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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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보천치를 연기하기 시작한 건, 어느 정도 사물의 분간이 가능해져 세상을 알게 됐을 무렵이었다.

아콰를 만나고, 아콰가 보여주는 세상을 알게 된 후라고 해도 맞다.

그때에도 타인의 적의는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아콰는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많은 걸 가르쳐줬다. 이곳이 신성제국, ‘트럼프’라는 것, 내게 향한 적의의 이유, ‘신에게 선택받은 자’에 대한 것과 아콰 자신에 대한 것도.

나는 아콰를 통해서 내가 트럼프 제국의 마지막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이 어미의 사지를 가축에 매달아 찢어 죽였다는 것도 들었으며, 동시에 트럼프 제국 전체가 나를 저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아콰를 통해 어머니를 보았다.

나를 품고, 매사에 조심스러웠던 어머니를 보았다. 생명을 머금고 태어난 자그마한 핏덩이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마지막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악몽이 되어 나를 짓누르곤 했다.

그들은 아마도 저주로 인해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황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늙어 죽기를 바랐을 거다. 그렇게 자연히 죽어서 집시가 내린 저주가 사라지길 바랐겠지.

‘사실 가뭄이 계속되는 게 나 때문이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저주라는 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끌려가면서 보이지 않게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볼까 얼른 입가를 가다듬었다. 조금 나쁜 년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신의 힘을 받은 내가 이 땅에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히 제국에는 비가 오지 않는 간단한 인과였다.

제국의 축복을 바라야 할 내가 더욱더 극한의 가뭄을 바라고 있으니 비가 내릴 리가 없지 않은가.

‘전부 자기네들이 만든 일이지만.’

아콰에게 사실을 들어 알게 된 나는 모든 것이 망가지길 간절히 바랐다.

동시에 내가 이용당할 때를 줄곧 기다렸다. 신을 믿는 그들이 스스로 신의 손을 놓아버리는 그때를.

물론, 이건 아직 어렸던 내가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때에 아콰가 귀띔해준 것이었다. 제국이 원망스럽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십 년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그들 자신이, 나를 버리는 기회가.

그나마 나를 위해 가물에 콩 나듯 내리던 비는 내가 제국에게 버림받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끊길 거다.

물은 없고, 대지는 메말라 사막이 되어가다,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복수는 끝을 맺는 거다. 제국에서 버림받은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

망해가는 제국을 구경하면서. 생각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졌다.

“여기로 들어가요!”

나를 끌고 온 시녀가 거의 밀치듯 욕실에 집어넣었다. 감옥에 던져지는 죄인의 기분이다. 휘청이는 몸을 애써 다잡았다.

‘욕실?’

욕실 안은 뜨거운 김으로 가득했다.

멀뚱멀뚱하게 서 있으니 시녀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옷을 붙잡았다. 이렇게 따뜻한 물로 씻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설령 씻긴다 하더라도 찬물을 뒤집어씌우는 게 전부였으며, 장소는 늘 다락방 안쪽의 낡고 더러운 욕실이었다.

당연하지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아주 드문 행사였다.

‘그 외에는 늘 걸레로만 몸을 닦아줬지.’

아콰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각종 병에 걸려서 죽었을 거다. 이 멍청한 인간들은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아니면 그러기를 바랐든가.

일말의 배려도 없이 옷이 다 벗겨졌다.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덕분에 보기 싫을 정도로 빼빼 마른 나신이 드러났다. 햇빛을 못 보고 자라서 피부는 새하얗지만, 창백한 수준이라서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등에 새겨진 신의 문양을 아콰가 가려주고 있으니 들킬 염려는 없다는 사실 정도였다.

“아우, 더러워.”

시녀가 불만을 토했다.

자기네들이 옷을 갈아입히지도, 제대로 씻기지도 않아놓고 불만만 한가득하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타인의 손에 옷이 벗겨지는 것은 익숙지 않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 위해 노력했다. 시녀 하나가 배려 없이 머리에 물을 붓는다.

순간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물을 코로 들이켰다.

“콜록콜록.”

코로 들어온 물에 기침하며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비틀자 뒤에서 누군가 손찌검을 했다. 종종 있었던 일이었기에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손만 매워서는!’

생각과는 달리 몸은 정말 겁먹은 것처럼 한껏 굳어있다. 한평생 이런 연기만 했더니 이제는 내가 정말 애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거친 손이 여린 피부를 세게 문질러 닦았다. 일부러 손톱으로 긁기도 하고, 거칠게 밀기도 하고. 대놓고는 아니지만, 시녀들의 손길은 매섭기만 했다.

그래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녀들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신의 문양’을 가지고 있는 이가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 의기양양한 표정이 어떻게 무너지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통제를 잃고 꿈틀거린다.

‘아, 얼른 벗어나고 싶다.’

거의 인형 다루는 수준의 목욕이 끝났다. 수치스러운 곳까지 박박 씻겨서 끌려 나온 곳은 깔끔한 방이었다. 여태까지 썼던 다락방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하고 넓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원피스 형식의 옷을 입은 중년 여자가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뾰족한 눈을 뜬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오늘부터 황녀님을 교육하게 될 이리나입니다.”

‘교육이라니 대체 무슨 교육? 이제 와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나이 지긋한 여자를 쳐다봤다.

물론,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입에 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군다는 건 말 그대로 모든 행동이 애 같아야 했다.

그런 나를 보던 이리나가 손을 들었다.

짝! 그녀가 내 뺨을 세게 때렸다. 여러 명의 시녀 앞에서 말이다. 여태 아무리 이름뿐인 황녀라도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대놓고 때린 적은 없었다.

연기할 필요도 없이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하지만 곧 상황을 깨닫고, 서러움이 북받치는 척 눈에 눈물을 맺히게 했다. 울려는 나를 보던 이리나가 입을 연다.

“이제부터 입에 손을 넣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황제 폐하께 직접 황녀님 교육을 명령받았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시면 혼을 낼 겁니다.”

“히끅, 히끅!”

어깨를 한껏 편 당당한 목소리에 겁먹은 것처럼 훌쩍이며, 조심스럽게 손을 입에서 뺐다.

뚱뚱한 중년 여자의 두툼한 손에 맞은 덕분에 입 안에선 피 맛까지 느껴졌다. 볼이 화끈거린다. 떨리는 손으로 볼을 붙잡았다. 뇌까지 흔들렸나 싶을 정도로 골이 띵했다.

“대답 안 하시나요?”

“……네에. 히끅.”

분노를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리나는 내 대답을 듣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척살할 대상 일 순위가 정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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