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젯밤은 잘 보냈나? 페델리우스.”
입궁 후 기사단에 얼굴을 비치고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파에 늘어져 누워있는 폐하가 보였다.
“폐하.”
그를 부르며 망설임 없이 소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만큼이나 긴 머리카락이 소파 바닥까지 흩어져 엉망이다. 언제 봐도 신비한 물빛 머리카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다.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그 빛깔은 한 번 보면 도저히 잊히지 않을 정도로 신비했다. 마치 햇빛이 비친 물로 머리를 물들여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황녀께선 별 탈 없이 잠을 주무셨습니다. 저도 잠은 잘 잤습니다.”
장난기 어린 말에 적당한 대답을 내놨다.
“흠. 황녀는 제법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던데, 그런 이를 보고도 동하는 마음이 없었느냐?”
폐하의 짓궂은 질문에 묵묵히 그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 올려줬다.
매번 이런 식으로 놀려대는 것이 폐하의 일과의 시작이다.
한 번 받아주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알기에 별다른 반응을 해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무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여린 분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제법 못 먹은 것 같긴 하더군.”
“예, 메디르 님께 진찰을 부탁드렸는데 학대를 심하게 받은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차분히 대답하니 폐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볼 때마다 정돈하기 어려운 머리카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대?”
“네. 시녀인 메리가 씻기면서도 몸 전체에 상처가 많았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보고하는 목소리가 제법 떨렸다.
아마 애써 밝은 모습을 하는 것도 그런 어두운 표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군. 황녀는 자네를 제법 따르나?”
폐하의 질문에 겁에 질려 몸을 떠는 황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아무리 둔한 자신이 봐도 그건 기꺼워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도리어…….
“아뇨, 무서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생물이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폐하의 앞이라는 걸 깨닫고 최대한 미간의 주름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페델리우스. 동물이든 맹수든 그것들을 길들이기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이해되지 않는 뜬금없는 물음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머리를 굴렸다.
맹수를 길들이는 방법이야 내가 알기론 하나뿐이었다.
“서열을 각인시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수고스럽지 않은 방법은 다친 맹수를 치료해주는 거지. 상처받은 동물이 다정함이라는 온기를 알게 되면 더는 온기 없이 살 수 없게 되거든.”
무엇이 즐거운지 폐하는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폐하께서 아침에 집무실 소파에 늘어져 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보통 정무는 오후부터 볼 때가 많았다.
“온기, 말입니까?”
“그래. 원래는 평생 몰랐어야 할 온기에 닿아버린 맹수는 온기를 잊지 못해서, 온기를 준 상대 옆에서 떠날 수 없게 되게 되는 거야.”
소파 옆에 가만히 선 채 폐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할 때가 많은 분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도 그런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폐하의 말에는 언제나 뼈가 있다. 의미 없는 말을 하시는 분은 아니다.
“상처 입은 맹수는 황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맹수라기보단 아무리 봐도 작고 여린 초식동물이었지만 말이다.
“글쎄, 어떨 것 같나?”
폐하가 빙그레 웃으며 도리어 되물었다.
말꼬리를 늘이는 것을 보니 대답해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확신 어린 대답이 듣고 싶긴 했지만, 말장난 위에서 춤출 생각은 없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폐하의 얼굴이 심드렁해졌다.
“재미없군.”
“폐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절 놀림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주십시오.”
“어떡하겠나.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내 검이 마음에 들어버린 것을 말이야.”
예전에는 저 말에 감동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곧 다른 뜻을 깨닫게 됐다.
결국, 왕께서는 내가 만만한 놀림감이라는 말을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다.
폐하를 존경하지만, 종종 저런 가벼운 장난에는 혀를 내두르고 싶어질 때도 있다. 처음 그를 모시게 됐을 때는 거의 폐하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 수준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겠지.’
지금은 저런 장난에도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게 됐다.
그래 봐야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전부지만, 처음에 비해선 크나큰 발전이다.
생각하는 도중에 폐하가 하품하며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밖에서는 늘 위엄 있으신 분이 꼭 아침 집무실에선 물먹은 솜처럼 기운이 없다.
“폐하.”
“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신 이유는 역시 황녀께서 계셨기 때문입니까? 원래는 거절하실 예정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내 질문에 폐하께서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새파란 눈동자는 지금껏 봐왔던 어떤 물보다도 더욱 선명했다.
그 외모 덕에 폐하는 태어났을 때부터 태평성대의 길조로 여겨지며 찬사를 받았다.
“그래, 황녀를 보고 마음을 바꿨지. 멍청한 제국 놈들이 보석을 돌덩이로 착각하고 내게 넘기지 않나. 그래서 받아준 것뿐이야.”
“……보석, 말입니까?”
내게 떠넘겼기에 내켜 하지 않는 줄 알았다. 하지만 폐하께선 황녀가 마음에 든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혹시나 볼모로서의 가치를 약간이라도 발견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다행인 건가.’
그녀를 향해 검 끝을 돌릴 확률이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러니 잘 돌봐주거라, 페델리우스.”
“네, 알겠습니다.”
폐하께선 황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폐하는 마음에 드는 것은 손에서 놓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녀의 소문 때문에 일단 내게 맡겨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황녀께선 언젠가 황제께…….’
점점 추측과 함께 뻗어가는 생각을 단숨에 잘라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지금은 일하는 도중이었다. 나라의 하나뿐인 왕을 지키는 시간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배제해야 했다.
“또 나쁜 버릇이 나왔구나.”
“예?”
“멋대로 가지를 부풀리지 마라. 황녀의 신변은 네게 준 것이야.”
폐하가 검지를 쫙 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가 절로 기울어지는 말이다.
나를 보던 폐하가 소맷자락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꺼내 그것을 입에 물었다.
“나는 그 황녀에게 더는 관여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처분하는 것도, 이후의 거처를 정하는 것도 네게 일임했으니 말이야.”
점점 더 의아한 말뿐이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았는지 폐하가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덧붙여 말했다.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성냥을 꺼내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재가 순식간에 타오른다.
폐하가 그것을 깊게 빨아들였다.
“예?”
후. 연기가 눈 앞을 가렸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황녀는 네게 길이 됐으면 길이 됐지, 흉이 되진 않을 거다. 지금이야 조금 골치가 아프겠지만…….”
“골치 아프지 않습니다.”
폐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뱉어놓고 나도 아차 싶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폐하의 말을 끊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 정도의 공방은 늘 있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군.”
이런 게 문제였다.
“…….”
“페델리우스, 자네가 여자 때문에 주인을 저버리는 속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폐하가 좋은 꼬투리를 잡은 듯 장난기 어린 소년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리곤 이내 서운한 척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게다가 얼마나 과장을 심하게 했는지, 한순간 더러운 웅덩이에 빠진 놈이 된 기분이다.
“하아, 열심히 키우면 뭐 하나. 결국 이리 등을 돌리는 것을.”
“…….”
한동안은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처음 이곳에 온 뒤로 최대한 꼬투리 잡히지 않게 노력했는데 한순간에 무너졌다.
최대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게 노력했다.
‘반응하는 게 아니었어.’
이미 내뱉은 말이 되돌아오진 않지만, 어쨌든 후회되는 일이다. 모른 척 시선을 돌려 봐야 폐하에겐 소용없는 반항이었다.
적어도 이 일을 앞으로 반 년간은 우려먹을 사람이니까.
“그래, 어쨌든 골치 아프진 않다 이 말이지.”
폐하가 소파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휘어진 눈동자가 제법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앉아 있던 폐하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집무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자네라면 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네.”
팔을 뻗은 폐하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곤 내 옆을 지나쳐 책상 쪽으로 향했다.
울컥,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어린애 취급을…….’
집무실 의자에 앉은 폐하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엿보였다. 애써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 눌렀다.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놀리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참자.’
이제 나는 더 이상 혈기왕성한 어린애가 아니다. 반응하지 않고 참으면 된다.
이 정도 장난은…….
“아, 그렇다고 황녀에게 빠져서 날 잊으면 안 되네.”
“…….”
예전에 비하면야…….
“혹시 첫날밤이라도 가지게 되면 꼭 말해주고.”
“…….”
꽈악. 주먹이 쥐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순간 마주친 폐하의 눈빛에 즐거움이 보인다.
울컥, 목까지 차오른 감정을 다시 애써 억눌렀다.
“음,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 자네 아랫도리는 제대로 서나?”
“…….”
폐하와의 인연은 거의 십 년 가까이 됐다. 어린 나이에 기사단 시험에 합격해서 들어와 폐하의 손에서 직접 굴려졌다. 훈련량이 남들의 두 배는 됐을 거라고 자부한다.
“여태 여자랑 있는 꼴을 보지 못했으니. 아, 설마 서지 않는다면 내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뚝, 몇 개 남아있지 않던 인내심이 또 하나 끊겼다.
“폐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오랜만에 저와 한 수 겨뤄주시지 않겠습니까?”
“자네와? 상관없지만 질 텐데?”
되묻는 목소리에 깔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솟았다.
격해진 감정을 알면서도 갈무리할 수 없는 것은 폐하가 늘 민감한 부분을 잘 건드리기 때문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정중함은 잃지 않았다. 폐하께서 마음먹으면 결국은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게 되어있다.
알면서도 매번 순순히 따라줄 수 없는 것은 저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얄밉기 때문이다.
“좋아, 대신 자네가 지면 다음에 황녀를 한번 데려와 보게.”
“황녀 전하를 말입니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래? 그럼 당장 좀 데려와 보게. 생각해보니 내게 안기라고 교육까지 해 보낸 것 같던데, 내가 먼저 안아주지 않으면 황녀에게도 실례되는 일 아니겠나?”
툭, 투둑, 툭. 마지막 남아있던 인내심과 이성이 결국 끊겼다. 머릿속에 손만 대도 벌벌 떠는 황녀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만 툭 대도 날아갈 것 같은 황녀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 대부분이 농담이라는 것은 알지만, 언제든 진담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그의 위치였다.
그런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안겠다니.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데리고…….”
“제가 이길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반쯤 오기 서린 단호한 대답에 폐하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의 만면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오오, 내게 말이냐? 그것 참 가상한 말이구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자, 그러면 오랜만의 연무장 방문이구나.”
폐하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책상 옆에 세워둔 검을 허리춤에 찼다.
결국 폐하는 원하시는 걸 얻은 모양이다. 한결 시원해진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용당한 느낌뿐이었지만, 한숨을 삼키고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지.”
“예.”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서는 폐하를 두 걸음 뒤에서 바싹 따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무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느낌뿐이다.
‘황녀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폐하여도, 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눈을 보면 그런 마음은 들지 않을 거다.
그는 황녀를 맹수로 비유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병아리다.
‘재상께 또 혼이 나겠군.’
재상은 유일하게 폐하의 말장난에도 무던히 대처하시는 분이다.
나도 존경하는 분이지만, 좀처럼 그와 같이 폐하의 말에 담담히 반응할 수가 없다.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일 재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