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99)

* * *

드디어, 해방됐다!

조금 전까지 메리가 떠먹여 주는 밥을 먹었다. 솔직히 조금 많이 수치스러웠다.

다만, 음식이 맛있었기 때문에 차마 입을 벌리지 않거나 떼를 쓸 수가 없었던 것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끝났다. 메리는 나갔고, 이 방엔 나뿐이었다.

“아콰!”

조금 다급한 기색으로 아콰를 불렀다.

<네, 주인님!>

“도망가자.”

<네……?>

“도망가자고.”

반문하는 아콰를 향해 눈을 샐쭉 부릅뜨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온기에는 익숙해지질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나라도 악의 없는 사람을 속이는 기분은 영 꺼림칙했다. 그냥 도망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듯했다.

내가 도망간 것으로 인해 전쟁이 나든지 말든지 신경 쓸 일이던가.

‘대신 죽여준다는데 나쁠 것도 없고.’

전쟁은 둘째 치고, 나는 예정대로 제국에 남아있는 물을 서서히 빼앗을 생각이었다.

내 생존을 위해 아콰가 최소한으로 조금씩 유지해놨던 강과 호수의 물을 완전히 말릴 예정이었다.

그다음엔 황실 창고에 비축해둔 물을 전부 빼앗을 거다. 그리고 제국 주변의 마을을 돌면서 내 신의 문양을 보여주며 예정된 일자에 비를 뿌리는 것이다.

신의 문양을 가진 진홍색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그들에게 각인시키면 된다.

그렇게 소문이 퍼지고, 퍼지고, 또 퍼져서, 궁지에 몰린 제국의 귀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진다. 언젠가 아콰가 이 세상은 약한 자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라고 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아콰 덕분에 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약하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약육강식이란 그런 것이라고 들었다.

<갑자기 어딜 가시겠다는 거예요, 주인님.>

“일단 이 집에서 벗어나자.”

생각에 잠겼던 나를 끌어내는 아콰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리는 내게 자라고 했으니, 아마 안으로 들어오진 않을 거다.

다행히 지금 입은 옷은 드레스처럼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다. 옷이 무겁지도 않고, 매우 가벼웠다.

피부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운 것이 여태 입어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덕분에 움직임이 가볍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저 문으로 정정당당 나가는 건 안 될 테고.’

굳게 닫힌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게다가 밖에 경비병은 없는 것 같지만, 인기척은 있었다. 문을 바라보다가 아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콰, 나도 너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물 위를 걷게 해드릴 수는 있답니다.>

“음, 그건 지금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콰의 뜬금없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니 아콰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쭉 내민다. 어지간히 이런저런 능력을 쓰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줄곧 제대로 된 능력은 쓰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면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한 능력은 없을까?”

<아……. 물속으로 뛰어들면 다른 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이 가능한 능력이 있긴 하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물이 많은 곳은 지금 이 방 안에는 없어요.>

곤란하네. 고개를 기울이니 아콰가 나와 똑같이 몸을 기울이며 생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물로 날개를 만들어드리는 건 가능할 것 같아요!>

아콰가 내 눈앞에서 이리저리 춤추며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신 사나울 법한 행위였지만, 아콰의 움직임은 이상하게도 흘러가는 물에 가까워서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려한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채 입술을 뗐다.

“그게 가능해?”

아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요, 물에 한해서 제가 못하는 건 없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주인님께서도 할 수 있어요. 날개를 만들어드리면 등에 생긴 손을 파닥거리는 느낌을 계속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서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집에서 튀자.”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대답했다. 일단 이 집을 벗어나야겠다. 어차피 인연이 끊긴 트럼프 제국이니, 놀려먹을 거리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날아오르기 위해 창틀에 다리를 하나 걸쳤다.

내 모습에 아콰가 입을 떡 벌리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화등잔만 해진 눈이 어지간히 놀란 모양새였다.

“아콰?”

<흑흑, 주인님…….>

어떻게 들어도 인위적인 울음소리에 절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왜?”

<치마를 입고 창문 위에 다리 한쪽을 올리시면 어떡해요?! 다 보인다고요! 제가 열심히 가르쳐드린 건 벌써 주인님의 머릿속에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나 보군요……. 게다가 저는 튀자는 단어는 가르쳐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잔소리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아, 또 시작됐다. 잔소리…….’

왕국에 온 이후로는 좀 없어졌나 했더니 또 발동이 걸렸다. 이제는 빛무리도 아니라 표정까지 있어서 더 생동감 있다.

한창 단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곧잘 아콰가 보여주는 물거울 속 세상의 단어들을 쓰곤 했다.

물론 그것 대부분이 비속어거나 좋은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아콰에게 제법 혼이 났다.

‘하지만, 입에 착착 달라붙었는걸.’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콰도 마주 뚱한 표정을 짓는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모습에 먼저 입매를 풀어버린 것은 나였다.

“푸흐……. 정말. 아콰, 알았어. 미안하니까 날개 좀 부탁할게.”

손을 들어 아콰의 머리를 톡톡 치며 부탁했다. 아콰가 힐끗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한 번 허공에 휘저었다.

<주인님, 다시 돌아오실 거죠?>

새파란 날개가 등에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아콰가 내 날개를 만들어주곤 물었다.

얘는 또 무슨 소리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물로 된 날개를 몇 번 파닥거리다 미련 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읏!’

정신을 날개에 집중하려니 조금 힘겹다. 몇 번 날개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니 조금씩 적응이 된다.

늘 가볍게 움직이는 아콰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나도 공중에서 몇 번 빙글 돌아봤다.

등에도 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익숙하지가 않다. 집중하니 생각보다 적응은 빨랐다.

한층 움직임이 안정됐다. 몸을 돌려 옆으로 다가온 아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안 돌아올 거야.”

<앗, 설마 이대로 떠나시려고요?>

“응. 그럴 생각인데? 아콰, 그래서 이대로 국경을 넘어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

응? 등 뒤에서 파닥거리던 날개가 없어진 것 같다.

하던 말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콰가 어쩐지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콰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급히 손을 뻗고 있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긴 했지만, 아콰의 손은 붙잡기엔 너무 작았다.

‘떨어진다……!’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나를 바닥으로 훅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님!>

“꺄아아악!!”

두려움이 들기도 전에 목에서 비명이 튀어나갔다.

시야가 반전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아콰가 내게 날아오는 것이었다.

‘싫어!’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다가올 통증에 대비했다.

물컹. 무언가 등에 닿았다.

“……아콰?”

말랑한 것이 모든 충격을 흡수한 듯 통증은 없었다. 혹시나 아직 떨어지는 중인가 싶어 기다려봤지만,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은 없다.

그제야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손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밑에는 물로 만들어진 네모난 무언가가 있었다.

물처럼 보이지만 네모난 형체가 있었고, 나를 받아줄 만큼 단단했지만, 또한 부드러웠다.

마치 투명한 뭔가에 물을 가득 채워 만들어놓은 침대 같다.

물론 그것은 나를 받아주곤 금세 자취를 감췄다.

“윽!”

덕분에 물이 사라진 공간만큼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봐야 발목 정도 높이라 참을 만한 통증이었다.

꼬리뼈가 찌르르 울리긴 했지만 말이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하늘에서 아콰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려왔다. 아이는 경악한 얼굴을 한 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부색이 새파래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새하얗게 질린 것처럼 느껴졌다.

“지,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정말 놀랐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뒤늦게 공포가 몰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일어날 수도 없었다. 손이 덜덜덜 떨리기까지 한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모습 그대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았다.

<다치신,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응……. 다행히도.”

아콰는 떨어진 나보다도 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니 아콰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다.

<주인님,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갑자기 힘이 풀려서…….>

늘 차분하던 아콰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떨며 설명했다. 겁에 질린 표정에 도리어 내가 아콰를 위로해줘야 할 것 같아 손을 뻗었다.

아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갑자기, 갑자기……. 쓰고 있던 능력이 와해해서……!>

“아콰.”

어떻게든 설명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는 아콰를 작게 불렀다.

<네에…….>

“걱정하지 마, 나는 네가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애처롭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깨끗하고 투명하다.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처럼 아름다워서 나는 한동안 아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으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녀님!”

“이런. 일단 들어가, 아콰.”

속삭임 수준의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콰가 울면서 손등으로 사라졌다.

미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들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콰가 사라지자마자 메리뿐만이 아니라 순찰하던 병사와 집사, 그리고 페델리우스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아차…….’

그렇게 큰 비명이었으니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솔직히 비명이야 상관없긴 하다.

‘설마 대화하는 걸 듣진 않았겠지?’

불안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달려왔다. 내가 대화를 했다는 이상한 기색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어떻게 여기……. 설마, 설마 떠, 떨어지신 거예요? 어디 다치신 데는?!”

메리가 나를 붙잡더니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상태를 살폈다. 달걀만큼이나 커다랗게 뜬 눈동자엔 물기가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 것 같은 모양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울던 아콰 같다.

‘왜?’

나도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술이 자연히 벌어졌다.

“왜…….”

울어? 물으려고 했던 뒷말은 내뱉지 못했다. 뒤늦게 내 처지를 깨달은 탓이다.

결국, 열었던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굳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페델리우스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대체, 뭘 하셨습니까?”

그도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목소리가 제법 딱딱하게 굳어있다.

아무리 얼굴을 굳히고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대답할 수나 있겠는가. 가만히 보면 학습능력이 없는 건 이 남자도 상당했다.

‘게다가 나는 우직한 기사님께 왕이 준 선물인데 망가지면 곤란하겠지.’

다정함에 속지 않도록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콰는 인간이란 언제든 필요에 따라 등을 돌릴 수 있는 동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금껏 사람들이 그랬다. 아콰의 말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으으응…….”

몸을 비틀며, 기사에게서 멀어졌다.

도망치려고 날개를 달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 내 상황에선 말을 할 수도 없다.

페델리우스가 집요한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에 절로 피곤해졌다.

‘그냥 도망은 내일 칠 걸 그랬다.’

아콰도 피곤해서 힘이 갑자기 풀렸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아니면 내 피곤함이 아콰에게 옮겨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지금껏 잊고 있던 피곤함이 물씬 몰려왔다.

놀란 심장은 아직 벌렁거리고, 떼쓰는 데도 지쳐서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별 반응하지 않는 내게 페델리우스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훅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얼굴에 슬쩍 몸을 비틀었다.

물론 그건 성공하지 못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내 팔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리곤 다리부터 시작해 허리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 시작했다.

꼬리뼈를 제외하곤 다친 곳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니 그제야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페델리우스는 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흡!” 갑작스레 들어 올려져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또다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품에 안겨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질 않나, 공중에 들어 올려지질 않나…….

정말, 안심할 수 없는 하루다.

“페드로.”

“네, 주인님.”

“혹시 모르니까 내일 메디르 님께 잠시 들러달라고 연락을 넣어둬. 그리고, 창문은…….”

페델리우스가 말을 멈췄다.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말이다. 그 재미없는 대화 덕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오늘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제국에서 버림받은 날이다. 그런데 왜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걸까.

다사다난한 일들이 몰려들어서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하루였다.

“건축가를 따로 불러 안전장치 같은 걸 설치할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집사와 페델리우스의 대화는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스쳐 지나간다. 버둥거릴 힘도 없어서 아예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페델리우스가 나를 조금 더 힘을 줘 끌어안았다.

낮과는 다르게 갑옷을 입지 않아서 그런지 얇은 천 위로 페델리우스의 열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페델리우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메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훌쩍거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메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같은 상황에서 아콰가 운 것은 이해한다.

아콰와는 줄곧 오래 함께 있었고,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아마 펑펑 울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메리가 무언가 불행한 사고로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거다.

오늘 하루다. 겨우 오늘 만난 사람에게 저렇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인데.’

울먹이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그냥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주할 곳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만 든다.

내게 선택권은 없었지만, 어쨌든 타인의 친절은 내게 있어 좋지만은 않은 일이다.

친절이나 호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상대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줘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있어선 안 될 곳에 자리 잡은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불편하기 그지없다.

가시넝쿨 위에 서 있는 심정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깊어지는 생각과 함께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피곤함에 감기는 눈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조금 무리하긴 했다.

‘오늘만큼 사건·사고가 잦았던 적도 없지.’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깊은 어둠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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