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트랩 II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서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보좌관이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의원님."
김석명의 차는 곧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좌관이 차를 세우며 말했다.
"의원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누구야?"
형사가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 새끼들이 감히!"
김석명이 차에서 내리면서 화부터 벌컥 냈다.
"너희들 소속이 어디야? 내가 누군지 몰라? 어디 건방지게 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형사가 설명했다.
"의원님이 아니라 이쪽 분에게 체포 영장이 나와서요."
"어? 어? 보좌관만?"
"예. 이쪽 분만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김석명이 보좌관을 바로 옆으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김석명이 보좌관에게 속삭였다.
"경찰에서 뭘 물어보든 다 아니라고 해."
"저는 진짜 아닙…."
"혹시 확실한 증거를 내밀거든 네가 개인적인 일탈을 했다고 해."
"예?"
보좌관은 억울했다.
"의원님. 저는 다 의원님이 시켜서…."
"이 새끼가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내가 권력을 쥐고 있어야 너를 도로 빼낼 거 아냐!"
"저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잘 모르는데…."
김석명이 보좌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가서 그렇게만 말해. 넌 모른다고, 그냥 용산 파티장에서 나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고마워서 알아본 것뿐이라고 해."
보좌관이 눈알을 굴리며 궁리하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의원님. 정말 확실히 빼내 주시는 겁니까? 제가 이 일로 교도소에 갈 일은 없는 거지요?"
"네가 거기 잡혀 있으면 나는 뭐 두 다리 뻗고 자겠냐? 날 위해서라도 널 빼내야지."
그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보좌관이 입을 열면 김석명도 좋을 게 없다. 그 전에 빼내는 편이 김석명에게 이익이 된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김석명이 보좌관과 합의한 후에 형사들에게 말했다.
"우리 보좌관 잘 좀 부탁합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 오해일 테니까 너무 모질게 굴지 마시고. 내가 본청에 전화는 넣을 테니까."
형사들이 보좌관을 체포해 승합차에 태웠다. 보좌관이 겁먹은 얼굴로 김석명을 돌아보았다.
김석명은 인자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 잘 될 거야. 안심하고 갔다 와."
형사들이 타고 온 차가 출발했다.
그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김석명이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차를 몰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공항으로 설정했다.
김석명이 도로를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젠장! 젠장! 이렇게 될 거 같아서 차 이사에게서 손을 떼고 싶었는데!"
너무 단단히 얽혀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여권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일단 외국에 나가서 잠시 상황을 봐야겠어. 내가 국내에 없어야 보좌관이 뭐라고 실토하든 나를 조사하지 못하지."
김석명이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항공권 구매는 비서에게 시킬 수 없다. 그가 출국한다는 건 아무도 몰라야 한다.
그는 항공권을 공항에서 직접 사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뭐? 출국금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국회의원이야! 당장 표 내놔!"
직원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발권을 해드리면 제가 처벌받아요."
김석명은 목소리가 크면 결국 대우받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속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공항 보안 요원들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다가오는 게 보였다.
평소의 김석명이라면 항공사나 국토교통부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항공권을 받아내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제기랄!"
김석명은 공항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돌아갔다.
"출국금지? 이렇게 되면 경찰이 나도 의심하고 있다는 거잖아."
의심받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안다. 보좌관이 잡혀갔으니 다음 차례는 김석명이 될 게 뻔했다.
"나를 방어할 무기가 있어야겠어."
그가 말하는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니다. 그런 건 쓸 줄 모른다.
"힘을 가진 놈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그놈들의 약점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슬쩍 보내야지."
김석명은 영등포에 비밀 거점을 가지고 있다. 집이나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불법과 관계된 자료는 그곳에 숨겨두었다.
그는 차를 몰고 영등포 비밀 거점으로 갔다. CCTV가 없는 낡은 건물의 작은 사무실이 그의 비밀 거점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사무실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활짝 열었던 문이 도어 클로저의 힘으로 저절로 닫혔다.
"여기를 만든 건 정말 신의 한 수…."
닫히던 문이 갑자기 도로 활짝 열렸다.
김석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박순기가 김석명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의원님. 여기에 뭐 좋은 게 있나 봅니다?"
"어? 너, 너 뭐야!"
박순기가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입니다."
"이,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주거침입 몰라? 어?"
박순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같이 온 형사가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서 막내가 대답했다.
"방금 확인했습니다. 이 사무실은 김석명 의원님과 법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던데요."
김석명은 이 비밀 거점을 그의 이름으로 빌린 게 아니다. 추적당하지 않으려고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현금을 주고 빌렸다.
박순기가 물었다.
"건물주는 뭐래?"
"국세청에 연락은 안 하겠다니까, 고맙다면서 얼마든지 조사하랍니다."
박순기가 씩 웃으며 김석명에게 말했다.
"들으셨죠? 여기 있는 건 이제 전부 다 우리 겁니다. 아니면 뭐, 이게 다 의원님 거라고 인정을 하시던가요. 그래 주시면 우리야 고맙죠."
김석명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새끼들이! 나 삼선 국회의원 김석명이야!"
"예. 예. 알죠."
"내가 너희 국장하고 어떤 사이인지 알아? 어?"
"저야 모르죠. 그리고 어느 국장님인지 몰라도, 그분한테 물어보면 별 사이 아니라고 할 거 같은데요? 그 국장님도 옷 벗기는 싫을 테니까요."
"이, 이 새끼들이…."
김석명이 눈알을 굴렸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해. 시간을 끌면 방법이 있을 거야.’
김석명이 박순기에게 외쳤다.
"비켜! 난 여기 그냥 우연히 들른 것뿐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박순기가 손을 이마에 댔다.
"아차! 그걸 말씀을 안 드렸구나."
"뭐, 뭘 또…."
"그게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네요."
박순기가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의원님 체포 영장은 이미 나왔습니다. 우리가 아까 일부러 보좌관만 체포한 건, 이 장소를 찾으려고 한 거거든요? 계속 미행한 보람이 있네요. 이렇게 찾았으니까."
박순기가 수갑을 꺼냈다.
"가시죠. 의원님. 보좌관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박순기가 나강인을 만났다.
"김석명 의원은 체포했습니다."
"교란 작전을 쓰던가요?"
"아니요. 김석명은 차 이사와는 다르더라고요. 김 의원의 눈앞에서 보좌관을 체포했더니 바로 공항에 갔다가, 출국금지가 걸려 있으니까 곧장 영등포 비밀 거점으로 가던데요."
"거기에 쓸만한 건 있고요?"
"많죠. 나 사범님과 관계된 것도 있는데, 차 이사와 김석명이 청부살인을 모의한 영상이 나왔습니다. 그 킬러는 나 사범님이 월드컵대교 앞 한강에서 직접 잡으셨죠."
"차 이사를 제어할 수단으로 쓰려고 김석명이 몰래 찍어뒀나 보네요."
"그렇겠죠. 그런데 이건 제 생각인데."
김석명이 스마트폰으로 초소형 카메라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김석명이 이 카메라로 몰래 찍는 걸 차 이사가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요?"
"이것과 똑같은 모델의 첩보용 카메라가 차 이사의 거점에서 나왔거든요. 차 이사 정도면 눈치챘을 겁니다."
"차 이사가 김석명을 미행해서 그 영등포 비밀 거점의 위치를 파악해뒀겠군요. 촬영하는 걸 모른척한 건, 그 위치를 알아내려고 그런 거고요."
"저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일이 다 끝나면 김석명을 제거하고 영상을 회수할 계획이었겠군요. 거기 있는 다른 자료나 돈도 덤으로 챙기고요."
"그렇죠. 그래서 김석명에게 그걸 알려주려고 합니다. 차 이사가 안 잡혔으면 김석명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걸 알면, 협조할 생각이 좀 들 겁니다."
"정치인이니까 끝까지 배를 쨀 수도 있을 텐데요."
박순기가 씩 웃었다.
"그것 말고도 나온 게 많아서, 적어도 김석명이 국회의원을 다시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면 어디 단체장이나 협회장 같은 건 해먹겠지만요."
나강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집행유예요?"
"아. 그게요."
박순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인에 검경 고위층까지 여러 사람이 김석명과 이것저것 참 많이도 해먹었더라고요. 그중에는 제 위쪽 사람도 있습니다. 진짜 쪽팔려서."
"그러면 잡기 어렵습니까?"
"설사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기들끼리 적당히 수사 방해하고, 시간 끌고, 다른 이슈 터트리고, 거기다 언론도 같이 뭉개주면 결국 덮어집니다. 그러면 몇 명 옷 벗는 정도로 끝낼 수 있죠. 예전에 그렇게 덮인 게 제가 아는 것만 해도 하나가 아닙니다."
"쯧."
AI 전지인이 물었다.
-요원님이 직접 해결하시겠습니까? 잠입 침투 및 적 제거 작전을 진행하시겠다면 제가 적극적으로 지원….
박순기가 활짝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신나서 말했다.
"차 이사가 사건을 워낙 어마어마한 사이즈로 터트렸잖습니까? 톱스타 김유찬 씨에게 코브라 헬기의 벌컨포를 갈겨대는 영상이 뉴스까지 탔으니까요. 그거 전 국민이 다 봤을 겁니다."
"그럼 상황이 달라지겠군요."
"비리는 잘 참는 사람들도 이번에는 못 참을 겁니다. 게다가 톱스타 김유찬의 팬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런 기회 잘 없습니다."
나강인은 김석명의 비밀 거점에서 어떤 자료가 나왔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건 이제 경찰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잘 처리하시겠죠."
"이번 기회에 확 쓸어버릴 겁니다. 하하하."
박순기가 물었다.
"그런데 나 사범님. 김석명 의원에게 비밀 거점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석명을 바로 체포하지 않고 일부러 놓아준 건 나강인이 그러자고 제안해서였다.
"몰랐습니다."
"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떠보라고 한 거죠."
나강인도 거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김석명도 같은 방법을 쓰나 싶어서, 시도나 해보라고 했다.
박순기가 웃었다.
"그러시구나. 어쨌든 나 사범님 덕분에 김석명은 이제 끝났습니다."
***
최진욱 피디는 KMTV 보도국에 코브라 헬기가 습격할 때 촬영한 영상을 몇 개 넘겼다.
다른 방송국들은 그런 영상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사건 현장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는 건,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촬영하던 사람이 위험해지는 일이 가끔 있긴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코브라 헬기가 사람들을 공격했다. 총구가 조금만 방향을 바꿔도 누구든 죽을 수 있었다.
전쟁터나 다름없던 그 상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상황이 공개된 영상은 최진욱 피디가 KMTV 보도국에 넘긴 몇 개가 다였다.
KMTV 보도국은 그 영상으로 꿀을 빨았다. 영상을 하나씩 공개하면서 뉴스의 주도권을 계속 쥐었다.
다른 방송국은 KMTV가 먼저 공개한 영상을 뒤늦게 얻어 써야 했다.
그런데 같은 영상 몇 개를 반복해서 보여주면 효과는 점점 떨어지기 마련이다. 시청자를 계속 붙들고 있으려면 새로운 독점 영상이 필요했다.
보도국장이 최진욱을 직접 찾아왔다.
"최 피디. 진짜 이럴 거야?"
"저 바쁩니다."
"현장 영상만 넘겨줘. 그러면 갈 테니까."
"드렸잖아요."
"그거 이미 다 썼잖아! 영상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거 알아!"
최진욱이 딱 잘라 거절했다.
"다른 영상은 우리 드라마 특별편에 써야 해서요."
"야. 지금 드라마가 중요해?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하잖아!"
"사건 자체야 이미 기사로 나갔고, 현장 영상도 공개했는데요?"
"이 사건이 영상 몇 개로 끝낼 일이야? 당연히 현장에서 촬영한 모든 걸 공개해야지!"
"그야 그렇죠."
"역시 최 피디는 말이 통해."
"우리 드라마 특별편이 내일 방송하거든요. 내일 우리가 직접 모든 걸 확실히 공개하겠습니다."
"어?"
"제가 지금 잘 만들고 있습니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