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델리우스라는 기사의 저택에 도착했다. 시녀 한 명이 내게 방을 안내해주곤 나갔다. 피곤이 밀려와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페델리우스라는 기사는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도중에도 내게 친절했다. 불편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친절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매번 오랜 시간 고민해야 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친절은 아무리 나라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지친다.’
언젠가 아콰에게 사람은 비슷한 부류끼리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설마 사용인들까지 친절할 줄이야…….’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내게 방을 안내해준 집사와 시녀도 친절했다.
적의도 악의도 없는, 그저 순수한 호의뿐이었다. 도무지 적응이라는 게 되질 않는다.
특히 시녀는 구김살조차 없었다.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치라고 몇 번이나 설명하고 갔는지 모른다.
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그녀는 물러났다.
“아콰.”
내뱉은 목소리엔 피곤이 가득 담겨서 내 귀에도 지치게만 들렸다. 단지 사람의 친절을 상대했을 뿐인데 생기를 다 빼앗긴 것 같다. 시녀에게 시달리고 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네, 주인님!]
아콰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환한 빛무리를 터뜨렸다. 평소보다 한층 더 강한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아콰의 목소리는 제국의 다락방에 갇혀있을 때와는 다르게 기운차다. 그 생기 있는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빛무리가 사라져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뜬 내 앞에는 푸른색의 처음 보는 생물이 눈앞에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저 푸른빛은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아콰?”
막을 새도 없이 의문이 튀어나갔다.
[네, 주인님.]
푸른색의 이상한 형상을 한 아이가 대답했다. 동시에 턱이 툭, 떨어지며 입이 벌어졌다.
“너 정말로 아콰야?”
아콰는 이제 더는 빛무리가 아니었다. 푸른 빛을 뿜는 건 여전했지만, 확연한 형체가 있었다.
아콰는 요정처럼 보이기도 했고, 언젠가 들었던 ‘인어’라는 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콰는 성인 남자 주먹만 한 크기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 같은 모습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요, 저는 주인님의 아콰랍니다!]
아콰가 콧김을 훅 내뿜으며 허리춤에 양손을 올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늘 잔잔하던 물소리도 지금은 찰랑거리게 들린다.
[주인님께서 물의 기운이 풍부한 자르딘 왕국에 온 덕분에 저는 드디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기뻐 보이는 아콰의 모습에 내 표정도 절로 밝아졌다. 줄곧 함께 갇혀있었던 만큼 이 아이가 행복하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반가워, 아콰. 원래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아콰를 만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양손을 내미니 아콰가 언제나처럼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얼굴이 동글동글한 게 귀엽게 생겼다. 오밀조밀하게 잘 만든 인형 같기도 하다.
“……근데 너 남자였구나.”
어쩐지 묘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아콰는 짧은 머리카락이나 평평한 가슴을 가진 소년이었다. 상반신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몸매가 고스란히 보였다.
내 말에 아콰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에요, 주인님. 제게는 성별이 없답니다.]
아콰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으며 설명했다.
늘 빛무리랑만 이야기하다가 제대로 된 형체와 대화를 나누니 도무지 적응되질 않는다.
그래도 오랜 시간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와 만난 느낌이라 반갑다. 아콰도 기분 좋은 얼굴로 내 손바닥 위에서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주인님, 주인님. 느끼셨어요?]
“뭘?”
[드디어 주인님의 몸에서 트럼프 제국과의 인연이 끊어졌어요.]
아콰가 나보다 더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콰의 주변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피곤에 지친 나를 달래주는 듯했다.
나도 괜히 기분이 상기됐다.
“아, 물론이지.”
꽁꽁 묶여있다가 단숨에 해방된 그 느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통쾌했다.
마치, 줄곧 막혀있던 속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만 벗어나면 돼.”
[왜요?]
내 말에 아콰가 돌연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갸웃거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귀엽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어 아콰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응? 뭐가?”
[자르딘 왕국만큼 주인님이 살기 좋은 나라는 없어요. 근데 떠나시려는 건가요?]
“물론, 여기가 나쁜 곳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어린애 같은 연기를 할 순 없잖아? 난 이 나라에 팔려온 몸이니까 지금 상태론 자유로워질 수 없어.”
[제가 자르딘의 왕께 부탁드려볼게요!]
이번엔 내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누군 줄 알고, 아콰가 직접 가서 부탁한다는 걸까? 마침 잘됐다. 아콰에게 자르딘의 국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했었다.
“아콰, 네가 직접 자르딘의 왕에게? 혹시 아는 사람이니?”
[아, 음…….]
망설임 없이 대답해줄 거라 생각했던 아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방방 뛰면서 대답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의심에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아콰, 아까 그 왕이 네가 숨겨준 문양을 본 것 같아.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어. 위험하지 않을까?”
[아마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뭐가?’
말을 뱅글뱅글 돌리는 아콰에 울컥, 소리를 칠 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아콰에게도 숨기고 싶은 일이 있는 법이겠지. 그래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 괜스레 서운하다.
“어쨌든 그 왕에게 부탁하고 싶진 않아.”
[힝……. 그러신가요? 주인님이 그러시다면야 저는 주인님의 말씀을 따를 거랍니다.]
풀이 잔뜩 죽은 표정으로 아콰가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곤 아콰를 살폈지만 말해줄 기색은 없다.
결국, 내가 먼저 포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바보천치를 연기할 마음은 없어. 나도 이 나라는 좋지만, 지금 내 위치는 볼모만도 못해. 거의 팔려온 수준이란 말이야.”
[주인님, 하지만 아까 그 기사에게는 나쁜 기운이 없었는걸요.]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아콰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함께 오는 내내 나를 떠맡은 기사에게서 보인 것은 걱정과 염려뿐이었다. 타인의 악의에만 민감한 나도 느낄 만큼 적나라한 호의였다. 그렇기에 더욱 불편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상대방이 친절한 사람인 줄 알기에 연기를 계속하기가 껄끄러웠다. 착한 사람을 속이는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든다.
차라리 좀 막 대했더라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아콰, 여기서 어떻게 나가면 좋다고 생각해?”
[저는 이제 더 이상 주인님이 연기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으며, 아콰는 내게 조언했다.
[주인님은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콰는 이제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길 바라요.]
“…….”
[주인님, 주인님은 제국의 그 누구보다 신에게 사랑받아 태어나신 분이랍니다.]
아콰가 내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이나 작은 양손을 들더니 내 두 볼에 조심스럽게 대곤 말했다.
볼에 닿는 것은 온기가 담긴 손이 아니었다. 도리어 물이 닿는 감촉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축축하지는 않다.
‘원래는 이런 촉감이었구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벌리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콰는 이제 주인님께서 누군가를 속이는 건 그만두셨으면 한답니다.]
노래하듯 울리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릴 적부터 나를 돌봐준 덕분에 가끔 아콰는 내 보호자처럼 굴 때가 있다.
그땐 아콰가 빛무리 모양이어서 웃어넘겼는데, 지금은 형체가 있으니 기분이 색다르다.
물론,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긴 하지만.
[주인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파고든다. 줄곧 쌓인 피로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그 상냥함에 기대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천천히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린애 같던 내가 갑자기 멀쩡한 성인처럼 행동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그게 뭔가 문제가 되나요?]
아콰가 내게 묻는다. 정령인 아콰와 내 생각에는 늘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음, 아무것도 못 하던 애가 갑자기 어른이 되면 황당하잖아.”
[그런가요? 인간은 너무 어렵네요.]
아콰가 공중에서 목을 기울이다 못해 몸 전체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나니 표정이 다양해서, 아콰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으음, 으음, 으으음!]
아콰가 고민하는 듯 신음을 흘리며 아예 360도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주인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은 갑자기 자라면 이상하다는 뜻인가요?]
“음, 그런 거겠지?”
[그럼 간단하군요, 주인님!]
‘……도대체 뭐가?’
또다시 떠올린 의문에 결국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콰를 쳐다봤다. 아콰는 정답을 찾아서 기쁜 듯 손바닥 위를 날아다니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 나보다 더 인간답다.
아콰가 진정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콰는 금방 다시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주인님께서 성장하면 되잖아요!]
“아콰, 나는 애가 아니야. 몸은 다 자랐……. 아.”
아콰의 말에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런 거면 괜찮으려나……?”
어린아이가 누군가를 보고 배우며 성인이 되어가는 것처럼, 나 역시 같은 절차를 밟으면 되는 일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제국에서 벗어나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그게 가장 괜찮을 듯하다. 아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콰가 한껏 뿌듯한 표정으로 포슬포슬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그런 다음에는?”
[네?]
“아니, 내가 제정신이 되는 것까진 좋은데 그래도 저 기사한테 떠넘겨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
[……음. 음…….]
아콰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아콰였다면 분명 무슨 대답이라도 해줄 텐데 이상하게 아무런 말도 없다.
오늘따라 아콰가 이상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의심이었다면 지금은 확신이 섰다.
“아콰?”
[분명 어떻게든 될 거예요!]
‘……뭐가 어떻게 되는데.’
한층 불신이 섞인 눈동자로 아콰를 쳐다보니 아콰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가며 내 시선을 피한다.
의심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눈을 매섭게 치켜뜬 채 계속 쳐다보니 아콰가 아예 내 손바닥에서 벗어났다.
훅 멀어져가는 아콰를 보며 앞으로 모았던 손을 내렸다.
“아콰 너…….”
[헉, 주인님! 누군가 오고 있어요! 전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콰가 내 손등으로 쏙 사라졌다.
“허…….”
허탈한 소리를 내뱉으며, 손등을 두어 번 손가락으로 톡톡 쳤지만, 아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망할 녀석.”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급히 손을 내리고 침대 헤드에 기댔다.
‘왜 안 들어오지?’
노크 소리가 들린 지 조금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문이 열릴 법한데도 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심지어 손잡이조차 돌아가지 않는다.
원래 살던 다락방에 찾아오는 시녀들은 노크는커녕 말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혔기 때문에 기분이 묘하다. 떨떠름한 눈으로 문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역시나 한참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똑똑. 생각에 잠긴 사이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건가?’
아마도 몇 번이고 노크하는 걸 봐선 이게 정답일 거다. 뒤늦게 정답을 찾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황녀가 무슨 대답을 한단 말인가.
짧게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어린애처럼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알아서 들어오겠지.’
그때까진 마음 놓고 편안하게 휴식이다.
“황녀님, 실례하겠습니다.”
……5초 정도의 짧은 휴식이었다.
아, 행복했다. 망할.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급히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어린애처럼 보이기 위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도 했다. 누군가 들어온 것에 놀란 듯 눈도 동그랗게 떴다.
‘일단, 조금씩 배워가는 척이라도 해보자.’
아이가 보통 말을 배울 땐 누군가의 말을 따라하게 된다. 나도 그것에 착안해서 사용인들의 말을 계속 따라하는 척을 하면 조금씩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 확률이 높다.
따각. 귀를 파고든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녀님, 손가락은 입에 넣으시면 안 됩니다.”
시녀가 안으로 들어와 놀란 표정으로 내 손을 입에서 뺐다.
대체 난 또 언제 입에 손가락을 넣은 거야?
이러다 연기를 그만둬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한숨을 삼켰다.
내 손을 잡은 시녀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시녀가 말을 하면 의심받지 않기 위해 떼를 쓰거나 말을 따라하려던 뇌가 그 온기에 사고를 멈췄다.
“우으…….”
시녀가 소맷자락에서 천으로 된 손수건을 꺼내 내 입술을 닦아낸다.
덕분에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갔다.
잊고 싶은 기억이 하나둘 또 차곡차곡 쌓여간다.
갈래머리를 한 시녀는 나를 방으로 안내해준 친절한 여자였다. 그녀는 시녀옷을 입고 있었으며, 볼에는 주근깨가 잔뜩 박혀있었다.
‘나랑 비슷한 또래려나.’
눈으로 시녀를 훑으며 생각했다.
시녀는 나보다도 훨씬 낮은 계급이면서도 표정에 그늘이 없다.
다정한 성격인 것을 보면 분명히 상냥한 부모 밑에서 자랐을 확률이 높다.
다정한 사람 곁에는 당연히 다정한 사람이 가득할 테니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입 안이 조금 썼다. 파고든 생각을 애써 지우며 입술을 뗐다.
“왜애?”
“손가락은 이것저것 만지니까 입에 넣으면 병이 옮아요. 그러니까 입에 넣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아주며 그녀가 말했다. 떼를 쓰기에도 참 양심에 찔릴 정도로 착하다. 날 데려온 기사를 닮아서 쓸데없이 미련한 모양이다.
“조아?”
“앗, 아뇨. ‘안 좋아’예요. 안, 좋, 아.”
내 말에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아니, 설명하지 마. 뭔가 이상해지잖아.’
떨떠름하게 시녀를 바라보니 시녀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하던 일도 멈춘 채 말없이 계속 나를 쳐다본다.
‘도대체 쳐다보는 이유가 뭐야?’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내 바람과 동시에 시녀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연다.
“‘좋아’가 아니라 ‘안 좋아’예요.”
시녀는 아예 침대에 앉은 나와 눈이 맞을 정도로 몸을 숙인 채 또박또박 말했다.
어쩐지 그녀가 원하는 바를 알 것 같아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 좋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안 해.’
시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나는 시녀의 호의 어린 시선에 눈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안. 좋. 아.”
‘안 한다고!’
부들부들 떨며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시녀의 웃는 얼굴엔 기대감이 잔뜩 서려있다.
내가 눈을 피하면 눈을 피하는 대로 쪼그려 앉은 채 쫓아와 눈을 마주쳤다. 새로운 괴롭힘인가 싶을 정도다.
“안 조아아?”
……아, 망할. 제길. 제발 누가 지금 날 이 세상에서 지워줘.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 나와는 다르게 시녀는 감동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 맞아요. 잘하셨어요!”
얘 분명히 밑으로 동생이 많을 거다. 아니면 나를 이렇게 애처럼 대할 리가 없어.
“아, 맞다! 황녀님. 저는 메리라고 해요. 메, 리.”
시녀, 메리가 내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눈을 반짝거리며 제 이름을 말했다.
의도는 명백하다. 게다가 아까부터 묘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이상했는데…….
‘나한테 일부러 맞춰준 거였구나.’
뒤늦게 메리가 한 행동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녀는 날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한 거다.
지금껏 누구도 해준 적 없는 배려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저런 짓을 하는 괘씸함과 드러누워 떼를 쓰려던 복수심이 사라졌다. 악의는 절대 없었으니 복수할 거리도 없긴 했다.
‘곤란하네.’
차라리 왕궁에 있는 편이 한층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다 이런 마음만 여린 사람들이 가득한 집에 데려다 놔서는…….
“황녀님, 저는 ‘메리’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메리가 거의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한다. 해주지 않았다간 해줄 때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다. 메리를 따라 방긋 웃으며 양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었다.
“메리!”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메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평생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하나둘 쌓여가는 기분이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네, 메리 여기 있어요!”
내 한마디에 얼굴이 확 밝아진 메리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나는 한층 더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물론, 내가 무슨 눈빛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대체 여긴 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이 순진해 보이는 존재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아주 잠깐 상대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란 힘이 쭉 빠져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