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9)

* * *

처음 타본 마차와 배는 정말 괴롭기 그지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그것들은 멀미라는 것까지 동반해서 나를 반쯤 폐인으로 만들었다. 쓸데없는 연기 따위 필요 없는 완벽한 폐인이었다.

눈만 뜨면 먹은 걸 게워내서, 아콰가 매일 동동거릴 정도였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덜컹거리던 마차가 멈췄다.

‘드디어 땅이야…….’

비틀거리며 마차의 열린 문 앞에 섰다. 여전히 멀미에 비틀거리는 나를 이리나가 거의 잡아 빼듯 마차에서 끄집어냈다.

근 한 달에 걸쳐 드디어 자르딘 왕국에 도착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평생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했다.

평생토록 지내던 다락방에서 꺼내져, 매일매일 몸을 씻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다. 그건 지금껏 평생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한 달간은 평생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

어디든 드러눕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거울로 봤을 땐 아름다운 왕국이었는데, 오는 내내 뭐 하나 구경도 하지 못했다.

‘눈 감았다가 뜨니 왕궁이라니.’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듯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빛으로 장식된 화려한 왕궁이 보였다. 나를 내리는 걸 보니 여기가 최종 도착지인 모양이다. 황금으로 장식한 제국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확실히 아름답긴 한데…….’

속이 울렁거려서 눈에 안 들어온다. 입을 틀어막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결국, 여기서도 구경 한 번 해보기는커녕 거의 질질 끌려가듯 대전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됐다.

이 한 달간의 여행은 평생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지옥이었다.

나는 마차에서도 배에서도 나오지 못했고, 오는 내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흔들림이랑 흔들림이랑 흔들림이랑 흔들림 정도네.’

심지어 아직도 몸이 흔들리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멀미까지 한 덕분에 속은 엉망진창이다.

고개를 숙인 채 사절단의 발만 보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굳이 체면 차릴 필요 없는 천치의 황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자르딘 왕국의 왕께 인사를 올립니다.”

사신단이 예를 갖추며 허리를 굽혔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들려고 하니 이리나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결국,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근데 보통 황녀가 고개를 숙이던가.’

어차피 고개를 들 힘도 없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게다가 귀족 예법은 잘 모르니까.’

아콰에게 그런 쪽으론 배운 적이 없었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지난 이십 년간 필요가 없었으니까.

‘좀 배워둘 걸 그랬나.’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전부 앉지 그러나.”

사절단의 인사에 대답도 없이 왕이 툭, 내뱉듯 권했다. 왕의 말에 사절단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내 의사는 필요 없을 테고, 이야기 진행이야 이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외람되오나, 어디에…….”

“아, 거기 그대로 앉으면 되지 않겠나.”

왕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바닥에 앉으라는 것이다. 한 나라의 사절단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머리는 열심히 굴러가고 있는데 몸은 축축 늘어졌다.

‘난 앉아도 될까? 그냥 떼쓰고 앉아버릴까.’

아니 오히려 앉고 싶다.

‘바닥이 아직도 흔들리는 것 같아…….’

후유증이 심각하다. 속으로 다시는 마차건 배건 타지 않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해본다.

“사양 말고 어서 앉게.”

재차 권하는 왕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고개를 숙인 덕에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왕의 옆에 늘어서 있을 귀족들이 다 같이 짠 듯이 키득거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뻔한 행동이다.

하지만, 사실 약해진 옛 강대국이란 대체로 이런 취급 아니겠는가.

‘오히려 예상을 못 했다는 게 더 신기한데.’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물론 내 모국이 어떤 대우를 받든 내겐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그저,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바닥이 멈춰줬으면 했다.

‘멀미는 정말 무서운 거구나.’

이렇게까지 페이스를 무너뜨려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일부러 제국이 나를 물 먹이려고 한 행동이라면 백 점 만점의 백 점으로 성공이다.

“자르딘 왕국의 왕께선 지금 제국의 사절단을 무시하고 계신 겁니까?”

“무시? 무시할 거리라도 있던가. 그리고 이건 우리나라만의 환영 인사네.”

왕이 아예 자세도 무너뜨리고 손등에 턱을 괴며 말했다.

“아니면, 제국의 사절단은 내 나라의 예법을 무시하는 건가?”

덧붙이는 말엔 날이 서 있었다.

‘음, 개소리도 왕이 하면 장난으로 들리진 않는구나.’

하지만, 왕이 이것이 이 나라의 예법이라고 말하는데 사절단이 할 말은 없을 거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나 이쪽이 아쉬운 처지일 때는 더더욱.

“이런 게……!”

“이런 게?” 왕이 말꼬리를 붙잡았다.

“아닙니다, 호의를 받아 실례하겠습니다.”

울컥하는 사절단 중 한 명을 막아선 다른 사자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앉았다. 그래도 이성적인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사자를 따라 다른 사절단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와, 진짜 아쉽긴 아쉽나 보구나.’

왕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지, 다들 한마디도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고개를 숙인 내게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제 제국은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한다는 걸…….’

이제라도 자각했으면 좋으련만. 생각하는 중에 이리나가 나도 끌어당겼다. 이리나를 따라 함께 몸을 낮췄다. 여기저기서 닿는 시선이 매우 따갑다.

“오시리아 황녀라고 했던가?”

한참 만에 자르딘 왕국의 왕이 말했다.

결국,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게 됐다. 물론 하나뿐인 제국의 황녀로서 받을 만한 대우는 절대 아니었다.

다행히 같이 온 이들도 그걸 아는지 사절단의 얼굴도 하나같이 굳어있다. 물론 그들은 내가 대접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무시당해서 기분이 상한 것이겠지만.

‘이건 무슨 죄인이라도 추궁하는 느낌인데.’

내게는 날마다 반복되던 일상과 그리 다를 것이 없어서 감흥도 없다. 사실 뭐가 어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제국에게서 완전히 버림받는 오늘이 지나면, 나는 자유를 얻을 테니까.

그리도 기다리던 복수의 막이 열리는 거다.

“제국의 위상도 많이 떨어졌군그래. 아무리 물 때문이라고 하지만 황녀를 볼모로 내놓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왕이 말했다.

“물론, 반병신이긴 하지만 말이야.”

덧붙이는 말에 조금 올라가려고 했던 호감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망했네.’

이쪽도 폭탄급 지뢰인 것 같다. 비웃는 목소리만 들어도 내 앞길이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훤히 보인다.

‘아무리 천치라지만 사람 앞에 두고 너무하네.’

솔직히 나도 취급이 좋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 하는 말치곤 너무하다. 수그린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반병신을 연기하는 건 이곳에서도 계속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귀찮아서라도 내게서 관심을 끌 테니까.

‘꽥꽥거리는 천치를 안고 싶진 않겠지.’

생각에 잠겨 손톱을 애처럼 물어뜯었다. 딱, 딱. 작은 소리가 울렸다. 이것도 맨날 하다 보니 어느샌가 습관이 됐다. 뒤늦게 아차 싶어 입에서 손을 뺐다.

“흡!”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옆구리의 통증에 숨을 삼켰다. 방금 그건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손을 빼기 전에 이리나가 먼저 발견했던 모양이다. 눈을 날카롭게 뜬 채 찌른 옆구리가 고통을 호소했다.

……설마 여기서도 이럴 줄이야.

‘나도 여기서 손가락 빨 생각은 없었다고!’

그래 봐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변명일 뿐이다.

나도 연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종종 연기 중이 아닐 때도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손톱을 뜯는 것도 그런 버릇 중의 하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정말 내 삶이 망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될 때가 있다.

이리나는 지난 몇 달간 내게 성교육을 시키고, 남자에게 복종하는 방법을 가르친 여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척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정신은 다른 데로 가 있었지만.

‘음, 울렁이는 느낌이 좀 괜찮아졌네.’

이제야 좀 땅이 안 흔들리는 것 같다. 다행히 속도 괜찮아졌다. 살 것 같은 기분에 숨을 길게 내뱉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대체 어떤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연히 감이 오질 않는다. 궁금함에 몸이 절로 들썩인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진 않다는 게 뻔히 느껴져서 애써 참았다.

오죽하면 싸한 느낌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을까. 으득, 사절단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아주 작았기에 왕에게 닿진 않았을 거다.

‘이제야 현실을 마주한 거지.’

그러니까 이들의 심경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오랜 시간 쌓아온 과거의 영광과 제국이라는 이름의 자부심이 있다.

그것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있는 사절단은 ‘한낱 왕국의 왕’ 따위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절로 비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멍청하다.

‘어떻게 갇혀있던 나보다 세상 물정을 더 모르는 것 같네.’

이게 정말 사절단인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자르딘의 왕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알고 있으나, 오시리아 황녀는 제국의 어떤 분보다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지능이 조금 부족하시나 배움이 빠르시어, 왕께 결례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해두었습니다.”

왕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사절단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물론 왕이 입을 열고도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었다.

‘……없는 말 쥐어 짜내느라 고생이 많다.’

게다가 불의의 사고라니.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그럴싸하게 하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저주받은 황녀는 가둬둬서 미쳐버렸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칭찬인지 나를 깎아내리는 건지도 모르겠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리석 위에 그려진 문양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고급 대리석으로 된 차가운 바닥은 뜨거운 더위에도 시원했다.

“황제 폐하께선 자르딘의 왕께 깊은 교류를 위해 친선의 의미로 소중한 황녀를 내어주는 것이라 하셨으니 부디 괘념치 마시고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선이라…….”

또다시 사자의 말꼬리를 붙잡은 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근데 미리 서로 합의하기로 한 사안이 아니었던가? 그런 것치곤 누구 하나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일부러 무시하는 거 보여주려고 부른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무시도 결국은 정치의 하나일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어린애처럼 지루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무릎을 꿇고 있어서 다리가 저리기도 했다.

그 순간 이리나가 꼼지락거리는 내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윽……!”

이게 진짜 미쳤나! 꿇어앉은 모습 그대로 한껏 웅크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이를 악물어야 간신히 신음을 참을 수 있었다.

‘그냥 엎어져서 울어버릴까…….’

머릿속에 깽판 치는 모습을 잠깐 상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저 왕이 나를 거절하면 꼼짝없이 다시 배와 마차를 타고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간신히 찾아온 기회를 이렇게 망칠 순 없다.

“또한, 이것은 저희 황제 폐하께서 보내는 물건입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왕을 살피던 사자가 급히 뒤쪽을 가리켰다.

뒤에서 병사 두 명이 뭔가를 가지고 앞으로 나왔다. 내 앞으로 고급스러운 상자가 놓였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내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검은색에 금으로 된 수가 놓인 상자 속에는 수많은 금은보화가 있었다.

헛웃음이 절로 삼켜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저 정도면 수십만 명의 국민이 굶어 죽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겠네.’

제국민으로 태어난 이들이 불쌍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고개를 든 김에 상황을 살피려다 왕과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빠르게 겁에 질린 모습으로 떠는 연기를 했지만, 짧게 마주친 시선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저거 인간이지?’

한순간 마주친 왕은 아름다웠다. 하늘색과 하얀색, 그리고 푸른색이 섞인 물을 닮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젊은 왕이었다.

아이스 블루 빛의 눈동자는 아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물로 유명한 왕국이라 그런가?’

자르딘 왕국의 왕은 물과 흡사할 정도로 닮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왕의 눈이 빛나는 걸 보고 말았다.

온몸이 훑어지는 기분이었다.

“오시리아 황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아니나 다를까, 왕이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이 불렸지만, 모른 척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 이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애처럼 굴기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얼른 고개를 드세요, 가르쳐준 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쳐준 거라고 해 봐야 남자 말에는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 외의 답은 하지 말라는 것밖에 없었을 텐데.

‘도대체 얘는 자꾸 나한테 뭘 가르쳐줬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제법 많은 귀족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몸을 떨며 왕과 눈을 마주했다. 위축된 것처럼 몸을 한껏 움츠린 채로 말이다.

가만히 나를 보던 왕이 돌연 시선을 내려 옷자락을 꽉 잡은 내 손등을 봤다.

그곳은, 아콰가 잠들어있는 신의 문양이 새겨진 곳이었다. 왕은 그곳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우연이겠지.’

약간 섬뜩한 느낌에 드레스 자락을 조금 더 꽉 쥐었다. 왕이 돌연 웃었다. 그가 시선을 들어 사절단을 쳐다봤다.

“트럼프 제국의 황제는 정기적인 물과 식량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화친의 의미로 정기적인 교류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근데 왜 저 황녀를 내게 보내는지 모르겠군. 트럼프 제국의 황제는 길을 돌아가는 것이 취미인가?”

왕이 정말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사절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국을 모욕하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물드는 이들도 있었다.

단지 내 등골만 한층 더 오싹해졌을 뿐이다. 저 말의 의미가 어쩐지 나를 겨냥하는 것처럼 들렸다.

턱을 괸 왕이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뭐든 좋지. 고맙게 받겠다고 제국의 황제께 전해주게.”

왕이 최소한의 감사 표시를 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서 다리에 쥐도 난 것 같고,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에도 핏기가 가셨다.

빨리 일어나서 어디든 가서 쉬고 싶다.

‘아콰에게 저 왕에 관해서 물어봐야겠어.’

아무리 봐도 그냥 했다기엔 꺼림칙한 말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지금 이 상황은 트럼프 제국이 자르딘 왕국에게 천치인 황녀를 떠넘기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왕은 마치 내가 있으면 해결될 것처럼 말했다.

……숨겨진 문양이 보였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아니, 설령 보였다고 해도 신성제국이 아닌 타국의 왕이 자세히 알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페델리우스 경.”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던 왕이 돌연 누군가를 불렀다.

“예.”

왕의 옆에 있던 우직한 기사가 한 걸음 내디디며 짧게 대답했다. 고개를 들지 않아서 하반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절제된 걸음걸이가 우직해 보였다.

“오시리아 황녀는 그대가 돌보도록 하게. 내 왕궁엔 마땅히 황녀인 그녀를 둘 곳이 없어서 말이야.”

‘저게 무슨 개소리야?’

저 왕은 거짓말이 취미인 걸까? 바닥에 꿇어앉는 것이 예법이라고 하질 않나, 이 넓은 왕궁에 나 하나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럼 저 기사에게는 날 둘 곳이 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둔한 머리로는 명령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이해를 못 한 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왕이 앉은 의자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페델리우스라는 기사가 내 궁금증을 대신 입에 담았다.

“내가 주는 모든 상을 마다하는 경에게 주는 선물이지.”

왕이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선물’이라고 칭해지는 것이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지금 저 왕은 명백히 제국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아마 부당하게 대우하더라도 제국이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자르딘 왕국을 제국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이것도 그 연장선인가?’

그렇다면, 왕은 황제의 선물인 나를 휘하의 수하에게 줌으로써 제국을 한 번 더 무시하려는 거다. 제국의 자존심을 완전히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짙게 느껴졌다.

“이번엔 받아주겠지? 페델리우스 경.”

은근한 압력을 넣는 목소리에 기사가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넓은 대전에 울렸다. 물론 내 뒤에 꿇어앉은 사절단도 분노에 떨며 숨을 들이켰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래.”

“왜 우리가 저런 저주받은 계집 하나 때문에……!”

아주 작은 목소리들이 내 귀에 틀어박혔다. 울분에 찬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적나라한 적의가 담긴 목소리에 내 기분도 한층 가라앉았다.

그들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신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죄의 화살은 전부 내게 꽂혀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남 탓하는 것밖에 없구나.’

지체 높은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저게 한계인 모양이었다.

“이참에 그대도 여인에게 관심을 가져보라는 내 배려라네.”

대답 없는 기사에게 왕이 한 번 더 덧붙였다. 이쪽과는 다르게 저쪽은 아직 대화가 진행 중인 듯했다.

솔직히 저건 거의 강요 수준이다.

게다가 이런 천치로 소문이 자자한 황녀를 주며 여인에게 관심을 가져보라고 하는 건…….

‘성적으로만 다루라는 의미든가, 저 기사가 왕한테 어지간히 미움을 받았든가 둘 중 하나겠네.’

확실한 건 둘 다 좋은 의미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여러 번 거절할 수 없었는지, 기사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결국 수긍의 뜻을 내뱉었다.

‘난 저쪽으로 팔려가는 건가.’

나로서도 저 왕의 밑에 있는 건 어쩐지 껄끄러웠으니 어쩌면 다행인 일일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로 말이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거처를 정하는 것이 애완동물이나 가축 같은 느낌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기쁘게 받아줘서 다행이야.”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지만, 왕은 멋대로 해석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왕이 다시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뒤쪽에서 원망 섞인 시선이 피부를 찌른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언제까지나 옛 제국의 광명에 숨어있으니까 그렇지.’

어쩌면 이건 아비인 황제가 왕국에 굽힌 순간부터 일어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제국도 왕국을 무시해서 천치인 나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나보단 내 검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은데……. 행여나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눈앞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태에 대답해야 하는 사자는 대답조차 잊은 모양이다. 사절단 앞에서 기사에게 황녀를 바로 떠넘긴 거다.

제국의 위치를 한낱 기사와 동등한 수준까지 끌어내린 것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근데 왕이 여자를 신하에게 하사하는 건 흔한 일이긴 하잖아?’

아콰의 강의 중 하나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타국에서 받은 여자를 사절단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보내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무시당한 건 나였지만,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어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아니면 트럼프 제국의 황제가 준 성의는 이 상자만 받을 테니, 황녀는 도로 데려가겠나?”

왕이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흔쾌히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왕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물론, 준다고 해도 도로 데려가지도 않겠지만 그럴 만한 선택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바닥에 처박힌다.

숨을 삼키고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자존심이 상해 그러겠다고 하지만 않았으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화친의 의미로 왕께 드린 것이니,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사자가 주먹을 말아 쥔 채 대답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속에서 툭,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줄곧 나를 칭칭 동여매고 있던 무언가가 끊겼다.

‘드디어 끝났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트럼프 제국이 완전히 내 손을 놓았다는 것을. 그들과 신의 관계가 드디어 단절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연회를 마련했으니 즐기다 가게. 사절단을 안내해주도록.”

“……배려에 감사합니다.”

사절단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이리나와 함께 몸을 돌려 나갔다.

……나만 빼고 말이다.

졸지에 대전 한가운데 무릎 꿇은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

시선이 이쪽으로만 쏠리는 게 느껴져서 민망하기 그지없다. 고개를 들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 정도로 시선이 몰리니 연기도 버겁다. 등줄기에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울어야 하나? 울까? 아니면 떼를 써? 무섭다고 해?’

머릿속이 패닉에 빠졌다.

“페델리우스 경도 오늘은 황녀를 데리고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해.”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기사가 이번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답답하고 우직한 기사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벅저벅 묵직한 걸음이 정확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온 그가 몸을 굽혔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우응…….”

정중한 목소리에 도리어 내가 놀랐다. 어린애처럼 멍하니 말끝을 늘여 대답하면서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사실 눈동자를 둘 곳을 찾지 못한 것뿐이다.

대전 한가운데서 떠맡은 백치에 가까운 멍청한 황녀. 그로서는 충분히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윽! 다리에 쥐 났어.’

일어나긴 일어나야 한다.

아파서 울어야 하는 게 보통의 순서지만, 도저히 여기서는 드러누워 울 자신이 없었다.

아프면 우는 게 정상이지만, 인간적으로 사람이 너무 많지 안흥ㄴ가.

게다가 왕 앞에서 연기하는 건 어쩐지 껄끄럽다. 평생 비웃음거리로 조롱당할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을 하고도 일어나지 않자,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초조함에 버릇처럼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물었다.

또다. 입에 넣고서야 아차 싶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쪽쪽 물고 빨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정이 떨어져서 버려두겠지.’

모두가 나를 잊어버릴 즈음 아콰의 도움을 받아 무슨 수를 쓰면 될 거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사의 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내 다리 밑에 손을 넣어 허리를 받치곤 그대로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내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거짓말이 아니라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손가락을 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계속 엄지손가락을 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사는 기분 나쁜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따뜻하고, 엄청 단단하네.’

난생처음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어서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싫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이렇게 적의 없는 따뜻함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아콰는 늘 다정했지만, 사람이 아니기에 온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생각에 잠겨 긴장이 풀린 순간, 기사의 어깨 너머로 왕과 또 눈이 마주쳤다.

물론 입에는 여전히 손가락을 문 채였다. 어쩐지 쪽팔려져서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를 보며 왕이 웃는다. 정말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원하는 것은 가졌나?’

유려하게 움직인 왕의 입술이 내게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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