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일상 III
권수연은 황당했다.
"세상에. 아빠 지금 나한테 선 자리를 가져온 거야?"
권동진이 대답했다.
"내가 가져온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그런 제안이 들어온다는 거지."
"나 진짜 어이가 없는데?"
"재벌가 며느리 자리도 들어오더라니까?"
"딱 잘라 거절하셨어야지!"
권동진이 큰소리쳤다.
"당연히 거절했지! 어디 감히! 그것들은 다 네 연구를 노리고 그러는 거야. 이것들이 21세기에 정략결혼을 하려고 들어!"
권수연이 엄지를 들었다.
"잘했어요. 역시 우리 아빠!"
"그런데 그렇게 차려입고 어디 가니?"
권수연이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강인이랑 저녁 약속 있어."
권동진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 딸. 혹시 강인이랑 사귀니? 벌써 시집가는 거 아니지?"
"아, 아니거든!"
***
저녁 식사 자리에서 권수연의 이라미드 태양전지 이야기가 나왔다.
나강인이 말했다.
"양산은 당연히 성공해."
"나 믿어주는 거야?"
"그냥 아는 거야. 에너지 효율도 더 연구하면 더 좋아져."
"여기서 더? 진짜?"
"어. 네가 만든 건 이 정도가 아니야. 효율이 내 예상보다 낮은 건 소재 탓이야. 더 좋은 소재를 찾으면 돼."
권수연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옆에서 유나린 박사가 물었다.
"다들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에너지 효율이 높아서 경악했는데, 나 팀장님은 오히려 낮다고 하네요?"
"어…"
유나린이 웃었다.
"그래도 나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으면 진짜겠죠."
권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강인이가 말한 거니까 확실할 거예요."
한쪽에 켜놓은 TV에서 출연자들이 노벨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유나린 교수가 개발한 인공 근육은 재활 장비분야에서는 기적의 기술입니다. 인공 근육을 사용한 의수는 이미 성능이 증명됐습니다. 앞으로는 인공 의족이나 척추 보조 등에도 쓸 수 있겠죠.
-맞습니다. 유나린 교수는 그 연구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권수연이 유나린에게 말했다.
"교수님이 노벨상 꼭 타시면 좋겠어요. 노벨상수상자랑 아는 사이라고 자랑하게요."
"에이. 노벨상은 무리지."
나강인이 말했다.
"무리 아닙니다. 유 박사님은 머지않은 시기에 수상자가 될 겁니다."
AI 전지인도 말했다.
-제 초기 메모리의 자료에 의하면, 유나린 박사는 우리나라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며 과학 분야 최초 수상자입니다. 상황이 좀 바뀌긴 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유나린이 다시 웃었다.
"나 팀장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하셨죠."
방송에서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이라미드 태양전지도 유명하죠. 지구의 환경과 에너지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한 대단한 연구니까요.
-맞습니다. 기존 발전소를 친환경 대체에너지로 전환 중인 국가들은 눈이 번쩍 뜨일 소식이죠.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으니까요.
-혹시 노벨상도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양산만 성공하면 확실히 수상할 겁니다. 물리학상에 평화상까지 줘야 한다는 말까지 있으니까요. 아, 물론 평화상은 농담으로 하는 말입니다만.
-진담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겠지요?
-하하하. 없다고는 못하겠군요.
-그런데 이걸 개발한 분이 아직 박사가 아니라면서요?
-그렇죠. 이 연구가 박사 논문이니까요.
-천재네요.
-지금도 대단하지만 미래가 더 기대되는 천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두 개나 유력하다니. 경사 났네요. 하하하.
유나린이 권수연을 돌아보았다.
"너도 노벨상 탄다는데?"
권수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교수님은 타셔도 저는 아니죠."
"아니긴 뭘. 내가 보기엔 나보다 네가 더 유력한데. 나는 사실 나 팀장님이 투자도 해주시고 연구도 도와주셔서 성공한 거야. 안 그랬으면 어려웠어."
나강인이 물었다.
"연구를 도와주다니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만?"
"또 그러신다. 연구하다가 막혔을 때 해주신 조언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권수연도 말했다.
"어머. 이라미드 태양전지도 처음 아이디어는 강인이의 피라미드에서 시작한 건데."
유나린이 물었다.
"너도?"
"옛날에, 그러니까 강인이랑 같이 대학 다닐 때, 그때 강인이가 만든 피라미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거든요."
"그 피라미드가 보통 피라미드가 아니었구나."
"그렇죠. 진짜 특별했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유나린이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노벨상을 만약에, 만약에 제가 타게 되면 수상소감을 말할 때 나 팀장님의 도움이 컸다고 꼭 말해야겠어요. 사람들도 알아야…"
나강인이 정색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네? 아니, 왜요?"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는 인공 근육의 기본 스펙이나 사용법, 사진 등이 들어 있다.
그래서 유나린의 연구가 그 자료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 나강인이 조건 몇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련 분야 과학자가 나강인에게 인공근육의 전문적인 이론 부분을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나강인이 둘러댔다.
"제가 평소에 하는 게 많아서, 유명해지면 곤란해집니다."
"아… 하긴. 비밀 특수 임무를 많이 하시죠."
유나린이 인질로 잡혔을 때 협상가로 위장하고 들어가 적을 쓸어버리고 구해준 사람이 바로 나 강인이다.
"그런데 어쩌죠? 우리 연구실 사람들은 나 팀장님이 어떻게 도와줬는지 다 아는데요?"
권수연도 말했다.
"나도 내 연구실 후배한테 네 피라미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이야기했어."
나강인은 그 피라미드가 어떤 형태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가 그것에 관해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다.
"수연아. 후배 입단속하고 언론에는 절대로 말하지 마라. 내가 많이 곤란해진다. 유 박사님도요."
***
며칠 뒤에 합수부 형사가 나강인을 만났다.
"자칼 말입니다."
자칼은 레스토랑 페넬로페가 있는 강남 7층 건물을 습격했던 국제 용병이다.
"자칼이 오메가테크의 스칼렛 켈리 사장을 노린 건, 차 이사가 제공한 정보 때문이더군요."
"차 이사는 빠지는 데가 없네요. 자칼이 실토하던가요?"
"아니요. 차 이사는 자칼에게 정체를 숨기고 정보를 넘긴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차 이사의 거 점에서 단서를 찾아서 맞춰보다가 알아냈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요. 차 이사가 이름을 숨기고 저지른 사건이 있다고요? 다른 사건들은 차동석 사장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차 이사라는 이름을 일부러 팔았는데요?"
"차 이사가 몰래 저지른 사건이 몇 개 있는 듯 합니다. 그중 하나가 그 사건입니다."
나강인은 합수부 형사와 헤어진 후에 제작 거 점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차 이사가 그 사건에서는 왜 이름을 숨겼을까?"
-매우 수상합니다.
나강인이 스칼렛 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나강인! 나 한국 들어온 거 어떻게 알고 전화 했어요?
"몰랐습니다만?"
-쳇. 몰랐구나. 유나린 박사님 소개로 권수연씨랑 미팅 잡았어요. 그래서 들어왔어요.
"잘됐네요. 시간 되면 잠깐 만납시다. 물어볼게 있어서."
-지금 시간 있으니까 내가 거기로 갈게요.
스칼렛 켈리가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찾아왔다. 그녀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볼 때마다 더 발전하네요. 드래곤 윙은 어디 있어요? 실물을 구경하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보고, 뭐 좀 물어봅시다."
"뭔데요?"
"혹시 오메가테크에 지구의 미래를 위험하게 할 만한 기술이 있습니까?"
스칼렛이 웃었다.
"어머. 우리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 알잖아요. 장비, 로봇, 그리고 무기를 개발해요. 이 세상 모든 무기는 나쁜 놈 손에 들어가면 다 위험하죠."
"강남 7층 레스토랑에서 자칼에게 납치당할 뻔했을 때 말입니다. 그때 자칼의 진짜 목적은 오메가테크의 비밀 서버였지요?"
"그렇죠. 날 납치해서 서버의 보안을 뚫으려고 했죠."
그때 나강인이 자칼 일당을 전멸시키고 스칼렛을 구했다. 그래서 자칼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요원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자칼은 그때 스칼렛 켈리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을 겁니다.
"만약 그때 그 서버가 털렸다면, 배앗겼을 기술 중에 지구가 위험해지는 게 있습니까?"
스칼렛이 멈칫했다.
"네? 아, 그게…"
"있군요."
"음… 이건 비밀인데, 나강인 씨니까 힌트만 말해줄게요."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잘 관리하면 괜찮은데,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기술이 있어요. 그래서 철저히 관리하던 중이었고, 그 사건 후로 더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요."
나강인이 스칼렛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 이사가 미래에 지구를 망하게 한다면, 그 수단 중 하나는 오메가테크의 기술이겠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 이사는 잡혔으니까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아.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말한 거군요."
"그런데 다른 놈이 같은 짓을 또 시도할 수는 있죠. 그 기술은 어지간하면 연구를 중단하고 폐기해요. 느낌이 안 좋으니까."
"사실 그 연구는 중단된 상태예요. 다음 단계는 예산이 너무 많이 필요한데 성과를 보장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스칼렛 켈리가 지금 한국에 와 있다.
"그 예산을 인공 근육을 이용한 장비 개발과 이 라미드 태양전지가 적용된 장비 개발에 쓰려고 해요."
"잘 생각했어요."
"하지만 기존 연구의 폐기는 좀…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내 마음대로 다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우리 회사는 주식회사거든요."
"그럼 기존 자료를 더 철저히 관리해요.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테니까."
스칼렛의 눈을 반짝였다.
"최고의 보안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중이긴 해요. 그런데 그걸 굳이 뚫어보겠다고 찔러대는 해커들이 있어요."
"그런 놈들은 항상 있죠."
"나강인 씨가 그 유명한 해커계의 저승사자 새벽 토끼라면서요? 그 해커들을 역추적해서 찾아 내 주면 우리가 쓱싹 할 수 있는데요."
"미국 연구소에 가면 그놈들을 탈탈 털어줄 수 있지만, 미국에 갈 계획이 없어서."
스칼렛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지금 예약할게요. 나중에 오게 되면 꼭 도와줘요."
"미국에 가게 되면 그러죠."
***
차동석은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주방에서 나강인에게 말했다.
"내가 사업하겠다고 돌아다닌 것까지 차 이사란 놈이 꾸민 일이라니. 난 그 나쁜 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어."
나강인이 오랜만에 피시방 주방에서 잡탕밥을 만들며 말했다.
"이제 피시방 외에 다른 사업은 안 하시겠네요."
"어… 그게 말이야."
"하게요?"
차동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예전에 하던 사업이 차 이사 때문에 망했잖아? 이번 사건으로 정부 쪽 사람들을 좀 알게 됐는데, 그분들 도움으로 다시 해볼 수 있게 됐어. 예전에 일하던 직원들에게 연락도 돌렸어. 이번에는 정부 기관의 일을 받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음…."
"기관에서 돈은 많이 안 주겠다지만, 그래서 사실 남는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해보고 싶어서."
"그럼 이 피시방은요?"
차동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은서가 일을 참 잘해. 하, 하하."
"은서 의견도 들어보셔야죠."
***
동네 분식집에서 신은하가 말했다.
"내가 경쟁자 같은 걸 왜 신경 써야 해? 나 신은하야! 요즘 인기 절정 스타라고. 어디 감히 경쟁해보겠다고 얼쩡거려? 알아서 떨어져 나가야지!"
이연지가 쫄면을 얻어먹으며 말했다.
"언니 말이 무조건 맞아요. 다른 언니들은 어제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현주언니나 세나 언니, 그리고 지현이 언니랑 또…"
"역시 내가 직접 쳐내야겠네! 하나하나 다 내 손으로 확실히 쳐내야겠어!"
이보라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같이 쳐내자."
"야! 네가 제일 수상해! 넌 내 등에 칼 꽂을 거 같아!"
"아직도 표나?"
"항상 난다!"
***
드라마 바보의 사랑은 16부작 드라마다. 이미 12화가 방송됐다.
중간에 2주나 결방했는데도 드라마의 인기는 여전히 최고를 찍었다. 같은 시간대는 물론이고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전체에 경쟁상대가 없었다.
팬들의 열기도 남달랐다.
드라마 속에서 김유찬과 이어질 상대로는 남현주가 유력했다. 그런데 신은하나 오세나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각각의 세력은 지지하는 배우의 드라마 사진 편집본이나 짧은 영상 등을 인터넷에 경쟁적으로 퍼트렸다.
바보의 사랑의 인기는 한국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한국 드라마에 익숙한 나라는 바보의 사랑의 인기도 높았다.
그러다 13화가 방송됐다. 13화에서는 시청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왔다.
드래곤 윙이 13화에 처음 등장했다. 김유찬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았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전술 비행 슈트가 왜 저기서 나와??
-정식 명칭은 드래곤 윙입니다.
-저 슈트에 정식 명칭이 어디 있어요? 다들 편한 대로 부르는데.
-그래도 그 이름이 제일 유명해요.
-그런데 저거 진짜 그 슈트인가요?
-진짜일 수가 없죠. 정부에서 비밀무기를 드라마에 왜 협찬하겠어요?
-비밀무기라고 하기엔 활약을 너무 크게 했는데요? 그것도 두 번이나.
-CG입니다. 잘 만들긴 했는데, 확대해서 잘 보면 CG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CG라고 알고 봐도 진짜처럼 잘 만들었네요.
인터넷에서 드래곤 윙의 CG가 화제가 됐다.
그런데 그 CG를 보고 기겁한 곳도 있었다.
펜타곤 회의실 대형 스크린에 드라마 바보의 사랑 13화가 나왔다. 전체가 다 나온 건 아니다.
김유찬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는 장면만 따로 편집된 상태였다.
미군 특수부대 대령이 대형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영상에 사용된 드래곤 윙 CG 파일을 긴급히 확보해서, 우리 전문가들이 분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