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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솔루스 황제 폐하! 이제는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입니다.”
“오시리아 황녀를 자르딘 왕국에 보내시지요. 물이 부족함 없는 곳이기에 아주 좋은 교류가 될 것입니다.”
“협정을 맺어 정기적으로 물을 수입해야 합니다.”
시끄러운 귀족들의 말소리에 황제가 머리를 짚었다. 그의 귀에 들리는 쨍쨍한 목소리들이 시끄러웠다.
오시리아 황녀. 그것은 황제 자신이 뿌린 마지막 씨앗이자 재앙의 근원이었다. 집시였던 미천한 제 어미의 출신을 물려받은 것인지 황녀는 재앙의 씨앗으로 태어났다.
그는 지금도 황녀의 어미인 집시를 안았던 이십 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아무리 반복해도 시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넘쳐나던 때가 돌아오지도 않는다.
‘저번에 신전을 통해 올린 기도도 소용이 없었군.’
황제가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얼음물 한 컵을 비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황제 역시 귀족들의 의견엔 찬성이다. 천치인 데다 골칫덩이인 황녀를 보내는 것에 미련은 없다.
죽일 수 없어 살렸고, 이 땅 어딘가에서 죽을까 버리지도 못했다. 대신관이나 성녀도 황녀를 함부로 처분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결국, 지금까지 죽지도 못한 그것을 먹여 살려왔다.
황녀의 지능은 어린애였다. 밥상은 뒤엎기 일쑤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반병신이었다. 타국에 떠넘기고 싶어도 마땅히 내놓을 명분이 없었다.
‘봉인의 효과가 없는 건가.’
가뭄이 시작되고, 대신관과 성녀의 의견에 따라 황제는 황녀를 탑 꼭대기에 봉인했다. 얼마나 더러운 피를 타고난 것인지 그조차 효과는 미미했다.
오죽하면 지난 이십 년간 비가 내린 날이 두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반병신인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보낸단 말인가.”
깊은 신음을 삼키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오시리아 황녀에게 최대한 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하면 됩니다. 다행히 오시리아 황녀의 얼굴은 아름답습니다. 밤 시중 교육만 잘 해서 보낸다면 볼모로서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밤 시중이라…….”
제 어미를 닮아 벌꿀 색 눈동자와 진홍색 머리카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단지 그런 용도라면 자르딘 왕국에서도 받아줄 확률이 높다. 황제가 말없이 입맛을 다셨다.
“어찌 생각하나, 대신관.”
“최근 삼 년간은 비 한 방울이 제대로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께 밤낮없이 기도해 강과 호수의 물은 약간이나마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일 듯합니다. 저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하얀 신복을 입은 대신관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황제가 팔걸이에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대신관이 괜찮다고 한다면 문제는 없겠지.’
황제가 침음을 삼켰다.
황제는 선황이 다스리던 제국을 물려받아 한동안 태평성대를 누려왔다.
그가 후계자로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물을 절대 아까워하지 말라는 교훈이었다.
신성제국의 황제는 타국과는 확실히 다른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신학을 깊이 알아야 했다. 오죽하면 후계자가 다섯 살만 되면 신전에 보내 십 년 동안 신학을 배우게 할까.
물론 그렇다고 제왕학을 배우지 않았다는 이야긴 아니었다.
“그래도 감히 제국의 황제인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군.”
그는, 강대국인 트럼프 제국의 황제라는 위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사용하는 적절한 방법도 나름대로 배워왔다.
“위대하신 제국의 폐하. 물만 안정적으로 들여올 수 있다면 군사력을 올려 다시 제국의 위상을 되찾는 것도 머지않은 일입니다.”
황제가 내뱉은 불만에 대신이 곧바로 대답을 내놨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의 굽힘으로 물을 싼값에 정기적으로 수입한다면 나쁘지 않다. 게다가 골칫거리를 정식으로 처리할 기회기도 했다.
적어도 황녀가 오 년 정도만 시간을 벌어주면 된다. 그 사이에 군사력을 기르고 전쟁을 준비해서 타국의 수원을 뺏어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르딘 왕국과 협상을 해보라. 동시에 황녀에겐 밤 시중 교육을 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떨어진 평판을 올릴 몇 안 되는 기회일지 모른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식을 잘못 낳은 죄로 신에게서 버림받은 황제로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말이다.
“수색은 계속하고 있나?”
“네, 하지만 신에게 선택받은 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은 정녕 이 나를 버린 것인가.’
황제가 메마른 한숨을 삼키며 대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전에 연락해 기도를 올리라고 해라.”
“이미 저번 주에도…….”
“신께 바친 식량이 부족함이렷다. 세금을 올리고, 작물을 거둬들여 더 성대하게 열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더러운 집시의 피를 이은 황녀 때문이었다.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드디어 적당한 구실로 이 나라에서 추방할 수 있게 됐다. 집시가 건 마지막 저주 탓에 차마 죽이지도 못한 반병신인 계집을 말이다.
황제는 오래도록 묵어왔던 답답함이 가시는 기분으로 회의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