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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은 ‘트럼프’라는 이름의 신성제국이었다.
신의 뜻에 따라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 나라를 풍족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신에게 의지하는 나라다.
신앙심이 깊던 트럼프 제국의 초대 황제를 기껍게 여긴 신들이 약속의 증표로 보내는 것이 신의 축복을 가진 ‘신이 선택한 자’였다.
그들은 몸 어딘가에 ‘신의 문양’을 가지고 태어난다.
‘신이 선택한 자’는 문양이 발현하는 즉시 신전으로 보내지고, 평생의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다. 그 대가로 그들은 주기적으로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린다.
트럼프 제국은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경관부터 자원까지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강대국으로 유명했다. 감히 넘볼 나라가 없었다.
매년 충분하게 내리는 비와 풍족한 작물, 심지어 관광지로서도 유명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트럼프 제국엔 비가 내리지 않게 됐다.
덕분에 작물은 매년 흉작이 계속됐고, 관광지로 유명하던 마을에서는 강과 호수가 메마르거나 동식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무와 숲으로 보기 좋던 제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지독한 가뭄에 점점 사막화되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선 사막의 나라라고 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강대국이던 트럼프 제국은 물과 식료품을 수입하는 데 세금을 쓰느라 바빠졌다.
그 때문에 군사력은 땅바닥에 내려앉았고, 작물은 자라지 않았으며, 굶어 죽어간 백성이 몇백만은 족히 넘었다.
그 와중에 세금은 날이 갈수록 오르고, 황족과 귀족들은 사치를 부리고 있다. 지금껏 귀족들의 식탁이 풍족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처음과 비교하면 국민이 사분의 일가량 줄었지.’
전부 가뭄과 기근에 죽거나 혹은 나라를 등져 타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이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가뭄은 이십 년 전부터 시작됐다.
트럼프 제국은 나라의 대소사의 대부분을 신탁으로 해결했다. 신에게 의지하는 국가란 그런 것이었고, 수 세기간 신탁을 받아 나라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제국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번성했다.
타국에서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신을 의지하는 국가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수 세기간 신탁을 받아 나라를 운영하면서 제국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번성했다.
그 신탁을 결정하는 이는 다름 아닌 대신관이었다.
‘신의 문양’을 이어받은 자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신탁을 받는 대신관이 된다. 하지만 이십 년 전부터 신탁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리기 시작한다던 비가 늦어지고, 풍족했던 토지에서 작물이 잘 자라지 않게 됐으며, 전염병이 시작됐다.
그것은 마침, 내 어머니가 나를 뱃속에 잉태한 시기와 비슷했다.
나라의 불온한 움직임을 눈치챈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사실을 숨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 이틀 늦어지던 비 내리는 주기가 한 달이 되고 반년이 되다, 급기야 극심한 가뭄이 오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날, 대신관이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불행을 가지고 다니는 천한 집시의 탓입니다.>라고.
집시에겐 미래를 점치는 힘이 있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는 나를 낳고 며칠 되지 않아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래지 않아 붙잡혔다. 그녀는 나를 낳고 쇠약해져 있었고, 나는 목도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를 죽이고, 어머니를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려고 했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식으로도 살아있을 수 없었겠지.
<더러운 피가 섞인 아이다. 당장 죽여라.>
내 아비라는 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그래! 내가 너희들을 저주했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누구 하나 눈도 마주치기 힘들다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 어머니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 질렀다.
<그러니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마! 그 아이에게 죄는 없어. 만약 내 핏줄이 섞인 아이의 피가 이 땅을 적시면, 이 제국은 멸망할 거다. 가뭄이 들고, 역병이 돌아 전부, 전부 죽을 거야!>
발악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더 뜨거웠던 그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건 지금도 찾지 못한 답이었다.
비슷한 시기, 집시의 피가 내게 섞여 있어서 신께옵서 노여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 아비이자,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황성의 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다락방에 나를 가뒀다.
그는 신전의 조언에 따라 내 더러운 피를 봉인한답시고, 자물쇠를 걸고 버려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신탁으로 받은 ‘신이 선택한 자’를 찾기에 바빴다. 온 나라를 뒤지고, 국민의 옷을 벗겨 신의 문양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여태까지도 그럴싸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신성제국은 신의 축복을 가진 이들이 존재해야만 풍족함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런 신과 소통하기 위해선 ‘신의 문양’을 가진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필요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신성제국은 더는 풍족해질 수 없다.
아마도 트럼프 제국은 망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분명히 망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이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이상은.
“조금 더, 메마르기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메마름이 곧, 내게 소중한 물줄기가 되어줄 테니까.
이 모든 것은 내 소중한 아이가 내게 보여준 이 나라의 과거였다. 손바닥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던 푸른 빛이 곧 내 손등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동시에 짙은 푸른빛의 문양이 환한 빛을 내다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