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99)

* * *

“황녀님, 메리가 금방 식사를 가져올게요!”

발랄한 인사에도 모른 척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힘도 없다. 얼마나 쉬지 않고 말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콰보다 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그 반열에 오를 것 같았다.

대답해준 것도 아니고, 종국에는 반응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꿋꿋했다.

‘자기 이름 불러주는 게 그렇게 좋은가.’

나로선 잘 모르겠다. 메리가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평생토록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 적도 없다.

그나마 오늘 왕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그가 내 이름을 부른 최초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인생이 좀 서글퍼지려고 하는데.’

내 이름이지만 나도 아콰가 말해주어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불러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불러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

‘이름 따위, 그저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 중의 하나일 뿐이지 않나.’

그게 그렇게 기뻐하고 감동할 일이라는 게 나로선 이해되질 않는다.

어쨌든 메리는 아까 내가 씻는 걸 도와줬다. 긁거나 때리거나 하지 않았던 덕분에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목욕을 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좋았다.

문제는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던 메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메리’라는 걸 쉬지 않고 강조하다 못해 아예 나중에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혼자서 몇 번이나 불러댔는지 그 수를 셀 수도 없다.

나는 그녀가 내게 친절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아콰가 보고 싶어졌어.’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지친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냥 다들 나가줬으면 좋겠다. 아콰의 주변에 흐르는 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또 한 명의 껄끄러운 인간이 찾아왔다. 나를 억지로 떠맡은 기사, 페델리우스였다.

<주인님.>

아콰가 나를 불렀다.

누군가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온 적은 없었기 때문에 몸이 크게 떨렸다. 급히 고개를 숙여 손등을 내려다봤다. 의심을 사지 않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려다본 손등은 다행히 문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콰가 아직 안에 들어있다는 거다.

슬쩍 고개를 드니 기사는 아콰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진 않다.

‘뭐지?’

<힘이 강해져서 주인님과 머릿속으로도 대화할 수 있게 됐어요!>

‘……아, 그런 것도 가능했어?’

<네! 이제 주인님도 물의 힘을 쓰실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럼요, 신의 문양을 가진 사람은 신의 힘을 쓸 수 있는걸요.>

처음 듣는 말이다. 눈이 동그래졌다.

여태까진 아콰에게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뭔가 되묻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전에 숙이고 있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녀 전하. 저는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의원입니다.”

‘아차, 이 사람들이 있었지.’

푸근해 보이는 목소리에 모른 척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노인이 있었다. 몸을 숙여 눈을 마주치는 의원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의원?’

왕궁의라면 왕이나 왕족들, 성에서 일하는 관리를 돌보는 사람일 거다.

나로선 여태 만나본 적이라곤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단지 아콰가 가르쳐준 상식으로 의원에 대한 정보는 있었다.

언젠가 아콰가 <황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해준 적이 있었으니까.

대답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의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자신을 의원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상당히 안심할 수 있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입술을 뻐끔거렸다.

“으원?”

“허허. 네, 의원입니다. 사람을 치료해주는 직업이죠.”

‘……아니, 그건 나도 알아요.’

굳이 하나하나 설명해줄 필요는 없는데. 여기 사람들은 뭐든지 설명을 해주려고 한다.

그저 말꼬리를 붙잡아 따라 하는 것뿐인 내 의미 없는 행동에도 말이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원래 있던 곳과 이곳의 온도 차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으니까.

이것들이 내가 원래 받았을지도 모르는 대우라고 생각하면 제국이 더욱 괘씸해진다.

철이 들 무렵, 복수를 위해 천치를 연기하기로 한 건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 전체에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아콰가 있던 내게는 아비인 황제를 죽이고 도망가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학대받던 내게 나타난 아콰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나는 그 아이를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일찍이 벗어나고 싶었다. 나 역시 몇 번이고 그런 충동이 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약 그런 일을 벌이더라도 트럼프 제국이 멸망하는 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고, 새로운 황제를 뽑고, 내가 먼저 저버린 제국엔 또 다른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태어난다.

내 어미의 처절하고 잔인한 죽음을 비웃는 귀족들이나 제국민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콰를 시켜 전부 죽여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에게 끔찍한 일을 전부 떠맡겨서는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나는,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했다. 불모의 토지로 만들어 그들이 말라가는 땅과 작물을 바라보며 무릎 꿇고 후회하길 바랐다.

원래는 제국의 희망이 되어야 했을 내가 도리어 절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줄곧 그것 하나만을 바라며 숨을 죽였다.

혹시라도 내가 ‘신이 선택한 자’라는 걸 들키지 않도록.

‘언젠가 거대한 제국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 때까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생각에 잠겨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녀 전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의원인 노인이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잠시 손을 줘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손을 가리키곤 웃어 보였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는 검지로 내 손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경계심을 한 번에 허물어버리는 웃음에 나도 모르게 노인의 손 위로 팔을 얹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피부에 닿는 감촉이 깔끄럽다. 하지만 따뜻하고,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그가 내 맥박을 재듯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노인의 손을 통해 내게도 맥박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머물러 있는 온기는 아콰의 부드러움과는 확실히 달랐지만, 어쩐지 다정했다.

‘착각이겠지만.’

아콰는 소중한 가족이지만, 이들은 타인이다. 그 물빛의 왕이 명령을 내렸기에 이들이 자신이 친절하게 다정하게 대하는 거다.

애써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음…….”

맥박을 재던 노인이 손을 떼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내 몸을 뒤로 돌려 등을 몇 번 꾹꾹 누르고, 손목과 팔 주위를 몇 번 만져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식사는 보통 뭘 하셨습니까?”

“식싸아?”

“네, 밥 말입니다. 밥.”

노인은 뭔가를 먹는 행동을 하며 내게 설명했다. 내가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한 몸짓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이런 식의 배려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저 정도 말을 알아듣는 건 무리가 없다.

“다과아! 빵! 마시써!”

단어와 박자에 맞춰 양손을 벌떡벌떡 머리로 위로 들었다.

제발 좀 다들 나가줬으면 좋겠다. 수치심에 붉어지려는 얼굴에 애써 볼 안쪽을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애써 통증에 의지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사실 첫날밤부터 의원과 대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의원에게 진단을 받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행위로 무엇을 진단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모른 척 고개를 기울이며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노인이 내 팔을 가리던 소매를 걷어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시나 정신적으로 멀쩡하다는 것이 들키진 않을까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렇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릴 정도다.

“감사했습니다.”

한참을 살펴보던 노인은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곤 손을 부드럽게 내려놨다.

한껏 휘어진 주름이 자리 잡은 눈은 다정하게만 보였다.

손은 분명히 떨어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닿았던 온기가 이상하게도 떨어져 나가질 않는다.

괜히 이상한 기분에 다른 손으로 잡혔던 손을 박박 문질렀다.

“자, 자, 그렇게 하면 손이 부어오릅니다.”

노인이 내 손을 막으며 말했다. 그는 내 손을 가볍게 부여잡고, 메리가 찾아올 때까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계속 던졌다.

그는 정말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쉽게 대화를 이어갔다. 손짓 발짓까지 다 더해가면서 말이다.

그를 데려온 페델리우스는 그런 노인을 뒤에서 말없이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열렬한 시선이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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