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99)

어둠이 내려앉고,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오늘 하루는 아주 즐거웠다. 아—주 즐거웠다.

얼마나 즐거웠냐면, 한시도 안 떨어지려고 하는 메리 때문에 아콰가 제대로 골이나 그것을 달래주느라 시간이 훌쩍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다행히 메리도 중간중간 일이 있는지 한 번씩 자리를 비우긴 했는데, 그것도 정말 잠시였다.

거의 오 분에 한 번씩은 방문에 얼굴을 들이밀곤 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한 일을 후회했다. 어제 도망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 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기왕 도망칠 것이었다면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할 것을 그랬다.

“아콰, 이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이 들면 알려줘.”

<네에…….>

“아직도 화난 거야?”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으니 아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얼굴은 여전히 밝지 못했다. 조금 심각해 보이기도 한다.

여태까지 아콰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될 정도다.

<주인님, 저 내일 잠시 외출을 해도 될까요?>

고민에 빠진 아콰가 내게 물었다. 정중한 물음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요구사항이어서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뒤늦게 표정을 숨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서? 어디에?”

<왕께, 자르딘의 왕께 다녀오려고 해요.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서요.>

“도대체 그 왕은 뭐 하는 사람이야?”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아콰가 혼자 찾아간다는 걸까?

궁금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아콰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곤란하게 해버린 모양이지만, 저렇게까지 숨기니 궁금해서 버틸 수가 없다.

하지만 아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결국, 애써 차오르는 의문을 치워냈다.

내 표정에 아콰가 코앞까지 다가와 급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자르딘의 왕에 한해서는 전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저는 주인님과 더는 함께 있지 못할지도 몰라요.>

겁에 질린 듯한, 혹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더는 추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줄곧 함께였던 친구에게 비밀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알았어. 저녁에는 오는 거지?”

뚱한 기분을 애써 내리눌렀다.

<네! 그리고, 내일부터 제가 물을 다루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다 터득하시고 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은 주인님을 위해 흔쾌히 모습을 바꿀 거예요.>

“그럼 내가 직접 죽일 수도 있어? 예전에 네가 했던 것처럼, 몸의 수분을 빼앗아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무심하게 물었다. 내 물음에 아콰가 허공에서 두어 번 뱅글뱅글 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이렇게 손을 대고 단지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서 물이 사라지길 바라시면 돼요.>

아콰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손바닥을 한번 내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옮기니 넓은 창문으로 밤 풍경이 보였다. 장막을 친 듯 내려앉은 어둠 위로 박힌 수많은 보석이 눈을 사로잡는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다.

‘밤은,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어제는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이다. 꽤 늦은 밤이다. 이런 고요한 밤에는 정적이 내려앉는다. 미세한 잡음이 들리던 낮과는 다르게 밤에는 세상이 온통 적막에 휩싸인다.

내가 지내던 어두운 다락방의, 달빛조차 비치는 날이 별로 없는 작은 창문에는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성의 가장 꼭대기였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의 나는 그 적막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을 비춰주는 푸른 빛의 아콰를 만나기 전까지는 밤이 오는 것이 줄곧 두려웠다.

느릿하게 아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주다 시선을 내렸다.

손등에 새겨진 푸른색 문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러고 가만히 있으니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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