를 이렇게까지…."

"차 사장님이 자기와 닮았고, 이용하기 좋다는 이유 때문이죠."

"겨우 그런 이유로…."

"저놈에게는 충분한 이유일 겁니다."

박순기가 물었다.

"어? 잠시만요. 우리가 차동석 사장님을 의심하게 된 계기는, 우리가 역추적한 해커 중에 차 사장님과 연결되는 놈이 있어서였는데요?"

"그 해커가 역추적 당한 시기는 이미 차 이사가 쫓길 때입니다. 그래서 차 이사가 일부러 그 해커를 쓴 겁니다. 만약 해커가 역추적에 걸리면 결국 차 사장님이 의심받을 테니까요. 떡밥을 미리 깐 거죠."

박순기가 유일한 탈출구인 계단 출입구를 틀어막은 채로 물었다.

"하지만 차동석 씨는 스스로 휴대폰을 끄고 잠적했는데요? 그럼 그건 왜 그런 겁니까?"

나강인이 물었다.

"차 사장님. 왜 그러셨습니까?"

차동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내가 새로 준비하는 사업의 투자자가, 녹음 방지를 위해 휴대폰을 끄고 조용히 만나자고 해서…."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죠?"

"전에도 몇 번 그렇게 만났었지. 투자자 정보는 실제로 투자하기 전까지는 비밀이라고 해서…. 난 그냥, 조심성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투자금을 미끼로 차 사장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예행연습도 몇 번 해서 의심하지 않게 만든 겁니다. 그러다 차 사장님에게 자기 신분을 덮어씌우겠다고 결정했을 때, 일부러 CCTV 앞에서 휴대폰을 끄게 한 거죠."

"나를 자기 대역으로 쓰려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요."

차동석은 권총이 등 뒤에서 겨누어진 상태라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 나강인의 설명이 그의 몸을 더 떨리게 했다.

"나를 죽…."

"이제 안 죽습니다. 구하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차 이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나강인이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어때? 코브라 헬기의 진짜 조종사가 살아있는 걸 보고 추리한 건데, 꽤 그럴듯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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